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익숙한 건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폭발의 후폭풍과 낙진을 피해 하늘을 날고 있던 이안은, 어느 순간 자신이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시작이군.’
하지만 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스텔리아에 온 이후로, 이 건물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국가정보원]
이안은 정문 옆 기둥에 걸린 현판을 흘깃 쳐다보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장소라곤 하지만, 올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정문과 연결된,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제외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원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건물의 생김새.
이안은 혀를 내두르며 끝없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하지만, 감상의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와, 이젠 몰라보겠는걸?”
끝없는 복도의 반대편에서 나타난 상대가 이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안은 상대, 육체의 원래 주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야. 몇 달은 된 것 같은데.”
원 주인은 이안의 손 인사를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던 이안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한창 바쁠 때였는데.”
핵폭발의 후폭풍과 낙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육체를 보호하는 신급 페르소나의 힘이 작용한다곤 하지만, 핵폭발의 부산물인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까지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 말에 원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이곳의 시간은 바깥과 다르게 흐르니까. 밖은 거의 멈춘 것이나 다름없을걸?”
“그렇다기엔, 내가 기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지.”
원 주인의 말에 이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원래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랑은 조금… 상황이 다르거든.”
“다르다니?”
이안은 말을 마친 상대의 낯빛이 조금이지만 어두워진 것을 깨닫고는 물었다. 상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이 우리가 만나는 마지막 날이거든. 그래서 힘을 좀 썼지.”
“마지막이라니….”
상대의 말에 이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날이 오늘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예언 속 존재를 처리했으니, 이제 내 역할도 끝난 것 아니겠어? 역할이 끝난 예언자는 사라져주는 게 도리라고.”
하지만 육체의 원 주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다음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알 수 없어. 다시 말해서.”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겠지. 그건 뭐, 익숙한 일이니까.”
“마지막까지 말꼬리 가로채는 건 여전하네.”
“불만이라도 있나?”
“전혀.”
이안이 이죽거리자 원 주인은 고개를 젓고는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곤.
“고맙다.”
감사와 함께, 이안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갑작스러운 상대의 감사 인사에 이안은 잠시동안 할 말을 잊어버렸다. 상대가 말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내가 본 미래를 바꿀 수 있었어. 이런저런 준비가 있긴 했지만, 결국 네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그 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마.”
말을 마친 원래 이안이 허리를 펴곤 이안을 향해 웃어 보였다.
“마지막이라고 분위기 잡기는. 폐검 이안의 최후라고는 믿을 수 없겠어.”
하지만 이안은 웃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선 원래 이안의 몸이, 조금씩 반투명하게 변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좀 봐달라고. 내게 허락된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원래 이안은 반투명해져 가는 몸을 슬쩍 살피며 이죽거렸다.
“아, 깜빡할 뻔했네.”
하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마지막으로 이안에게 전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 짐승의 힘을 흡수해라.”
“마신의 힘을 흡수하라고?”
“그게 마신이었나? 어쨌건, 그 힘을 흡수한다면 네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원하는 목표가 뭔지 알고?”
상대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너를 위협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러면, 너는 자유를 누리게 될 거고.”
원 주인의 말을 듣자마자, 이안의 눈빛은 확 바뀌었다.
자유.
그것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안이 그토록 바랐던 것이었으니까.
“뭐, 마신의 힘을 흡수한 다음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너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누가 뭐래도, 너는 멸망을 막아낸 사람이니까.”
말을 마친 육체의 원 주인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안은 이제 거의 투명해진 상대의 모습을 보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가는 건가?”
“음, 여기까진가 보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살았지.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상대는 희미해진 자신의 몸을 슬쩍 훑어보고는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상대의 모습은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릿해져 버렸지만, 이안은 그가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부탁한다. 아슈타르와 대륙을 지킬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걱정 말라고.”
이안의 말에, 이안이 답했다.
그리고.
쿠구구궁-!
세계가, 무너졌다.
***
[…안! 이안!]
“음….”
정신을 차린 이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는 미미르의 외침이었다.
“안 죽었어. 머리 아프니까 그만해.”
머릿속을 가득 울리는 외침에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미미르는 다급했다.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다! 지금, 네 몸이 추락 중이란 말이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이안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간이 안 가기는 개뿔…!”
우우웅-!
눈앞을 가득 메운 지면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안은 입에서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마동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쐐애애액-!
곧이어 들려온 것은, 전력으로 화염을 내뿜는 제트엔진의 가동음.
“후우, 후우….”
지면과 충돌하기 직전에 간신히 하늘로 떠오른 이안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의 삶은 이것으로 끝났을 터.
아무리 그가 신적인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수천 미터 높이에서 맨몸으로 떨어지고 살아남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이안은 다시 고도를 올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난장판이군….”
핵폭발의 후폭풍이 지나간 지면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본래 마경이 황폐한 곳이긴 했지만, 그 황폐한 땅 위에도 마수 몇 마리 정도는 돌아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무쯤은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바람이 할퀴어댄 자국뿐이었다.
[폭풍 덕에 한동안 추락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완전히 끝장날 뻔했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게냐?]
주인과 함께 박살 날 뻔한 위기를 간신히 극복한 미미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안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저길 가야 한단 말이지….”
조금 전 핵폭발이 일어났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폭발이 일어난 지 꽤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폭발의 중심인 폭심지는 여전히 수백 도가 넘는 열이 남아 있는, 인세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마신의 힘을 회수해야 해.’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라면, 이안은 지옥에라도 웃으며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쐐애애액-!
[이안, 갑자기 어디로 가는 거냐! 거긴 너무 위험해!]
이안이 방향을 반대로 돌려 날아가자 당황한 미미르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하지만 이안은 페르소나의 말을 듣기는커녕, 속도를 더욱 올릴 뿐이었다.
‘녀석의 말이 맞는다면, 뭐라도 남아 있겠지.’
지면에서 수천 미터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뜨거운 열기가 페르소나의 보호를 뚫고 느껴져 왔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이안은 폭심지 중앙에 위치해 있을 마신의 흔적을 찾았다.
‘설마, 피폭돼서 죽지는 않겠지.’
작은 걱정과 함께 유리처럼 번쩍거리는 크레이터를 살핀 이안은, 곧 원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가?’
유리처럼 녹아내린 지면과 대비되는 보라색의 보석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쐐애액-!
이안은 거리낌 없이 크레이터를 향해 날아들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 초만 서 있어도 즉사할만큼 강한 방사능과 수백 도의 열기로 들끓는 곳.
하지만 신급 페르소나의 보호력은 이안의 육체를 충실하게 지켜주고 있었고, 보호를 뚫고 들어온 방사능은 마스터급에 이른 이안의 육체에 별 다른 해를 입히지 못했다.
이윽고, 이안은 마신이 남긴 보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삼켜도 되나? 이거 방사능 덩어리 아니야?”
오른손에 주먹만한 크기의 보석을 쥔 채, 이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서, 그 고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스으으-!
‘흡수된다.’
이안의 손에 쥐어지자마자, 거대한 보석이 손에 쥔 얼음처럼 서서히 그의 손 아래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윽…!’
이안은 손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뜨거움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신의 발톱에서 마기를 흡수했을 때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
이안의 촉이 위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난다.’
고농도의 방사능과 열기로 가득 찬 지옥에서 처리하기엔, 손안에 담긴 힘이 너무나 강력했다.
쐐애애액-!
다리에 구현한 제트엔진을 전속력으로 가동한 이안의 몸이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이안, 괜찮은 게냐?]
“괜찮을 리가… 없잖아….”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힘겨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안으로 완전히 녹아든 마신의 마기는, 어느새 그의 오른 손목까지 보라색으로 물들여버렸다.
본래 마기는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침식하는 힘을 갖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
지금까지는 마력과 신성력을 이용해 균형을 맞추어왔지만, 갑작스럽게 몸 안에 들어온 강력한 마기가 그 균형을 깨버린 탓이다.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마신의 마기가 자신의 몸을 완전히 침식시키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
그렇기에, 이안은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마력과 신성력이 필요해.’
마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당장 마도위성 아스가르드에서 뽑아내고 있는 마력을 주입하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신성력은 그렇지 못해.’
이안이 신성력을 공급하기 위해선, 더욱 많은 신성을 모아야 했다.
그러나, 신성을 모으는 일은 마력을 모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어려운 일.
그가 전 대륙인의 숭배를 받아 신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은, 이만한 신성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때.
‘…잠깐.’
이안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