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169화 (170/224)

#171화

[BSP 전투시뮬레이터]

“흠.”

S-1이 이야기한 ‘놀이’의 규칙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규칙이랄 것도 없었다.

서로가 가진 모든 지식과 힘이 구현되는 공간 안에서, 가상의 병사들을 부려 상대를 이기는 것.

게임에서 나오는 유닛들을 자신의 상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안이 지구에서 가끔 즐겨본 전략게임과 비슷했다.

그리고.

“가상현실이라.”

실재하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의 싸움.

‘이미 판타지 세상은 아닌 것 같다만….’

만화나 소설 속에서 나오던 것을 실제로 접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안,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의 옆에서, 미미르는 이안이 S-1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끈질기게 반대했다.

[저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지만, 설사 맞다 쳐도 문제다. 저 기계정령이 만들어 낸 임의의 공간에 들어가서 싸운다니, 신들의 성역에 들어가서 싸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신들은 중간계에 자신들의 힘을 행사하기 어렵지만, 성역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의 힘으로 구현해낸 공간인 성역 안에서는, 말 그대로 신의 힘을 구현해낼 수 있으니까.

가상의 공간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미미르였지만, 그가 판단하기로는 그랬다.

“이거, 내 패널티가 너무 큰 거 아닌가?”

거기에 대해선 이안의 생각 역시 동일했다.

“나보고 네 앞마당에서 싸워달라니, 내가 뭔 짓을 당할 줄 알고?”

상대가 만들어 낸 가상공간에서 승부를 가린다는 건, 시작부터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S-1은 이안의 말에 반박했다.

[제작자님께서 만들어 낸 시뮬레이터는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제작자님께서 나에게 남긴 유산의 일부다. 제작자님의 유산을 가동하는 건 몰라도, 내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걸 나보고 어떻게 믿으라고?”

[제작자님의 유산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일이 가능했다면, 나 역시 이렇게 귀찮은 방법으로 그대를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안이 제작자의 유산을 두 개나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상대는 한 마디 정보만으로 핵미사일 제조를 시도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제작자의 유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완성시키지 못했을 리 없다.

“좋아, 어떻게 하면 되지?”

[그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계약을 진행한 다음, 나의 본체가 있는 곳으로 오면 된다. 자세한 것은 계약 이후에 말해 주지.]

“좋아.”

[이안!]

제 주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미르는 당황해 소리쳤지만, 이안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 계약부터 바로 진행하자고.”

망가진 고철덩어리를 향해, 이안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

폐기장에서 S-1이 위치한 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두 시간 정도였다.

쐐애액-

[이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판단은 좋지 않았다.]

F-22.

발굴자가 복원해 낸 지구 최강의 전투기에 탄 미미르가 조종간을 잡은 이안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적의 소굴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멍청한 짓이 아니더냐.]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토록 겁 없이 행동하는 것인지.

그는 자신의 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피식 웃었다.

“내가,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온 것처럼 보여?”

[그럼, 무슨 준비라도 해두었다는 말이냐?]

“그럼.”

[허, 그런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안의 말에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저거군.”

이안은 캐노피 너머로 비치는 뾰족한 무언가를 보곤 눈을 반짝였다.

탑이었다.

높이만 수백 미터에 이를 듯한 거대한 강철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탑의 주변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도넛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

도넛 위로 마치 바늘방석의 바늘처럼 뾰족하게 올라온 대공포와 미사일들을 눈으로 마주한 이안의 입에서 휘파람이 나왔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그렇지만, 장난이 아닌데.’

만약 정면돌파를 시도했더라면 꽤나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정도.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진 이안은, 그대로 천천히 기체의 고도를 낮추고는 활주로를 찾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활주로로 보이는 평평한 대지를 발견한 그는 속도를 줄이곤 착륙을 시도했다.

끼기긱-

이안의 착륙은 조금 거칠긴 했지만, 활주로는 거친 착륙을 받아내기에 충분히 넓고 튼튼했다.

평원이라 해도 믿을 만큼 넓은 활주로에 기체를 멈춰 세운 이안은, 캐노피를 열고는 조종석에서 곧장 뛰어내렸다.

“후읍, 익숙한 공긴데?”

땅에 내려서자마자 숨을 깊게 들이켠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기가 뭐 이리 텁텁해?”

빙의한 이후로 한동안 잊고있던, 미세먼지와 매연에 오염된 더러운 공기.

지구를 연상케 하는 때 묻은 공기에 이안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무렵.

부르릉-

그의 귓가에 거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곧, 이안의 고개가 움직였다. 엔진소리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크롬색으로 번쩍이는 지프 한 대.

어서 올라타라고 재촉하는 듯, 지프의 동글동글한 헤드라이트가 이안을 향해 깜빡였다.

“타라는 건가?”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전조등이 좀 눈부신 것을 빼곤 딱히 위협을 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심해라, 이안. 이곳은 적진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고.”

미미르의 말을 대충 흘려넘긴 이안은 크롬색 지프를 향해 다가갔다.

좌석까지도 크롬색으로 칠해진 쇳덩이인 것이 탑승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오러마스터인 이안에겐 크게 불편할 정돈 아니었다.

[으, 차갑군. 이래서 육체가 있으면 불편하다니까.]

“불평할 시간 있으면 이리 올라오던가.”

뒤늦게 강철의자에 올라탄 미미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불평했을 뿐.

부르릉-

크롬색 지프는 이안과 미미르를 태우자마자 앞으로 출발했다.

이안은 지프가 향하는 곳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저 탑으로 가는 건가.’

그리고, 아마도 저 탑이 자신을 불러들인 S-1의 본체이리라.

이안은 팔짱을 낀 채, 점차 거대해지는 탑과 그 주변을 둘러봤다.

지이잉-

얼마 지나지 않아, 지프는 탑의 내부로 통하는 지하통로에 들어섰다.

소형차 두 대가 간신히 들어갈 크기의 긴 통로 끝으로 보이는 것은, 통짜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문.

끼익-

곧, 크롬색 지프가 문 앞에 멈춰섰다.

“기왕이면 안까지 안내해 줄 것이지.”

이안은 미미르를 안은 채 툴툴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닫혀있던 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환영한다. 관리자여.]

그와 함께 이안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익숙한 목소리.

“곧 싸워야 할 텐데, 환영은 무슨.”

S-1의 환영인사를 흘려들은 이안은 문 너머로 보이는 불빛을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안, 점점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 가고있다. 자칫하면, 탈출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안이 탑 깊숙한 곳으로 들어 갈수록, 미미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물론, 이안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까, 꿈 깨.”

애오옹….

불안해 안절부절못하는 고양이를 꼭 안아 든 채, 이안은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막다른 공간에 도착한 이안은 알 수 있었다.

‘틀림없어.’

자신이, 제작자가 남긴 또다른 유산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위이잉-

그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의자였다.

바닥을 뱀처럼 기어 다니는 황금케이블들 사이에 자리한 의자의 등받이 위엔, 머리에 착용하도록 만들어진 금색 헬멧 하나가 달려 있었다.

[이것이 내가 말한 제작자님의 유산이다.]

“이 의자가?”

S-1의 설명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의자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케이블들을 제외하고 본다면, 그저 좀 비싸 보이는 의자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S-1의 설명은 끝나지 않았다.

[저 의자는 단순한 접속장치일 뿐이다. 실제는 저 의자 아래의 거대한 저장장치이지.]

“저장장치라고?”

[제작자님께서 창안해내신 모든 개념과 지식을 저장하고 있는 장치이다.]

“흠, 그래?”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안은 조금 실망했다.

‘지식이라면 내게도 충분한데.’

이안의 머릿속엔,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현대병기에 대한 정보가 입력되어 있었으니까.

다른 무언가가 함께 있다면 모를까, 고작 정보만으론 이안의 구미를 당기게 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제작자님의 인격 일부도 담겨있지.]

“그래?”

S-1의 다음 설명을 들은 이안은 눈을 빛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저 유산의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면, 제작자와 대화라도 나눌 수 있단 거야?”

[그렇다. 나조차도 얻지 못한 통제권을 네가 얻을 리 없겠지만.]

이안의 말을 들은 S-1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자신 또한 수백 년 동안 유산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씨름했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보잘것없었으니까.

그러나 S-1이 채 비웃음을 멎기도 전에.

“뭐해? 어서 시작하자고.”

이안은 의자에 앉아 황금색의 헬멧을 뒤집어썼다.

그 순간.

[유저 접속 확인, BSP 전투시뮬레이터를 가동합니다.]

이안의 눈앞에 한 줄의 황금색 메시지가 떠올랐고.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이안의 시야가 변했다.

***

이안이 새로운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긴…?”

주변을 두리번거린 이안은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은 강철 첨탑 내부에 존재하는 의자에 앉아 헬멧을 쓴 상태였건만.

“내가 언제 일어나있었지?”

언제나 함께 다니던 미미르도 없이, 그의 몸은 어느새 의자가 아니라 거대한 초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으니까.

“허 참, 신기하네.”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선선한 바람을 손으로 느끼며, 이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이 세계, 아니 시뮬레이터의 작동법은 숙지한 상태.

‘상상하고, 실행한다.’

그것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이안이 가장 많이 해온 일이었다.

우웅

“이건 뭐 별다를 게 없고….”

손에 쥐어진 익숙한 형태의 권총, 글록 18C의 묵직한 감촉에 이안은 씨익 미소 지었다.

곧, 이안이 새로운 세계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때 즈음.

지잉-

그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모의전을 실시합니다.]

[대전상대: 기계정령 S-1]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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