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신검공은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더 이상의 만행을 멈추라.”
탈마공 디아블로.
한 때 마경의 지배자 중 하나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신의 하수인이 되기로 결심한 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마왕의 것이 아니었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미성(美聲).
마왕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라기엔, 너무나 경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뭔 개소리지?”
소름 돋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앞에서 이안은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대지 말고 눈치껏 잘해라, 뭐 그런 소리입니까?”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느껴진 이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고 자신을 견제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협박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정확히 맞췄네. 역시 젊은이답게 이해가 빠르군.”
하지만 디아블로는 이안의 말에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기까지는 신계에서 보낸 것이고, 지금부터 설명할 것은 상세한 해석이네.”
“해석말입니까?”
그 의도가 대놓고 보이는 한마디 말 어디에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단 말인가.
그 말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최후통첩일세.”
탈마공이 입을 열기 전까진.
“최후통첩?”
“그래.”
디아블로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탈마공이 고개를 끄덕이곤 재차 입을 열었다.
“신검공, 그대는 너무 자유로워. 역대 신검공이 다들 그랬지만, 자네는 특히.”
“마왕 잡은 거 말곤 딱히 뭘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마왕 잡았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그게 문제야. 자네의 행동은 신과 마의 균형을 깨고 있어.”
이안의 말에 디아블로가 고개를 저었다.
“균형을 깨다니, 그건 무슨 개소린지….”
물론, 무슨 소린지는 이안도 잘 알고 있다.
그저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떠보기 위한 것일 뿐.
이안이 아무것도 모르겠단 투로 고개를 내젓자 디아블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왕을 줄이는 건 좋은 일이네만, 너무 많이 줄였어. 빛과 어둠 사이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세계의 균형이 뒤틀리게 된단 말일세.”
‘뭔 소리지?’
이안이 알고 있는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
디아블로의 뚱딴지같은 소리를 들은 이안은 최대한 표정 변화를 줄여가며 생각했다.
‘하나는 마왕, 하나는 전 마왕.’
둘의 이야기가 다르다면, 가능성은 결국 하나뿐이다.
‘둘 중 한 명이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그리고, 이안의 촉이 가리키는 것은.
“그래요? 내가 아는 거랑은 좀 다른데.”
자신의 앞에 선 염소머리 마왕이었다.
“…뭘 안다는 거지?”
그의 말에 디아블로는 고개를 들곤 물었다. 이안은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다.
“여기 오기 전에, 마왕을 하나 만나고 왔거든.”
“…뭐?”
비록, 그 말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지만.
“마왕한테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걔는 좀 다르게 말하더라고요?”
자신의 말을 듣고 놀란 토끼눈을 뜬 염소악마를, 이안은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메피스토를 만나고 온 것이냐?”
“뭐야, 어떻게 안 겁니까?”
디아블로의 말을 들은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표정을 본 디아블로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메피스토를 만나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다니, 확실히 그대의 힘은 강대하단 말이지.”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죠.”
“그 ‘마신’이야기, 아닌가?”
디아블로가 정곡을 찌르자 이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탈마공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메피스토가 항상 하던 말이지. 다른 마경의 군주들보다 먼저 깨어난 그였으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잊어버리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마전쟁 때 마신이 이미 강림했어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테니.”
말을 마친 디아블로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안의 촉은 달랐다.
‘뭔가 있어.’
그의 목숨을 수없이 구해온 촉이,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하지만 대뜸 숨기는 게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 이안의 눈이 탈마공과 마주쳤다. 탈마공이 입을 열었다.
“영지 밖을 벗어나지 말게.”
그리고.
“…뭐?”
그 말을 들은 이안은 순간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애들처럼 방에 가둬두기라도 할 셈인가 보군요. 참 신들다운 방법입니다.”
“마지막 경고일세.”
하지만 디아블로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시간 이후로 그대의 몸이 아슈타르 밖을 벗어난다면, 신들은 그대를 저버릴 것이야. 그리고, 아슈타르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신들이 아슈타르를 저버린다.
그 말인 즉슨.
“전쟁입니까?”
“그래. 자네와 함께 싸워온 여섯 공작들이 자네를 칠 걸세. 날 포함해서.”
여섯 공작들은 모두 마왕, 혹은 마스터 급의 힘을 지닌 강력한 존재들.
“아무리 자네가 강대한 힘을 가졌다지만, 마스터 급의 실력자 여섯을 당해내진 못하겠지. 아슈타르 역시 마찬가지고.”
협박이었다.
멸망을 맞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순순히 자신들의 말에 따르라는 이야기.
이안은 잠시, 아주 잠시 동안 고민했다.
‘받아줄까?’
여섯의 공작.
물론 이안에 의해 바뀐 참룡공을 제외하면 다섯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하다.
권법, 신법, 마법, 정령술, 궁술.
제각기 다른 길을 걸은 끝에 정점에 오른 강자들.
이안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아슈타르를 걸고 저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그리고, 지켜낼 수 있을까.
찰나의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이안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하지만.
“애초에, 신들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행운을 빌지. 부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게나. 그 전까진 나도 적대할 생각이 없으니.”
“저야말로.”
이안의 답을 들은 탈마공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어차피 마족들과는 더이상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마경에 더이상 갈 필요는 없다는 의미.
마키나 대륙이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그쪽도 원격으로 연락은 되니까.’
단 한 번.
제작자의 유산에 다시 접속해야 할 순간.
그 한순간만 벌 수 있다면, 이안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당분간은 감수한다.’
기회가 찾아올 때까진.
“좋아, 그럼 이제 내 볼일을 봐야 하겠지.”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탈마공은 잠자코 있는 이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볼 일 말입니까?”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디아블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내 자식의 볼 일이지만 말야.”
“파이톤이?”
이안의 시선이 옆에 앉은 파이톤에게로 옮겨갔다.
아버지가 있기 때문일까.
평소와는 달리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던 반마족 소년은 이안을 향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이가 자네에게 주고 싶은 게 있다더군. 그렇지 않느냐, 파이톤?”
“네, 아버지.”
디아블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파이톤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파이톤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라본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주먹만한 구슬.
하지만, 구슬의 내부는 비어있지 않았다.
희뿌연 연기와도 같은 무언가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
“이게 뭐지?”
“선물입니다, 공작 전하.”
평소와는 달리 존댓말을 쓰는 파이톤이 이안은 영 어색하긴 했지만, 그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니. 선물인 건 알겠는데, 이게 뭐냐고.”
정체 모를 구슬 하나를 대뜸 선물이라며 던져줄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 말에 파이톤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희의 계약을 기억하십니까?”
“그, 신체 데이터를 수집한다는 거?”
모를 리 없었다.
영성의 홀에서 아무것도 모르던 이안이 파이톤과 맺었던 계약.
기초적인 마력운용법을 배우는 대신, 이안의 신체데이터를 수집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 계약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파이톤에게 마력운용법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이안은 페르소나도 얻지 못한 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파이톤의 미소가 짙어졌다.
“전하께서 주신 정보를 활용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자 이안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혼입니다.”
“…뭐라고?”
“말하자면, 인공 영혼이죠.”
이안의 짜증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저 구슬 안에 영혼을 담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공 영혼이라니.
“영혼을 만들어 냈다고?”
“네.”
그것도, 보통 영혼이 아니었다.
“공작전하의 영혼을 모사해서 만든 영혼이죠.”
경악한 이안을 향해, 파이톤은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
마왕 하나와 반마족 하나를 돌려보낸 다음.
“후….”
이안은 손에 쥔 구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허, 참. 말도 안 되는 기술이군. 마법으로 영혼을 모사해 낼 줄이야.]
그래, 정확히는 영혼이라 할 수 없었다.
생명체의 몸에 깃들 수 있는 진짜 영혼과는 달리, 이 ‘인공’ 영혼은 오직 구슬 안에서만 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젠장, 찝찝하네.”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다시 말해서, 이 주먹만한 구슬 안에는 자신과 똑같은 자아를 가진, 말하자면 복제인간 같은 존재가 갇혀 있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런 걸 만들어 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솔직히,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파이톤이 자신과 여러 번 함께 힘을 합쳐온 전우가 아니었다면, 이안은 그 자리에서 불같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물론, 파이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는 이안은, 화를 내는 대신 다시는 자신의 영혼을 모사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었지만.
“이걸 어떻게 한다….”
사실, 그냥 성의 창고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자신과 똑같은 자아를 가진 존재를 그렇게 방치하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일단은….”
이야기를 해보자.
자기 자신과.
‘이렇게 하라고 했던가?’
희뿌연 연기가 가득 찬 구슬을 손에 쥔 채, 이안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저 구슬 안에 들어있을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이봐, 거기 있나?’
이안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넌, 누구지?]
머릿속에서, 답이 들려왔다.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