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마경의 공기는 끈적하기 그지없다.
마경의 군주인 마왕들과 그 권속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마경 전체에 깊숙이 배어 있었다.
그 것은 공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쐐애애액-
한 대의 비행함이 보랏빛으로 끈적이는 공기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역시 마경의 공기가 썩 좋진 않네요, 도노반 경. 전하께선 어째서 홀로 이런 곳에….”
에반.
이제는 소년의 티를 어느 정도 벗은 그가, 비행초계함을 감싼 결계 바깥으로 보이는 짙은 마기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게 말일세. 가신들의 마음도 한 반쯤은 생각해 주시면 좋았을 것을….”
이안이 공작의 위에 오르기 전부터 호위기사로 활동해 온 노기사, 도노반은 말을 마치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 넓은 마경에서 전하를 찾아낼 생각을 하니, 막막하긴 하군 그래.”
“그래도, 찾아야만 합니다. 행정관의 말을 경께서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노기사의 한탄을 듣던 에반은 도노반을 격려했지만, 그 역시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연락이나 한 번 주실 일이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건지….’
마경으로 간다는 말 이후로 사라져버린 주군이 원망스러웠지만, 일단 주군의 행방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단은 주군께서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신 곳까지 가보세나. 그곳이라면 뭔가 단서가 남아 있겠지.”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행정관에게 더이상 시달리고 싶진 않거든요.”
도노반의 말에 장난스레 미소를 지은 에반은 갑판 너머의 보랏빛 세상을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쐐액-
“저건?”
정체 모를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비행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경에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올 만한 존재는 오직 둘.
마족, 혹은 마수.
“적이다.”
에반과 도노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총원 전투준비!”
왜애앵-
둘의 뒤에서 들려온 함장의 외침.
그와 동시에, 전투상황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우리도 준비해야겠군. 여차하면 싸워야 할 테니.”
“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두 기사의 손이 허리춤의 검을 향해 내려갔다.
두 사람의 검에 깃들어 있는 것은, 대 마족병기 페르소나.
어지간한 마족이나 마수쯤은 일격에 갈라버릴 수 있는 병기.
둘은 페르소나를 발동시킬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이 채 칼을 뽑기도 전.
고오오오-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마기가, 자그마한 비행함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에반과 도노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마기는….”
“…지독하군. 못해도 최상급은 되겠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기 앞에서, 두 기사는 진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릉!
“오라.”
“오라.”
그렇다 해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입실론.”
“이클립스.”
각자의 검을 뽑아 든 에반과 도노반이, 페르소나를 깨워내는 시동어를 외친 순간.
우우웅-
두 사람의 검에서, 고대의 전설이 다시금 눈을 떴다.
파앗!
각자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마력과 신성력이 만들어낸 것은, 한 자루의 거검.
그리고 사람 한둘쯤은 충분히 가릴 크기의 거대한 방패 하나.
“에반, 뒤로 물러나 있게!”
선두에 나선 것은, 거대한 방패를 쥔 도노반이었다.
그가 가진 페르소나는 철저히 방어에 중점을 둔 병기.
적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한 번의 공격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쿵 쿵
거대한 방패를 들어 올린 도노반이 움직일 때마다 고공에 떠 있는 비행함이 조금씩 기우뚱했다.
우웅-
도노반의 몸 속에 깃든 오러가, 손에 쥔 영웅의 방패를 향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갔다.
‘모조리 받아쳐 주마.’
방패 손잡이를 꾹 쥔 도노반이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필멸자들아.]
도노반과 에반, 비행함엔 다행스럽게도, 상대가 먼저 공격해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마경의 일곱 군주 중 하나, 바알.]
“마경의 군주라면….”
“마왕?”
허공에 멈춰선 상대의 소개에, 비행함에 탑승한 모두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여덟 날개와 두 개의 보라색 뿔을 지닌 사내는 상대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경은 마족의 영토다. 당장 그 조그마한 배를 돌리지 않는다면, 너희의 사지를 몽땅 찢어발겨 주마.]
고오오오-
바알의 경고와 함께, 어마어마한 마기가 그의 손아귀를 향해 몰려들었다.
“요동에 주의해라!”
“젠장, 뭐라도 붙잡고 있어!”
마기에 물들어 있던 대기가 날뛸 만큼 강력한 마기의 흐름에, 비행초계함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노반 경,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왕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색이 된 함장이 도노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슈타르의 공중함대를 상징하는 비행전열함, 골든라이온도 아닌 비행초계함 따위가 마왕을 상대할 수는 없다.
함장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럴 순 없소.”
하지만 도노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슈타르의 상태가 어떤지 몰라서 하는 말이오?”
“하지만….”
“잠깐, 잠깐만 시간을 주시오.”
난색을 표하는 함장을 뒤로하고, 도노반은 방패 너머로 보이는 마왕과 눈을 마주쳤다.
‘이토록 강력한 마기라니, 분명 결계 너머인데도….’
마왕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악의의 산물에 도노반은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이보게, 마왕.”
[뭐냐?]
“미안하지만, 그냥 우리를 보내줄 수는 없겠나?”
[하!]
당연히, 노기사의 말을 들은 바알은 코웃음쳤다.
[지금 네놈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메피스토님의 엄명이 아니었다면, 너희는 이미 죽지도 살지도 못했을 터.]
말을 마친 마왕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보통 사람, 아니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자라도 그 눈빛에 저항하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터.
“크윽….”
그것은 도노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앙다문 그의 입술에서 선혈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신검공 이안 폰 아슈타르 공작전하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약속하지.”
페르소나를 가동하느라 얼마 남지 않은 오러가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도노반은 마왕의 눈빛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검공이라고? 마왕토벌자 이안 말이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래.”
마주친 마왕의 눈에서 당황한 기색을 읽은 도노반은, 가물가물한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젠장.]
그 말을 들은 마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음?”
도노반과 에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따라와라. 너희의 질문에 답을 줄 분에게 안내할 터이니.]
그 말과 함께 마경의 군주, 바알은 등을 돌려 천천히 멀어져 갔다.
“저거, 믿어도 되는 걸까요?”
난데없는 상대의 태도 변화에 에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건 아니건, 따라가 볼 가치는 있어 보이네. 그렇지 않나, 함장?”
“예. 예….”
함장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노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도노반과 에반을 태운 비행초계함은 바알의 등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왕토벌자를 찾는다고?]
그들은 만날 수 있었다.
[부탁이니, 놈을 데려와다오. 제발.]
마경의 정점. 마왕중의 마왕.
메피스토를.
***
“미미르.”
시뮬레이터 안에 들어온 이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전우를 불러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미미르?”
아무리 불러도, 그의 전우가 이 새로운 공간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안에게 제법 큰 문제였다.
“곤란한데….”
당연하지만, 이안의 몸은 하나뿐이다.
그가 아무리 강력한 지구의 병기들을 현실로 구현해낼 수 있다 한들, 직접 조작할 수 있는 병기는 한 대가 고작이라는 뜻.
그 단점을 극복하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미미르였다.
그림자 신의 힘을 받아들인 미미르가 만들어내는 분신을 이용하면, 이안이 부릴 수 있는 병기의 숫자는 무궁무진했으니까.
하지만.
‘미미르를 불러낼 수 없다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병기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안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파아앗!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쐐애액-
F/A-18 슈퍼호넷이 가상공간의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힘이 제한된 상태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정찰이었으니까.
그리고.
“미친.”
상대의 전력을 확인한 이안의 입에선,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초원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끼긱 끼기기긱
정확히는, 검은 페인트로 도색된 기계들이었다.
1차대전에서나 쓸 법한 전차부터 복합장갑으로 도배된 최신형 전차까지, 구형 복엽기부터 초음속 전투기까지.
S-1의 피조물들은 시대도, 종류도 각양각색인 오합지졸이었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기엔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무슨 벌레도 아니고….”
거대한 강철의 군세 앞에서, 이안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건가?’
분명, 자신을 짓누르기엔 이만한 방법이 없었으리라.
아무리 강력한 개인이라 하더라도, 숫자의 힘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므로.
‘방법이 필요해.’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의 군세가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이안은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프레이야도, 다른 기계정령들도 응답이 없어. 마도위성과의 연결도 끊어진 것 같고…음?’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던 이안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마력이…왜 이렇게 많지?’
물론, 이안이 가진 마력은 평범한 오러 마스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마력은 그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우우웅-
이전의 마력량이 달이라면, 지금은 태양이라고 해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차이.
‘설마….’
이안이 생각하기에, 이게 가능한 경우는 단 하나뿐.
‘마도위성에 저장된 마력을, 전부 내 몸속에 있는 마력으로 인식한 건가?’
가상공간이 자신의 몸에 들어 있는 마력을 어찌 측정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생각할만한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용해야겠지.
우우웅-
무수한 기계의 군세를 바라보며,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