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제작자가 E-16을 만들어낸 이유는 분명했다.
그가 만들어낸 거대한 병기들이 들어가지 못할 만큼 좁은 곳에서의 전투를 위한 용도.
그를 위해 극단적으로 축소된 이족보행병기 형태의 몸체에는, 내부에 침입한 적을 분쇄하기 위한 각종 병기가 장착되어있었다.
하지만, 그가 전신에 장착하고 있는 모든 병기보다도 이안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타타타탓!
말 그대로, 미칠듯한 기동성.
날아드는 수십 발의 미사일 탄막 사이를 비집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운동성은, 강력한 화기들을 부릴 수 있는 이안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안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가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날아드는 공격.
이안의 정면에 놓인 캐노피 위에 떠오른 조준점이 적과 일치한 순간.
딸깍
이안은 조정간의 방아쇠를 당겼다.
부아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오직 A-10 썬더볼트II 공격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병기, GAU-8 30밀리 기관포의 일곱 총열이 불을 뿜었다.
아무리 저 로봇이 빠르다곤 하지만, 음속의 세 배 속도로 쏘아진 열화우라늄 탄환을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티티티팅!
“미친.”
상대의 상태를 확인한 이안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분명, 이안이 쏘아낸 30미리 탄환들은 적에게 정확히 명중했지만.
[전혀 손상이 없어 보이는군. 이 병기로는 적을 상대하는 데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무슨 장갑이 저렇게 단단해? 저런 기동성을 가지고 방어력까지 챙기면, 완전히 사기잖아.”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혀를 내둘렀다.
분명 A-10의 기관포가 최신예 전차들에겐 잘 먹히지 않는 물건이긴 했다.
하지만, 적의 얇은 다리조차도 관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안에겐 다소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마력에 기반한 방어장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마력이라면, 방어막이라도 치고 있다는 건가?”
[녀석의 전신에서 균일한 마력반응이 일어나고 있어. 저 녀석의 말도 안 되는 움직임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허.”
미미르의 추측을 듣고 난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는 건.
“몸뚱이가 강철인 오러마스터가 있다? 같은 뭐, 그런 건가?”
같은 마력이나 오러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신체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니, 신체의 차이가 곧 마력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의 차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정면에서라면, 나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는데.’
저런 힘을 언제까지 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안과 충분히 대적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이안, 놈이 공격해온다! 미사일 2기 감지!]
“젠장.”
미미르의 경고를 듣자마자 이안은 보지도 않고 공격기의 기수를 틀었다.
하지만, 이안은 알고 있었다.
‘피하는 건 무린데.’
그가 몰고 있는 A-10의 최고속도는 음속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음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상대의 대공미사일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선택을 해야겠다.
끼익!
이안은 주저 없이 비상사출장치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콰앙!
동시에, 이안을 대기로부터 보호하고 있던 캐노피가 폭발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갔다.
그와 거의 같은 순간에 하늘로 솟아오른 좌석에서 뜨거운 로켓의 화염이 분사되었다.
물론, 이것 만으론 부족했다.
“꽉 잡아!”
찌이익
자신의 몸을 얽어맨 사출좌석의 안전벨트를 끊어버린 이안은, 미미르와 함께 불길을 뿜어내고 있던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무, 무슨 짓이냐!]
당연히, 이안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미미르는 당황했지만.
콰과과광-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일 두 발이 각각 이안이 탑승했던 전투기와 좌석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미미르는 이안이 뛰어내린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우웅
하지만 이안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만한 시간 따위는 없었다.
파괴된 공격기를 다시 마력으로 되돌린 그의 몸뚱이를 푸른 빛이 다시금 감싸 안았다.
파아앗
곧이어 나타난 것은 뚱뚱해 보이는 한 기의 전투기, F/A-18 슈퍼호넷.
삐비비빅-
그가 새로운 전투기를 구현해내기 무섭게, 상대의 미사일 두 기가 전투기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당할 줄 알고?”
이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쐐애애액-
이안을 호위하기 위해 바다에서 수십 대의 전투기들.
[이 C-218, 관리자님을 돕기 위해 여기 등장했습니다!]
이안이 탄 전투기와 똑같이 생긴 슈퍼호넷들이 편대를 지은 채 날아오고 있었다.
“나이스 타이밍.”
자신의 앞에 보이는 수십의 전투기들을 발견한 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버튼을 눌렀다.
투투투투
그와 동시에, 슈퍼호넷의 양 날개에서 미사일을 기만하기 위한 플레어가 쏟아져나왔다.
물론, 미사일을 피한다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머지는 저 녀석들이 해 주겠지.’
그에겐, 수십 마리의 말벌들이 있었다.
부아아앙-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슈퍼호넷들이 쏘아낸 것은 20밀리 발칸.
티티티팅!
물론, GAU-8의 30밀리 열화우라늄탄만도 못한 위력의 기관포탄이 전신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배리어를 두른 이족보행병기의 장갑을 뚫을 리 없었다.
콰과광!
오히려, E-16의 반격을 피하지 못하고 몇몇 전투기들이 격추되기까지.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E-16을 상대할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저 멀리서, 빛을 머금은 거대한 탄환이 E-16을 향해 날아들기 전까지는.
콰앙!
빛의 화살 모양을 한 탄환이, 그대로 E-16의 다리를 강타했다.
음속보다 수 배는 빠른 공격을 피하는 것은, 수많은 미사일을 피해냈던 E-16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
씨이잉-
뒤늦게, 탄환이 대기를 찢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끼기기긱
오른쪽 다리를 피격당한 순간, E-16의 기동성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버렸으니까.
[이안, 명중했다. 녀석이 한쪽 무릎을 꿇었어.]
“좋아.”
미미르의 기쁜 목소리를 들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일은, 엄밀히 말하면 제국의 기가스를 상대할 때와 동일했다.
M1A2에이브람스가 자랑하는 120밀리 날개안정철갑탄을, 적의 다리를 향해 쏘아내는 것.
우우웅
단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한 번 더.’
심장에서 마력을 끌어낸 이안이 의지를 일으키자, 마력은 그의 손끝에서 오러가 되었다.
손끝의 오러가 향한 곳은, 약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120밀리 날개안정철갑탄.
파아앗
열화우라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금속화살에 오러가 덧씌워진 순간.
딸깍
이안은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
폭음과 함께, 오러를 머금은 금속 화살이 음속의 세 배 속도로 적을 향해 쇄도했다.
화살의 목표는, 아직까지 굽히지 않은 상대의 왼쪽 무릎.
끼긱 끼기긱
그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위협을 감지한 E-16은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콰앙!
멀쩡한 상태에서도 피하지 못했던 초음속의 화살을, 한쪽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끼긱, 끼기긱….
쿠웅!
두 다리를 잃은 병기는, 금속의 대지 아래 그대로 몸을 뉘었다.
“이번엔 만만찮았어.”
그제야 이안은 긴장을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강민혁이 이안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수많은 적들과 싸워왔지만, 이토록 힘들었던 상대는 거의 없었다.
“차라리 신들이랑 싸우는 게 더 쉽겠는데.”
[그건 아닐 거다. 네가 상대한 신들의 힘이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
“뭐, 그건 나중 일이고.”
미미르가 이안의 말에 고개를 저었지만, 이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럼 어디….”
저 녀석을 만나러 가볼까.
쓰러진 이족보행병기, E-16이 버둥대는 모습을 쌍안경으로 바라보며, 이안은 미소를 지었다.
***
[놀라운 성과를 거두셨군요, 관리자님. 정말로, 놀랄 일입니다.]
“이게 그렇게까지 놀라울 일이야?”
항공모함으로 돌아온 이안은, A의 극찬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E-16은 단일개체간 전투력으로는 여섯 중 가장 강한 피조물입니다.]
그것도, 제작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 낸 존재.
[C-218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게 관리자님께서 보여주신 위업을 깎아내릴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저 C-218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놈의 다리를 단번에 부숴버리는 순간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제 아이들 셋이 당하긴 했지만, E-16을 상대한 대가치고는 싼 편이죠.]
“그만.”
두 기계정령의 아부를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이안은 손을 내젓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항공모함 내의 격납고로 향했다.
“흠.”
그곳에서, 이안은 만날 수 있었다.
끼긱 끼기긱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대한 로봇을.
[무장은 모두 파괴한 상태이니, 가까이 가셔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이 C-218이 막아 보이겠습니다.]
[시끄러워 죽겠네.]
애오옹
이안은 두 기계정령과 한 고양이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부서진 로봇을 향해 다가갔다.
“네가, E-16인가?”
[그렇다. 그대는 관리자인가?]
자신의 처지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로봇의 답은 침착했다.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는데.’
상대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이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맞아. 너희를 만든 제작자의 뒤를 이을 사람이지.”
[제작자님의 뒤를 잇는 것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유기체 따위가 아니다. 무한한 생명을 가진 우리들만이, 제작자님의 뒤를 이을 자격을 가지고 있다.]
“뭐, 그건 나중에 더 이야기해 보고.”
E-16의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내가 널 여기까지 불러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S-1에게 도달하는 방법을 찾는 것.]
“역시, 생각대로 똑똑한데?”
시원시원한 대답에 이안의 고개가 절로 주억거렸다.
하지만, 이안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난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다. 설사 내 논리회로를 부순다고 할지라도.]
그 말을 끝으로, E-16은 입을 다물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안이 손으로 녀석의 외부장갑을 툭툭 쳐봤지만, 망가진 로봇은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단 말이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예 무시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이안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 그렇다면….”
입을 열게 해야겠지.
죽은 듯 멈춰있는 로봇을 바라보던 이안의 눈이 번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