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물론, 이안이 설계도를 손으로 직접 그려내야 할 필요는 없었다.
T-316의 입력장치 중에는, 지성체의 기억을 그대로 전송할 수 있는 장치도 존재했으니까.
우웅-
머리에 압력밥솥처럼 생긴 헬멧을 쓴 이안이 지그시 눈을 감자, 헬멧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안이 선택한 병기의 설계도들이 헬멧에 연결된 케이블을 타고 전송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입력을 완료했습니다. 이제 헬멧을 벗으셔도 됩니다.]
“휴.”
모든 작업이 끝났다는 T의 말과 거의 동시에, 이안은 답답한 헬멧을 벗어 던졌다.
“으, 머리야.”
헬멧을 대충 바닥에 내팽개친 이안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럭댔다.
뇌가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의 잔향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과도한 정보전송에 따른 일시적인 증상입니다. 약 30분의 휴식을 권장합니다.]
T의 대답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낡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서 멀미 따위의 증상을 겪을 일은 없었지만, 지금의 이안이 겪고 있는 어지러움과 구역감은 멀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하지만.
“이거, 완전 오버테크놀러지인데? 이런 게 될 줄이야.”
터질 것 같은 머리통을 부여잡으면서도, 이안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지식전송 장치가 없었더라면, 수백 장의 설계도를 이안의 손으로 일일이 그렸어야 했을 테니까.
거기에 쏟아야 하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로 인해 낭비되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뭐, 그 문제는 해결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T에게 입력한 설계도를 가지고,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것.
“어때, 할 수 있겠어? 많이는 필요 없어. 선봉대원들이 무장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두통과 어지러움이 가라앉자 이안은 소파에서 일어나 T에게 물었다.
그러나, T의 대답은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어떤 품목이냐에 따라 다릅니다만, 시제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품목당 약 하루가 필요합니다. 양산을 위한 생산라인의 최적화 작업까지 고려하면, 못해도 한 달은 필요합니다.]
“한 달? 너무 긴데.”
T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C-218을 나포한 걸 알고 있을 테니, 놈들은 방비를 강화할 거야.’
이미, 이안은 공장설비의 복구를 위해 2주란 시간을 기다렸다.
이것만으로도 적들이 방어 준비를 갖추기엔 충분한 시간인데, 여기서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공격은커녕, 방어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지난번엔 손쉽게 적의 공격을 막아냈었지만, 그렇다 해서 다음 공격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는 노릇.
공격을 위해서건, 방어를 위해서건. 준비를 위해선 공장을 하루라도 빨리 돌려야 했다.
[다만.]
하지만 다행히도, T에게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품목을 정해 주신다면, 일주일 이내에 양산체제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T의 말에 이안은 반색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도 그리 짧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 달에 비하면 무려 사분지 일이나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한 가지 품목만 가능하다는 제한사항이 있긴 했지만, 당장 움직일 전력이 필요했던 이안에겐 감지덕지였다.
“좋아, 그러면….”
이윽고, 품목을 정한 이안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녀석으로 해 줘.”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모든 병력이 기계화된, 아니 기계 그 자체인 군단.
수 많은 기계들을 선봉대가 효율적으로 사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떤 녀석에게든 범용적으로 사용이 가능하고, 수많은 적들을 상대할 수 있는 지속력을 가진 병기.’
이안의 생각에,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생산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안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떠 있는 설계도들 중 하나를 가리키자, T는 공장의 설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공장에 배치된 수많은 기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실내는 순식간에 날카로운 소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좋아.’
그 시끄러운 공장의 한 가운데에서 이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무렵.
[이안!]
애오옹!
이안의 옆에서 움직이는 기계들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미미르가, 갑자기 이안을 향해 울어대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미미르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풀어져 있던 이안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
곧, 미미르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적의 공격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젠장.”
결국, 올 것이 왔다.
우웅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안의 페르소나가, 찬란한 푸른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본부가 위치한 섬, 폐기장의 해안.
지난 전투로 인해 초토화되었던 해안은 이미 복구가 끝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새롭게 지어진 벙커들을 지키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옹! 애오옹!
양손에는 여러 종류의 병기를 쥔 채 뛰어다니는 반투명한 고양이들.
이안의 지시로, 수호대의 임무를 떠맡게 된 미미르의 분신들이었다.
그리고.
왜애애앵-
그들의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척!
섬 전체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그와 동시에 뛰쳐나간 고양이들이 벙커의 총안구 밖으로 겨눈 것은, 검게 도색된 K-6 중기관총.
미미르의 통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사격을 준비하던 고양이들이 조준하고 있는 목표는,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숫자의 조그마한 함선들.
제대로 된 무장은커녕, 중기관총의 총탄조차 제대로 막아낼 수 없을 것처럼 연약해 보였지만.
[발사.]
미미르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애오옹!
미미르의 명령과 동시에, 중기관총을 쥔 고양이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12.7밀리 탄환의 비가 적을 향해 쇄도했다.
조그마한 조각배 수준의 적이라면, 12.7밀리 철갑탄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격침당할 것이 분명했다.
콰아앙!
예상대로, 셀 수 없이 많은 총탄의 비 앞에서 고속정들이 하나둘 침몰하기 시작했다.
강철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경장갑차량 정도는 단숨에 관통해버릴 수 있는 중기관총.
순식간에, 고속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통통배들은 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 두 쪽으로 갈라진 배의 잔해가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고양이들의 눈을 통해 전황을 살핀 미미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곧 이안이 도착하긴 하겠지만, 그 전에 저 배들이 육탄공격이라도 시도한다면.
‘꽤 피해가 크겠지.’
사람은 죽지 않겠지만, 무너진 벙커들을 보수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리라.
투타타타타-
하지만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양이들을 시켜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
제법 많은 수의 함선들이 중기관총의 총탄세례를 받고 침몰했지만, 수 많은 고속정들의 돌진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뚫린다.
해안 방어선이 돌파당할 것을 직감한 미미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지만.
“무슨 걱정이야? 이미 다 왔는데.”
미미르를 해안까지 데리고 온 장본인, 이안은 그렇지 않았다.
‘상대의 숫자가 많다면.’
그에 맞는 무기를 써야겠지.
우우웅
이안이 타고온 모터바이크가 마력으로 되돌아가기 무섭게 재조합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안의 앞에 새로이 구현된 병기는 K4 유탄기관총.
하나하나가 수류탄 이상의 화력을 지닌 유탄을 순식간에 퍼부어대는 이 녀석이라면, 무수히 많은 적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안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그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백기?”
해안을 향해 달려오는 함선들 모두가 백기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흰색의 깃발은, 일반적으로 항복, 혹은 싸울 의도가 없음을 알리는 것이 아니던가.
“미미르, 사격 중지해.”
이안은 그의 어깨에 매달려있던 미미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만.]
하지만 미미르의 생각은 달랐다.
[저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애초에, 백기가 저 기계들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지 않느냐.]
“어차피, 저 녀석들은 무기도 없는 데다, 벙커에 몸통 박치기라도 해 봤자 누가 죽을 일은 없잖아? 기껏해야 벙커나 좀 무너지고 말텐데, 뭘.”
하지만 이안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네가 정 그렇다면, 알았다.]
결국, 주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던 미미르는 고양이들을 향해 명령했다. 곧, 해안에 배치된 중기관총의 총성이 멎었다.
부아아앙-
고요해진 해안에 남은 것은, 수십 척의 적선이 해안을 향해 달려오는 엔진소리 뿐.
하지만 이안은 팔짱을 낀 채 배들이 쇄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곧.
쐐애액-
해변으로 쇄도하던 함선 중 하나가 출력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졸지에 날아다니는 질량병기가 되어버린 고속정은 그대로 해변 너머의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안, 조심해라!]
그 광경을 본 미미르가 당황해 소리쳤지만.
“걱정 말라니깐.”
이미 고속정의 속도와 거리를 계산한 이안은, 저 날아드는 쇳덩이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속정의 비행을 감상했다.
끼기기긱-
그의 예상대로, 백기를 든 고속정은 이안에게 한참 못 미친 곳에서 멈춰섰다.
“자, 뭐가 들었는지 어디 한번 볼까?”
모래사장 위로 올라온 고속정이 완전히 멈춰 선 것을 확인한 이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배 안에 든 것이 무엇이건, 날 해할 순 없어.’
오러 마스터가 가진 반사신경과 순발력은, 날아드는 총알도 쳐낼 수 있는 수준이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는 순간, 이안의 몸은 이미 안전한 곳에 가 있을 터.
이안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백기가 휘날리고 있는 함선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채 몇 발자국 떼기도 전.
위이이잉-
모래밭 한복판에 떨어진 고속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뭐야?”
자폭장치라도 장착된 것일까.
이안은 발걸음을 멈춘 채, 함선의 변화를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파아앗
이내, 함선에서 뿜어나오던 빛이 한데로 모여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저거, 홀로그램 아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광경.
그 모습을 본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 이름은 A-311.]
이윽고, 홀로그램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입을 열었다.
[관리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