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육상전함이란 개념이 지구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강철의 기사라 할 수 있는 지상군의 왕자, 전차의 초기 컨셉이 바로 육상전함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초기의 전차들은 마치 바다의 군함처럼 여러 개의 포와 기관포를 몸체 여기저기에 단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차의 과도기라 할 수 있었던 그 시대 사람들조차도.
“허.”
진정, 땅 위에 전함이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을 터.
“도대체, 저 거대한 산을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거야?”
하지만 이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움직이는 전함 그 자체였다.
스크류와 방향타 대신 무한궤도를 달고 지나가는 모든 대지를 부수며 다가오는 거대한 강철의 산.
굳이 저 강철괴물 위에 배치된 거대한 포와 병기들의 이름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육상전함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거대한 위협이었다.
[아니, 저 자식은 왜 여기서 깽판이야? 미쳤나?]
난데없이 자신만의 보금자리가 공격받자, C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A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가 관리자님의 편에 섰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겠지. 이런 녀석을 믿고 무슨 일을 하겠다고….]
[뭐, 뭐 인마? 나도 너같은 녀석이랑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거든?]
그것을 시작으로, A와 C는 또다시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아아악! 포격 감지! 충격에 대비하라!]
요란스러운 C의 함 내 방송과 함께.
쿠구구궁-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진동이 시설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동이 끝나기 무섭게, 이안은 고개를 들어 시설의 상태를 확인했다.
곧, 바깥을 내다본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붕이….’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끈한 돔의 모양을 하고 있던 시설의 강철 지붕이 미세하지만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이 시설이 해안절벽을 깎아 만든 동굴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적이 쏘아낸 포탄의 위력은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
[적탄 피격! 시설 가동률 72.19%! 어, 어떻게 하죠 관리자님?]
[그걸 왜 관리자님께 묻는 거지? 네 시설이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거 아냐?]
[이게 진짜….]
애오옹
[정말이지, 골치 아픈 놈들이군.]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미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사이 이안은 몸을 일으킨 다음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서 오래 버틸 순 없어.’
상대는 지하 깊은 곳에 건설된 정비시설에 타격을 줄 만큼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다.
이 거대한 벙커가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상, 더 이상 머무르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봐, A.”
이안은 홀로그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관리자님.]
“지원병력을 보낼 수는 있나?”
[그렇지 않아도 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들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제 본체가 있는 곳과 이곳은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얼마나?”
[아무리 빨라도 두 시간은 걸립니다.]
“그럼, 없는 거네.”
적의 화력으로 미루어 보건대, 두 시간은커녕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어두컴컴한 지하동굴에서 생매장당할 게 아니라면, 당장 움직여야 했다.
“C, 당장 배를 바깥으로 빼.”
[바, 바깥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C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공모함이 전함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전함의 사거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무덤이나 다름없는 이 지하시설에서 빠져나온 다음 거리를 벌린다면, 저 육상전함을 박살 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리라.
그러나.
[그, 관리자님. 지금 당장은 곤란합니다!]
관리자의 생각을 들은 C는 난색을 표했다.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지?”
[저 C-218, 분명 제가 가진 전투기들은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만, 본체인 이 함선이 시설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들어왔던 입구로 후진해서 나가야 하므로….]
“젠장.”
C의 변명을 모두 듣고 난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모든 계획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부족한 시간.
어떻게든 시간을 벌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얻어맞다가 끝나게 될 게 너무나 뻔했다.
“내가 시간을 벌어보지.”
방법이 필요했다.
[관리자님께서 직접 나가신단 말입니까?]
이안이 미끼를 자처하자, A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D-7은 관리자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이안이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하지만, 상대는 산만한 덩치를 지닌 거대병기이다.
수많은 지대공병기와 지대지병기,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장갑으로 도배되어 있는 강철의 산.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놈의 신경조차 긁을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러면.”
그럼에도.
“여기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생매장당하잔 얘길 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A는 이안의 말에 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죽을 거라면, 나가서 가능성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
[그건… 맞습니다.]
“좋아.”
말 몇 마디로 A를 침묵시킨 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스가르드.’
그와 연결된 제작자의 또다른 유산, 마도위성과 연결하기 위해서.
위이잉-
이안이 마도위성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아스가르드가 보내온 위성화면이 눈을 감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위성화면에 나타난 것은, 아스텔리아의 옆에 위치한 마키나 대륙.
대륙의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한 이안은, 자신이 위치해있는 곳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확대.’
이안의 의지가 마도위성 아스가르드에 전해진 순간, 그의 앞에 떠오른 대륙의 한구석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몇 번의 확대를 거친 끝에.
‘저 놈이군.’
이안은 조금 전 C가 띄워 올린 영상과 똑같이 생긴, 거대한 지상병기를 확인하곤 눈을 빛냈다.
‘주포는 2연장 5문. 못해도 15인치는 넘어 보이는데.’
그것도 정말 최소한으로 잡은 수치였다.
지하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C의 정비시설에 타격을 줄 정도의 위력이라면, 못해도 18인치 구경은 되어야 하리라.
거기에, 주포 주변으로 배치된 수 많은 부포들과 대공포, 미사일들은 이안의 눈에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해 볼만 하겠어.’
상대의 약점을 찾는 이안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콰과과광-
화염과 함께 거대한 포성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수천의 천둥과 번개가 일시에 터지는 것 같은 소음과 빛이 황폐한 대지를 환하게 밝혔다.
그 중심에 자리잡은 것은, 수 많은 병기와 장갑을 몸에 두른 육상전함.
끼기기기긱-
열 문의 21인치 함포가 일제사격 하면서 일어나는 거대한 반동은, 수만 톤의 질량을 가진 육상전함을 일순 기우뚱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만큼 위력은 확실했다.
콰과과과광-
[전탄 명중. C-218의 시설에 상당한 피해를 주었을 것으로 예상됨.]
말 그대로 초토화된 탄착지점을 확인한 육상전함, D-7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결과를 보고했다.
[30분 내로 시설 진입 가능. 이후 E-16 투입하겠음.]
기이이이잉-
분석을 마친 육상전함의 주포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탑 내부의 거대한 자동장전장치가, 사람보다 거대한 포탄과 장약을 포신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사격준비 완료.]
모든 준비를 마친 D-7은, 다시금 주포를 C-218의 시설을 향해 발사하려 했다.
삐비빅-
그의 레이더에 무언가가 잡히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비행체 128기 접근. 미사일로 추정.]
백 발이 넘는 미사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D-7은 예의 기계적인 목소리로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동경로 확인. 본함을 목표로 이동중. 요격하겠음.]
분석을 마친 육상전함의 기계정령이 결정을 내린 순간.
쐐애액-
전함의 동체 이곳저곳에서 수백의 연기가 뿜어져 나갔다.
미사일이나 항공기와 같은 적대적인 비행체를 요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공미사일들.
그와 동시에.
부아아아앙-
수백, 수천 기의 대공포가 쏘아낸 탄환들로 만들어진 탄막이 미사일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콰앙 콰아앙-
어지간한 대도시급의 방공망 앞에선 백 발이 넘는 미사일도 속수무책.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미사일과 대공포탄 앞에서, 정체불명의 미사일 대부분은 폭발하거나 지상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아아아앙-
수백 발의 대공미사일도, 수천 문의 대공포도.
쐐애애액-
모든 미사일을 전부 요격할 수는 없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한 발의 미사일이 향한 곳은, 육상전함의 거대한 21인치 주포 중 하나.
씨이잉-
마치 빨려 들어가듯, 길쭉한 모양의 순항미사일은 아슬아슬하게 함포의 포구 안으로 돌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필이면, 발사준비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포탄이 잠들어 있는 곳을 향해.
쿵
포신 내로 진입한 미사일이 장전된 포탄과 맞부딪친 순간.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육상전함을 휩쓸었다.
***
[명중이다, 이안.]
“말 안 해도 보고 있어.”
미미르의 보고에, 쌍안경으로 육상전함을 관찰하던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한 곳은, 시설 바깥의 해안에 배치해 둔 알레이버크급 구축함 중 한 대의 갑판.
콰아앙-
“운이 좋았어.”
육상전함 위로 피어오르는 화염을 지켜보며, 이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 발이 넘는 순항미사일을 일시에 쏘아낸다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을지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이안.]
“어떻게 하긴.”
미미르의 물음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계속 퍼부어야지.”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준비는 끝났지?”
[물론.]
“그럼, 계속 쏟아부어보자고. 쏘고 쏘다보면 언젠간 박살나겠지.”
말을 마친 이안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불타고 있는 육상전함을 가리켰다.
[좋아. 그럼 제 2탄을 발사하겠다.]
그리고, 미미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쐐애애애액-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에 설치되어 있는 MK.41 수직발사기에서, 다시금 수백 발의 미사일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BGM-109.
자신의 머리 위를 가득 메운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바라보며, 이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