#206화
성광공, 엘로임 폰 바드리안 공작.
만신전의 주인이자, 모든 교단의 우두머리인 통합주교의 자리에 올라선 자.
아스텔리아 대륙에서 신이 가진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만신의 대리자인 성광공의 위치는, 신 그 자체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하지만.
[참으로… 대단하군. 스스로 신이 되는 것도 모자라, 신계의 영향력을 아예 끊어버리려고 시도하다니.]
이안의 앞에 나타난 만신의 대리자는, 그저 초췌한 노인의 모습일 뿐이었다.
이안이 물질계를 멸망시키려는 신계의 계획을 폭로하고, 운석과 달의 여신을 막아내는 장면을 전 대륙에 실시간으로 방송한 순간.
그의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깎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원망스럽기라도 한가?”
[그건 아닐세.]
엘로임을 향해 이안이 묻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신계의 계획을 제대로 막지 못한 내 잘못이 크지. 만신의 대리자로서 임무를 충실히 하지 못한 탓인데, 어찌 자네를 원망하겠는가.”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말을 마친 엘로임은 부끄러움에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안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곤 물었다.
“그러면, 나한테 연락한 이유는 뭐지?”
이안 자신에 대한 원망을 쏟아낼 목적이 아니라면, 성광공이 자신에게 연락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 말에, 엘로임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이안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재차 입을 열려고 할 때.
[나는 신의 대리자일세.]
성광공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대리할 신이 존재하지 않는 대리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신은 물질계를 버렸다.
그 사실이 전 대륙에 알려진 순간, 대륙의 지성체들이 신을 버리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단의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과 교단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성광공은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지만 이안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은 어쨌건 신계와 적대적인 사이이고, 성광공은 그들의 대리자이니 어찌 보면 적의 편이 아니던가.
애초에, 이안은 엘로임이 자신에게 무슨 생각으로 연락한 것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이안의 태도를 눈치챈 것인지, 엘로임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교단을 만들 생각은 없나?]
“교단?”
[그래, 교단.]
교단이라는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성광공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도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되어보았으니 알겠지만, 자네가 가진 신적인 힘은 온전히 자네의 것이 아닐세.]
“그건… 그렇지.”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분명 자신이 가진 마동력의 일부를 이루는 신성에는, 대륙의 지성체들이 자신에게 보내온 신앙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분명히, 그 신앙을 유지해야 할 필요는 있지.’
최소한, 신들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교단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걸세. 이미 자네가 행한 일을 전 대륙의 지성체가 알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자네를 신으로 섬기기 시작했을 것이야. 교단을 만든다는 건, 거기에 체계를 부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일세.”
“흐음….”
[내가 도와주지. 자네는 귀찮은 일엔 신경 쓰지 말고, 신계를 상대하는 일에만 전념하면 된다네.]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신앙을 더욱 체계적으로 뽑아먹을 수단이 하나 생기는 셈이니, 결과적으로 이안의 힘은 더욱 강해지리라.
하지만, 이안의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 당신이 얻는 건 뭐지?”
눈앞의 노인이, 아무 이득도 없이 이런 제안을 할 리 없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안은 상대가 바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검신의 대리자라는 자리를 원하는 거겠지?”
성광공이 다루던 힘은 결국 신의 것.
자신의 권세를 뒷받침해 주던 신들의 힘을 잃었으니, 그의 입장에선 새로운 신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으리라.
[그렇네. 아까도 말했지만, 신이 없는데 대리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게, 그리고 우리 가문에겐 이 방법뿐이네.]
말을 마친 엘로임은 절박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가 가진 영웅급의 페르소나는 다행히도 힘을 잃지 않았지만, 그 페르소나를 개방할 신성력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성광공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자신과 바드리안 가문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흠….”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자신을 대신해 귀찮은 일을 해 준다는 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 정도로 끝내긴 좀 아쉽지만.’
생각을 마친 이안은 엘로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
[조건… 말인가?]
설마, 여기서 또 다른 제안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엘로임의 눈이 커졌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드리안 공작가가 아슈타르 공작가에 편입되는 것.”
성광공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건… 말도 안 되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성광공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바드리안 공작가가 아슈타르의 신하가 되라는 말이 아니던가.
연합공국의 일곱 공작가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던 바드리안 공작가다.
그들이 가진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엘로임의 반응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안될 건 뭐야?”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안의 코웃음뿐이었다.
“날 섬기는 건 되면서, 내 밑에 들어오는 건 거부하겠다는 건가?”
[섬기다니, 자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성광공은 신을 섬기지 않아. 신의 일을 지상에서 대리할 뿐이지. 신들이 지상에 힘을 내뿜기 위해선 우리가 필요하니까.]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공생하는 관계.
그것이, 신과 바드리안 가문 사이의 관계였으니, 엘로임의 반응은 당연했다.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엘로임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우우웅-!
“내가, 정말로 대리자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그, 그건….]
이안이 전력을 다해 마동력을 끌어올리자, 엘로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본래 물질계에 직접 힘을 가할 수 없었던 신계의 신들과는 달리, 이안은 물질계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이다.
그 사실인즉슨.
“좀 귀찮긴 하겠지만, 내가 직접 교단을 이끌어도 되겠지. 내 페르소나를 가진 신검대원들을 사제로 삼은 다음, 대륙 전체로 뿌려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안에겐, 굳이 성광공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으음….”
이안의 말에 말문이 막힌 엘로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여차하면 이안이 자신의 제안을 팽개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차오른 탓이다.
그때.
“아, 그리고.”
이안이 말을 꺼내자, 엘로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나 검신 아니니까, 그놈의 검신 얘기 좀 그만해.”
***
[이안, 성광공가를 품을 생각이냐?]
엘로임과 대화를 마치고, 미미르는 이안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성광공은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어.”
연합공국의 다른 공작들과는 달리, 성광공과 바드리안 가문의 능력엔 신의 힘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드리안 공작가에 남은 것은 사실상 쇠퇴와 멸문뿐이리라.
하지만 미미르는 이안의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성광공가를 만만히 보면 안 된다, 이안. 그들이 연합공국을 이끌어온 세월을 생각하면, 숨겨둔 한 수 정도는 있을 게 분명해.]
하지만 이안은 미미르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어쩌겠어? 당장 신이 사라진 마당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텐데.”
그렇지 않았다면, 아슈타르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이안의 제안을 거절했을 터.
하지만, 엘로임은 거절하는 대신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을 뿐이다.
“빠르건 늦건, 바드리안 공작가는 결국 내 손 안에 들어오게 될 거야.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시작이라니?]
이안의 말에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안은 더 이상의 설명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은 먼저 할 일이 있거든.”
타앗!
말을 마친 이안은 집무실 바깥으로 난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스터의 육체가 가진 강력한 근력과 마동력이 순식간에 그의 몸을 수십 미터 위로 쏘아 보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은 자신의 몸속에 내장된 페르소나를 향해 마동력을 가득 불어넣었다.
콰과과과-!
곧, 다리에 두 개의 거대한 로켓엔진을 장착한 이안이 하늘 높이 솟구쳐올랐다.
“검신이시여…!”
“우리를 보우하소서…!”
“젠장, 다음에 내려가면 저 검신이란 소리부터 못 하게 해야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이안을 발견한 영지민들의 찬양을 들은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계신이나 총신 같은 거라면 이해라도 하지, 검도 쓰지 않는데 검신은 무슨 놈의 검신이란 말인가.
[그럼, 신검의 주인을 검신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겠나?]
“빌어먹을.”
이안의 어깨에 올라탄 미미르가 그의 속을 벅벅 긁어대는 와중에도, 이안의 육체는 대기권 바깥을 향해 빠른 속도로 솟아올랐다.
그의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쯤에 있을 텐데….”
대기권 바깥, 위성의 정지궤도에 도달한 이안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목적한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프레이야가 말하던 아스가르드인가?]
마도위성 아스가르드를 처음 마주한 미미르는 신기한 표정으로 마도위성을 관찰했다.
‘지구의 것과는 확실히 다르게 생겼단 말이지.’
마력을 사용해 가동되기에 태양전지판은 달려있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지구의 인공위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
위성의 외부에 방어용 무장과 지상공격용 무장으로 보이는 길쭉한 막대기 몇 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평범한 원통형의 인공위성.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지.’
이안의 계획대로라면, 녀석은 이제부터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거다.
“프레이야.”
[네, 관리자님.]
이안의 부름에, 시스템의 제어정령이 우주 공간 위로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이안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스가르드와 관련된 일인가요?]
“맞아.”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스가르드의 다음 봉인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