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브라움과 이안, 둘 중 하나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저 흘려들었을 얘기.
“세계가 멸망해버린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나는 공국을 지배하는 일곱 공작 중 하나였고.
‘나 역시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다른 하나는 일곱 공작 중 하나이자, 실제로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이안의 물음에 브라움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광공이 직접 말했네. 신벌을 내릴 거라고.”
“신벌?”
그 말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신의 대리자인 성광공이라면, 신들을 대신해 신벌을 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충분히 들었지만.
“무슨 신벌을 내리길래 세계의 멸망 이야기까지 나오는 거야?”
이안이 의아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신과 필멸자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공생하는 관계였으니까.
세계가 멸망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필멸자들이 멸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
신들에게 신앙을 바치는 필멸자들이 사라진다면, 신앙을 제힘으로 삼는 신들에게도 타격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
‘그건 성광공에게도 마찬가지지.’
스스로 팔다리를 자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을 저지를 거란 이야기가, 이안에겐 썩 믿기지 않았다.
“그것까진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대륙에 퍼져있는 모든 교단의 대사제와 주교들이 만신전으로 움직였네. 최소한, 거기 모인 주교와 대사제들의 신들에겐 동의를 받았겠지.”
“…그렇단 말이지.”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 직접 가서 확인하면 그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폭권공가는 대륙의 멸망을 막겠다?”
“다른 공작들 중엔 아직 모르는 자들도 있는 것 같지만, 이 사실을 안다면 모두 신검공 자네를 지지할걸세. 대륙의 운명이 달린 일이야.”
이안의 물음에 브라움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이안이 거절할 거라는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에서 살아가는 자라면, 대륙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겠지.’
그리고, 대륙의 멸망을 획책하는 자가 자신의 적 중 하나인 성광공이라면 더더욱.
브라움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이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다르다니, 그게 무슨….”
이안의 입에서 생각과 다른 답이 튀어나오자, 폭권공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한쪽 팔이 날아간 채 얼빠진 표정을 지은 폭권공을 향해 말했다.
“그쪽 말대로 성광공이 대륙을 멸망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우우웅-!
“지금 당장, 때려 부수면 되는 일 아니야?”
마동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린 이안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 그건 불가능한 일이네! 자네의 힘이 나를 꺾을 만큼 강하다곤 하지만, 성광공의 힘은 신과 맞먹을 정도란 말일세!”
이안의 말에 폭권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의 눈에, 이안은 충분히 강했지만 신과 맞먹을 정도라고 하기엔 손색이 있어 보였으니까.
‘아스가르드.’
하지만 이안은 이미 상대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자신과 연결된 마도위성, 아스가르드를 깨운 이안은, 자신의 한쪽 시야를 가로막은 위성영상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위이잉-!
곧, 아스가르드의 수많은 센서들이 바드리안 공작령과 그 중앙에 위치한 만신전으로 향했다.
‘저건가.’
수십, 수백 번의 확대가 끝난 끝에, 이안은 폭권공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파아앗-!
본래는 거대한 고층빌딩이 있어야 할 곳을 가득 메운 순백의 성스러운 빛.
‘분명, 성광공이 만들어낸 거겠지.’
정확히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위이이이잉-!
이안의 의지가 발한 동시에, 그의 양 다리에 구현된 제트엔진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뭘 하려는 겐가!”
이안의 다리에서 울려 퍼지는 귀청을 찢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에 폭권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안의 대답은 짧았다.
“때려잡으려고.”
그와 동시에.
쐐애애액-!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면 위에 서 있었던 이안의 신형이,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허, 허허, 허허허.”
홀로 남겨진 외팔이 권사의 얼굴에, 평정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
‘끝이다.’
파아아앗-!
모두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성광공, 엘로임 폰 바드리안 공작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해제했다.
“후우….”
만신전을 뒤덮던 후광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타난 것은, 일천의 신들이 가진 후광을 짊어졌던 노인의 피로한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엘로임은, 다시 지팡이의 형태로 돌아온 페르소나를 힘겹게 짚고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아직은, 쓰러져서는 안 된다.’
최소한, 자신의 앞에 선 자들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신들이시여….”
“저희를 구하소서….”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만신의 대리자인 통합 주교가 신들의 힘으로 대륙을 구할 것이라기에 모였을 뿐.
정확한 내막을 아는 것은 오직 천계의 신들과 엘로임 자신뿐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신들이 대륙을 인질로 잡았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되니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도, 신들도 파멸이다.
신의 힘을 지상에 전파하는 바드리안의 핏줄은, 자신을 신들과 공동운명체로 묶어버려야만 했으니까.
대륙인들의 신앙이 사라진다면, 그 타격은 신성력을 다루는 바드리안 공작가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지.’
너무나 많은 신들의 힘을 받아들여 영혼이 지쳐있었지만, 엘로임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단 사실을 잊지 않았다.
“대륙의 형제들이여.”
자신의 앞에서 경외하는 표정으로 기도하고 있는 각 교단의 대사제들과 주교들을 향해, 엘로임의 입이 열렸다.
“이제 대륙은 안전할 것이니, 모두 돌아가시오.”
거짓말이었지만,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대륙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신들과 통합주교의 덕분입니다.”
“은혜로운 천계의 신들이시여….”
“대륙을 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엘로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른 채, 만신전에 모인 수많은 대사제들과 주교들이 통합주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찬양했다. 엘로임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대륙의 균형을 깨는 마족들과 신검공, 이안 폰 아슈타르의 전횡은 끝나게 될 것이오. 곧, 신들께서 직접 하계로 내려올 준비를 마쳤으니.”
“아아….”
“역시, 신들께선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엘로임의 말이 끝나자, 대사제와 주교들의 찬양은 더욱 커졌다. 엘로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의 형제들을 바라봤다.
콰아앙-! 콰아앙-!
자신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기 전까지는.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진동을 느낀 성광공은 폭발음이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콰아앙!
그는 볼 수 있었다.
콰아앙! 콰아앙!
무언가가, 어마어마한 폭발음을 연속으로 내며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 이게 무슨… 마르콘.”
빛의 신의 힘으로 급히 자신의 안력을 강화한 엘로임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시, 신검공!”
콰아앙!
다리에선 불꽃을 내뿜은 채, 폭발음과 함께 충격파를 사방에 뿌려대는 이안의 모습을.
***
[이안, 귀청이 찢어질 것 같다! 이건 무슨…!]
“조금만 참아, 다 왔으니까.”
콰아아앙!
폭탄이 연속으로 터지는 것 같은 폭발음에 귀를 막은 미미르가 신경질을 냈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곤 엔진에 힘을 더했다.
콰아앙!
음속의 벽을 넘을 때마다 들리는 소닉붐(Sonic Boom)에 그의 귀도 얼얼하긴 했지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만신전에 도달하기 위해선 그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만신전이 보인다.’
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눈앞에 나타난 고층빌딩의 모습에, 이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쐐애애액-!
만신전을 발견한 이안이 만신전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끼이이익-!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은 다리의 제트엔진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감속했다.
그러자.
“저, 저건….”
“이안, 이안이다!”
“신검공!”
“마왕토벌자!”
갑작스러운 소음에 귀를 틀어막고 있던 대사제와 주교들이 이안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놀란 것은 성광공, 엘로임 역시 마찬가지.
지친 몸으로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있던 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이 엘로임과 모여있던 대사제, 주교들을 향했다.
“이제 보니, 여기서 작당 모의들을 하고 있었구만?”
조금 전 아스가르드로 확인한 사실이긴 했지만, 막상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자 조금 전 폭권공에게 들은 말이 조금 더 그럴듯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작당 모의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혼자 여기를 찾아오다니, 죽으러 온 것인가?”
무언갈 알고 있다는 듯한 이안의 말에 엘로임은 눈썹을 꿈틀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이안의 대답은 차가웠다.
“아니, 죽이러 온 건데.”
우우웅!
그와 동시에, 이안의 양팔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철컥!
이안 자신의 몸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30밀리 기관포, GAU-8 두 정이 지팡이를 쥔 엘로임을 향해 겨눠지는 데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듣고 온 게 있어서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정말 죽일지도 몰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엘로임의 표정이 굳어졌다. 노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먼저 저들은 보내주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오.”
“보내주면?”
“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이야기해 드리도록 하지. 여기까진 본래 신들과도 이야기가 된 부분이니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은 엘로임이 굳은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거기 뒤쪽, 빨리 사라져. 그렇지 않으면….”
부아아아아앙!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양팔에 장착된 GAU-8이 허공에 불을 뿜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GAU-8 특유의 발사음 앞에서, 이런 폭력적인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사제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발사를 멈춘 이안의 눈이 사제들을 향해 번쩍 빛났다.
“너희 신들도 너희 시체를 못 찾게 될 테니까.”
곧, 대사제들과 주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계단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좋아, 이제 들어도 되겠지?”
“좋소.”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엘로임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안을 바라봤다.
그리곤.
“항복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신들은 대륙의 모든 생명을 무로 되돌려버릴 거요.”
“…뭐라고?”
엘로임의 입에서 나온 일방적인 협박에, 이안은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