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야?”
메피스토가 도와달라는 말을 꺼냈을 때, 이안이 맨 처음 보인 반응은 어이없음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소멸시킨 마왕과 마족이 몇이던가.
마왕 토벌자라는 이명까지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마왕 중의 마왕이 도움을 요청하다니.
이안은 메피스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고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간절했다.
“네 녀석 말고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을 마친 메피스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반응을 본 이안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마족의 존망이 달린 일이지.”
이안의 물음에 메피스토는 설명을 시작했다.
“마족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나?”
“마기?”
이안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이기에, 금방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 말을 듣고 메피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마기 안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 마족은 마기 밖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마족이 품은 마석이 마기를 계속 뿜어내도록 설계된 것도 그 때문이지.”
“설계라니….”
메피스토의 설명을 듣던 이안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마족을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마족의 기원은 뭐지?’
마족이 신과 함께 아스텔리아에 등장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마족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인가?”
메피스토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나름의 판단을 내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놀랍군. 짧은 대화로 여기까지 파악할 수 있다니.”
그 말을 들은 메피스토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은 필요 없고. 맞아, 아니야?”
하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대신 눈빛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맞다. 정확히 말하면, 그 근원이 문제인 것이지.”
“근원?”
“마족들의 창조주이자, 마기의 진정한 주인.”
잠시 말을 멈춘 마왕 중의 마왕, 메피스토는 한숨을 쉬며 마지막 단어를 내뱉었다.
“마신.”
***
마신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다른 신들이 마신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들과 다른 종족이라고 선을 그었을 만큼.
신계에서 쫓겨난 마신은 그 사실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마신께서 가진 고유한 힘인 마기를 물질계 전체에 퍼뜨려, 신계의 다른 신들이 물질계에 손도 댈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자신들의 창조주에 대해 처음으로 설명하는 마경의 군주, 메피스토의 표정은 비장했다.
“못 먹는 밥에 재 뿌리기같은 건가? 신이란 작자가 할 일 치고는 좀 치졸한데.”
이안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지만.
메피스토의 설명을 듣는 그의 혓바닥은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메피스토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신께서 본인의 신체(神體)를 쪼개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리 마경의 군주들과 마족이다.”
“그럼, 마신은?”
메피스토의 설명을 듣던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마경의 군주와 마족들의 몸 안에 조금씩 봉인되어 있지. 그 봉인체의 일부가 바로 마석이고.”
“그러면, 내가 마신의 절반 이상은 해치워버린 셈이군.”
이안의 손에 소멸한 마왕이 몇이던가.
심지어, 그중 하나는 마석이 되어 이안의 마력을 충전하는 발전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만하면, 그 강대한 마신의 절반 정도는 그의 손으로 처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메피스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반대다.”
“반대라고?”
반대라니.
그러면, 이안이 마신을 살려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메피스토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녀석이 마경의 군주들을 해치워 준 덕분에, 마신의 일부분이 봉인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곧 메피스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신이 곧 깨어날 수도 있단 소리겠네.”
“그래.”
“축하해. 너희를 만들어 낸 조물주가 다시 깨어날 줄이야. 설마, 감사의 선물이라도 줄 생각인 건 아니겠지?”
말과는 달리, 이안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신.
그것도, 다른 신들이 두려워 배척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 봉인에서 풀려났단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안 자신의 손에 의해서.
물질계에서 신의 영향력이 커지지 않길 바랐던 이안의 입장에선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마신께서 다시 깨어나는 것은 내게도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표정을 굳힌 것은 메피스토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질계에 뿌려진 모든 마기와 마족은 본디 마신의 것. 마신께서 다시 깨어나게 된다면….”
“너희가 가진 힘 역시, 마신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말이겠지?”
“그렇다. 마경의 군주와 마족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 역시 함께.”
“너희 입장에선 소멸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겠어. 싫어할 만 하네.”
그제야 메피스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한 이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피스토가 말을 이었다.
“신마전쟁이 서로의 멸족에까지 이르지 않은 것도 그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승리하는 게 큰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 균형을 깨버린 게 바로 나고 말이야.”
물론, 이안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마왕들을 소멸시키지 않았다면, 당하는 건 아슈타르였을 거야.’
이안이 마경의 군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은, 단순히 방어적인 이유에서였으니까.
하지만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일은 벌어졌다.
“그래서,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은 뭐지?”
이제라도 알았다면, 해결하면 될 일이다.
이안의 물음에 메피스토는 짧게 답했다.
“더이상 마족들이 죽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뭐라고?”
“그래, 기왕이면 동맹관계를 맺는 것도 좋겠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그것은 이안의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었다.
마족과 동맹이라니.
수백 년간 죽고 죽이던 자들에게 동맹요청을 받은 이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너무나 제정신이다.”
메피스토는 태연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공작전하,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마족과 동맹을 맺으라니….”
“맞습니다. 공국의 다른 공작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안의 두 기사, 도노반과 에반이 당황해 입을 열었지만.
“좋아.”
잠시 생각하던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은 도노반이 경악해 소리쳤다.
“전하!”
“대신.”
“대신?”
물론, 이안 역시 맨입으로 제안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받아야 할 게 좀 많아 보이는데 말이지.”
말을 마친 이안의 눈이 빛난 순간.
‘뭐지?’
메피스토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도노반과 에반.
그리고 공작령의 많은 사람들에겐 다행스럽게도, 마족과의 동맹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당장 벌어지지는 않았다.
메피스토와 이야기를 나눈 이안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슈바이크 대신 아슈타르 공작령의 새로운 수도가 된 알자스.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많은 게 변했어.”
에반과 도노반이 끌고 온 비행초계함의 갑판 위에서 도시를 바라본 이안의 입에서 절로 휘파람 소리가 나왔다.
새롭게 지어진 거대한 성을 중심으로, 10층은 훌쩍 뛰어넘는 높이의 건물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나가 있었다.
[용들이 꽤나 고생했겠는데.]
바뀐 도시의 모습에 놀란 것은 옆에 있던 미미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체 하나하나가 수백인 분의 노동력을 가진 용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위업.
‘성만 없었으면, 한국이랑 별 차이도 없었겠어.’
회색 건물들 사이로 지나다니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이안은 전생의 도시들을 떠올렸다.
슈우우
그러는 동안에도, 비행함은 천천히 성내에 자리 잡은 비행장을 향해 내려앉았다.
“공작전하를 뵙습니다!”
착륙한 비행함에서 내린 이안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은사자 기사단의 단장 칼리번과 흑사자 사냥단의 주인 파비안.
“둘 다 오랜만이야.”
자신을 향해 한 쪽 무릎을 꿇은 두 사내를 바라보며 이안은 씨익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둘의 얼굴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있군.’
자신을 맞이하는 두 단장의 표정 어딘가에 드리운 어둠을 읽어낸 이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없던 사이, 도대체 공작령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성의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 이안.]
‘나도 느끼고 있어.’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미미르의 다음 말에,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성을 방문한 모양이군. 느껴본 적 없는 기운이다.]
‘그래?’
그렇다면, 저 둘의 어두운 표정은 성의 방문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틀림없을 터.
“전하.”
“누가 날 찾아온 모양이지?”
“네… 맞습니다.”
물론, 두 단장은 자신들이 말하기도 전에 알아챈 신검공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지만.
하지만, 이번엔 이안이 놀랄 차례였다.
“탈마공 디아블로 공작전하께서 전하를 뵙고 싶다고….”
“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이안의 두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
염소처럼 생긴 붉은 얼굴에 달린 붉은 수염과, 이마에 달린 두 개의 검은 뿔.
세상 사람 누가 보더라도 마족이라 할 법한 생김새의 사내는, 과거엔 실제로 마경의 군주 중 하나였다.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로군, 신검공.”
탈마공, 디아블로.
이제는 스스로 마왕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연합공국의 일곱 공작 중 하나가 된 자였지만, 키가 3미터를 넘는 거구의 눈에서 끓어오르는 마기는 분명 지독하리만큼 강력했다.
그의 옆에 자리한 이안의 친구, 파이톤이 어색한 표정으로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하지만 이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상대는 한때 마왕이었으나, 이제는 신들의 앞잡이가 된 자.
필요하다면 자신의 동족마저 버릴 수 있는 자다.
“그렇게 노려볼 필요는 없네. 나는 그저 다른 공작들과 신계의 말을 전하러 왔을 뿐이니.”
“천하의 탈마공이 단순히 전령 역할을 맡았다라. 믿기 힘든 이야깁니다만.”
“물론, 내 개인적인 욕심도 조금 있었지.”
이안의 말에 탈마공은 껄껄 웃으며 염소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먼저, 내 업무부터 먼저 시작하지.”
말을 마친 탈마공의 기세가 변했다.
그의 눈에서 끓어오르던 마기는 꺼지듯 사그라들었고, 남은 것은 텅 빈 눈동자 뿐.
‘뭐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던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신계의 만신들과 여섯 공작의 이름으로 신검공에게 전하니.”
험악한 염소머리에서 나왔다곤 믿기 힘들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그러나.
“신검공은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더 이상의 만행을 멈추라.”
탈마공의 말이 끝난 순간.
“…뭔 개소리지?”
이안의 표정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