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물질계의 존재들이 신계라 부르는 행성의 형태는, 물질계와는 판이했다.
위치는 태양계로 치면 화성쯤.
하지만 그 구성성분이 단단한 암석과 금속인 물질계와는 달리, 신계는 기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행성이었다.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기체 덩어리가 수많은 신들의 안식처라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다들 모였군.]
수많은 신들이 신계의 허공에 운집한 것을 확인한 마법의 신, 갈리우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모든 신들이 알고 있겠지만, 지금의 사태는 매우 심각하오.]
아니, 고작 심각하다는 단어로 표현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신계에 거주하는 신들에게 힘을 보태주던 물질계의 신앙이 끊겼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밥줄을 끊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를 포함한 몇몇 신들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세력이 약한 일부 신들은 벌써 허신이 되기 직전이라고 하더군.]
[허신이라니….]
[그런 끔찍한 일이….]
갈리우스의 입에서 나온 허신이라는 말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신이 신앙과 이름을 잃고 허신으로 격하 당한다는 건, 어쩌면 소멸보다도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곧, 자리에 모여있던 신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늦기 전에 당장 물질계로 가야 하오!]
[물질계로 가서,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녀석에게 진정한 신의 위엄을 보여줘야 할 것이니!]
[그 강대한 달의 여신조차 놈을 막지 못했소. 어떻게 놈을 몰아내고 다시 신의 위엄을 떨칠 것인지부터….]
[지금 신계의 힘을 무시하는 거요?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그게 아니라….]
신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짙어지는 신성력이 신계의 대기를 어지럽게 흩어내기 시작했지만, 신들의 목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쿠구구궁
강한 신성에 영향을 받은 대기가 신성력의 폭풍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하던 그때.
[그만.]
보다 못한 갈리우스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목소리를 높이던 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한심한 모습에 갈리우스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오. 한시라도 빨리 중간계의 존재들에게 신앙을 수급할 방법을 생각해내는 게 먼저니까.]
그러지 못한다면, 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 여기 모인 신들은 모두 이름을 잃은 허신으로 격하되리라.
하지만.
[마법의 신이여, 그대도 알지 않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신을 자칭하는 그 인간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의 말에, 신들은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자에게 있었으니까.
‘이안 폰 아슈타르.’
갈리우스는 그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공국의 일곱 공작 중 하나.
그리고 마왕토벌자라는 별명을 가진, 신검 레온하르트의 주인.
‘왜 하필….’
사실, 갈리우스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에게 별다른 악감정을 갖지 않았다.
마경에서 마왕들을 처리할 때만 하더라도 그 모습을 천계에서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대는 선을 넘었네.’
이안이 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건드려버린 순간, 갈리우스는 더 이상 이안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우선, 빛의 신이 돌아오면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합시다. 그자와 만나 이야기를 하고 온다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것이오.]
[좋소.]
[그렇게 하지요.]
갈리우스의 말에 모여있던 신들은 일제히 동의를 표하고는, 빛의 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파아앗-!
빛의 신 마르콘은, 이미 이안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신들이 깨달은 것은, 마르콘이 소멸당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
마르콘과의 조우를 마친 이안은 다시금 물질계와 아슈타르를 향해 방향을 돌렸다.
[이안 폰 아슈타르]
[페르소나명: 미미르]
[등급: 신]
[마동력: ??????]
[개방 필요 마동력: ??]
[증폭률: ?????%]
[권능-전이, 방출, 흡수]
‘흡수라.’
마르콘을 소멸시킨 다음 얻은 권능을 확인한 이안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시험해 봐야 알겠지만, 셋을 섞으면 그럴듯한 게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아니지만, 자신이 가진 페르소나의 힘과 연계한다면 무언가 괜찮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새로운 종류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쁠 일은 없었으니, 이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보창을 바라봤다.
[이안, 정말로 할 셈이냐?]
그런 주인의 어깨를 네 발로 꼭 붙잡은 채, 미미르는 이안을 향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정말로, 신계와 전면전을 벌일 거냐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이안은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다 봐놓고서 뭘 물어봐? 내가 마르콘을 소멸시킨 순간, 전쟁은 이미 시작한 거라고.”
신계의 제안을 거부하고 제안을 보내온 전령인 빛의 신까지 소멸시켰으니, 전쟁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설사 내가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제안한다 치더라도, 놈들은 그럴 생각이 없을걸? 벌써 신을 둘이나 소멸시킨 나를 가만 놔둘 리 없지.”
애초에 그만하자고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을 마친 이안이 물질계의 대기권을 향해 내려가며 어깨를 으쓱하자, 미미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겠군. 물질계의 피해도 꽤나 크겠어.]
신들의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얕볼 수는 없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물질계의 존재들에게 신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녔던 존재들.
이안이 신계의 신들에게로 향하던 신앙을 끊어버린 덕분에 조금 약해지긴 했다.
하지만 신계의 수많은 신들이 힘을 합친다면 물질계가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리라.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안은 코웃음쳤다.
“애초에, 놈들이 물질계로 발을 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애초에 물질계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만든다면, 물질계가 피해받을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신계와 물질계 간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신들이라면 수일 내로 오갈 수 있을 거다.]
물론, 미미르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저들이 물질계의 존재들에게 신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터.
“뭐, 그 안에만 막아내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할 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어느새 대기권 안으로 진입한 상태.
하얗게 번진 구름 아래로, 익숙한 대륙의 모습이 언뜻언뜻 드러나 있었다.
아스텔리아다.
파아앗-!
이안은 머나먼 우주 공간에서 물질계까지 데려다준 다리의 로켓엔진을 제트엔진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곧장 이슈타르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알자스 성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안의 몸이 수도와 가까워진 순간.
“…뭐야?”
성을 둘러본 이안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검신께서 돌아오셨다!”
“물질계를 지키는 유일한 신이시여….”
“검신이시여, 물질계를 굽어살피소서….”
광장에 모여있던 영지민들이, 자신을 보자마자 절을 올리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신이라도 본 것처럼, 몇몇 영지민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안의 등장에 놀라 실신까지 할 정도.
거기다.
“검신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가 신검의 주인인 신검공이긴 하지만, 그가 다루는 검이라곤 허리춤의 대검뿐.
성의 분위기로 볼 때 저 검신이라는 호칭은 자신에게 붙은 것이 분명했으나, 정작 검을 다루지 않는 이안의 입장에선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검신이시여! 저희를 수호하소서!”
“검신! 검신!”
‘일단 성으로 들어가야겠어.’
영지민들의 환호성과 기도를 뒤로한 채, 이안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성 내의 상황 역시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거, 검신….”
이안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날아들어 가자, 자신과 눈이 마주친 미넨과 베티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 되지도 않는 별명은 누가 붙인 거야?”
설마 둘의 입에서도 검신이란 말이 튀어나올 줄 몰랐던 이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노려봤다.
“신검의 주인이 신이 됐으니, 당연히 검신이지 않겠냐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그… 검신님?”
“검도 안 쓰는데 검신은 무슨. 편하게 불러.”
미넨의 말을 듣던 이안이 손사래를 치자, 베티와 미넨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 공, 아니 검… 어쨌든, 영지 상황은 나쁘지 않아. 신검대의 훈련도 얼추 끝나가는 상황이고, 전 대륙에 보여준 활약 덕분에 공국 전체의 여론도 매우 좋은 편이야. 마음만 먹는다면 연합공국이 아니라 아슈타르 공국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이제 와서 무슨 필요가 있겠냐마는.”
사실상, 마왕토벌자에서 신살자로 진화해버린 이안의 힘이라면 전 대륙을 통일하는 것쯤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다룬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고작 인간의 수준인 신검대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
하지만.
“아니, 앞으로 필요할 일이 있어.”
미넨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뭔데?”
“신계에 방금 선전포고를 하고 오는 길이거든. 겸사겸사 마르콘도 처리하고.”
“…뭐?”
순간, 미넨은 잘못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안의 표정을 본 순간.
“마르콘이라면… 빛의 신?”
“그래.”
“맙소사.”
미넨은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세리아에겐 뭐라고 말할 생각이야? 너희 신과 조금 불행한 일이 있었다?”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세리아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계와의 전쟁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으니, 적의 전력을 하나라도 더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나중에 사무치는 원망을 들을지라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이안은 미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영지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건 됐고, 용들의 상황은….”
하지만 이안은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었다.
삐이이-!
집무실 안에 놓인 통신구슬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이 자신의 분신인 미넨에게로 향했다.
“미넨.”
“알았다고.”
이안이 보낸 눈빛의 의미를 눈치챈 미넨은 곧장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미넨이 사라지고 난 다음, 이안은 통신구슬에 마동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통신구슬 위로 노인의 환영이 떠올랐다.
[신검공. 아니, 검신이라고 불러야겠군.]
“…성광공.”
성광공, 엘로임 폰 바드리안.
만신을 잃어버린 만신전의 주인이, 이안을 향해 슬픈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