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안은 1급 관리자의 자격을 가지고있다.
일곱 용에 소속된 자들에게, 시스템의 1급 관리자란 자신들을 인도할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
일곱 용의 간부 중 하나인 미네르바 역시, 이안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믿어줄 수는 없지.’
당연한 이야기다.
굳이 자신에게 나쁜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이란 동물은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내보이고 싶어 하니까.
그렇기에, 이안은 제작자의 안내서를 꺼내 들었다.
‘제작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정도 확실해지겠지.’
제작자는 일곱 용과 여섯 아이들을 만들어 낸 장본인.
분명,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이안은 여전히 백지 위에서 꿈틀대고 있는 잉크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꿈틀대던 잉크들은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다.
“뭐야, 이게.”
이안은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들을 보곤 인상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마키나-???’
‘여섯 아이들-???’
그가 적었던 세 단어 중, 두 개는 아예 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아니, 안내서면 그래도 답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제작자가 만들어 낸 안내서란 물건이 좀 불친절한 면은 있었지만, 답조차 해 주지 않았던 적은 없었기에 이안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리한 이안은 마지막 단어를 확인했다.
‘기계정령- 이 세계에 존재하는 힘, 마력과 마법을 일부 이용해 만들어낸 인공지능.’
“흠.”
별 의미 없는, 이미 이안 역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용을 확인한 이안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작자가 지구인이란 건 확실하네.’
분명, 이 세계의 지성체들은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알기로,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은 오직 지구뿐이었다.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지.’
물론, 그조차도 그리 영양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결국, 안내서를 사용한 이안이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내서는 개뿔이. 완전히 쓰레기네, 쓰레기.”
갑자기 짜증이 치솟아 오른 이안은 책상에 놓인 안내서를 집어 던지려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책장에 꽂아두었다.
‘혹시 모르니까.’
어찌 되었건, 전생의 자신과 유일하게 관련된 물건이 아닌가.
그런 물건을 그냥 내다 버리기엔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벅벅
결국, 교차검증에 실패한 이안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역시, 그냥 진행해야겠지?”
결정을 내렸다.
***
이안이 잠들어 있던 폐기장을 다시 깨워낸 뒤로, 일곱 용의 활동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화재 발생, 화재 발생. 구역 근처의 지성체들은 B-2구역으로 이동해 진화작업에 동참해 주십시오.]
“빌어먹을, 또?”
한때 수호대였던 자들은 더더욱.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섬을 지키는 임무를 맡던 자들은, 눈앞에 나타난 T의 메시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오래된 시설이기 때문일까.
복구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폐기장의 지하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툭하면 발생하는 잔고장과 화재들을 처리하는 건 통제자인 T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섬에 함께 살고 있던 조직원들 일부가 지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대체, 관리자님께선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보낸 거야?”
“지하에 쌓인 쓰레기나 치우는 신세라니….”
지하로 내려간, 아니 반쯤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는 전 수호대원들의 심경은 썩 좋지 않았다.
나름의 명예와 자부심을 가지고있었던 수호대의 임무에 비하면, 폐기물이나 부서진 기계들을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이곳의 업무는 그야말로 하찮은 일이지 않은가.
“젠장, 어서 움직이자고. 까딱하다간 우리까지 위험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T의 메시지를 확인한 대원들은 몸을 일으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잔 말 말고 움직이기나 해, 이 자식들아.”
그 말을 들은 전 수호자, 크리스틴의 반응은 달랐다.
“고양이들한테 밀렸으면 쪽 팔린 줄이나 알고 있어야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그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이 컴컴한 지하에 내려온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겨우 고양이 따위에게 수호대의 임무를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것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럼에도.
“우린 수호대이기 전에 일곱 용의 일원이야. 조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가리지 말고 해야 한다는 거, 몰라?”
그 사실 하나 때문에, 크리스틴은 군소리 하나 없이 이 지하로 내려왔으니까.
“이런 말 할 시간에 빨리 움직이자.”
“예!”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늘어져 있던 대원들의 움직임이 빠릿빠릿해졌다. 온몸에 소방용 장구를 주렁주렁 매단 대원과 크리스틴은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화재현장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어….”
그들이 화재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불이 아니었다.
“관리자님?”
“3분 12초. 전력으로 움직인 게 아니네? 뭘 하다 이제 오는 거야?”
불은커녕 그을음 하나 없이 멀쩡한 기계들 사이로, 그들을 이 지하에 처박은 장본인이 손목시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여기까지 처박았다지만, 이러면 곤란하지. 맡은 일은 똑바로 해야할 할 거 아냐?”
말을 마친 이안은 중앙에 있던 크리스틴을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이 컴컴한 곳까지 행차하셨는지요, 관리자님?”
그 말에 크리스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부하들이 있기 때문인지 전과 달리 존댓말을 쓰기는 했지만, 그녀 특유의 비꼬는 말투는 숨길 수 없었다.
그러자, 이안은 크리스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희한테 시킬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이 지하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답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이안의 지시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관리자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저희에겐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니까요.”
아직까지도 그녀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한 마디가, 크리스틴의 입을 타고 튀어나왔다.
관리자의 애완고양이 따위에게 밀렸던 그때 일을, 그녀는 평생 잊지 못할 테니까.
“부족하면 키우면 되지, 안 그래?”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는.
“지금부터, 너희는 선봉대다.”
그의 앞에 서 있던 크리스틴과 전 수호대원들에게 선언했다.
“선봉대?”
“그게 뭐지?”
이안의 선언을 들은 대원들은 생소한 명칭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하지만 그들의 대장, 크리스틴은 무언가를 깨닫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봉.
누구보다 가장 앞에 서는 것.
그렇다면, 무엇의 앞에 나서는 것이란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곧 이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시설의 복구작업이 끝나는대로, 너희에게 처음으로 마키나 대륙에 발을 들일 기회를 주지.”
그 전에, 훈련을 조금 받아야 하겠지만.
놀란 표정을 짓는 수호대 아니, 선봉대원들의 앞에서.
씨익
말을 마친 이안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이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2주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 시간동안 이안은 전 수호대원, 현 선봉대원들에게 기본적인 사격술과 생존기술, 전투술을 훈련시켰다.
물론, 이안의 기준에서 볼 때 기초였지만.
“으, 으으으….”
“관리자님은 신이야, 신….”
“사람이 아냐….”
마력을 다루는 능력자들에게 맞춰진 이안의 강도 높은 훈련 앞에서, 난다긴다하던 대원들은 하나둘씩 지쳐 쓰러져나갔다.
“끄으으….”
대장인 크리스틴은 어떻게든 견디고는 있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과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뭐 하는 거야 지금?”
이보다 더 가혹한 훈련도 숨 쉬듯 받아온 이안에겐 그저 코웃음 칠일 뿐이었다.
“이제 적응될 때도 되지 않았어?”
이안이 진행한 훈련은 몇 가지를 빼면 기존의 훈련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사격술이 훈련메뉴에 새로 추가되긴 했지만, 이들이 이토록 고통스러워 할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손발에 쇳덩이 좀 매달았다고 엄살은.”
손목과 발목에 수십 킬로의 쇳덩이를 매단 채 식사도 수면도 없이 2주일을 버티는 것은, 아무리 마력을 다루는 자라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선 대원들을 향해 이안은 악마같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그렇게 퍼질러 자고 있을 거야?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어?”
처음부터, 다시.
두 마디의 단어가 지쳐 쓰러진 대원들의 머릿속을 파고든 순간.
“아닙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졌던 대원들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괴롭히는 것만큼은 이미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란 말이지. 어떻게 이런 녀석이 신검을 쥐게 된 건지….]
지옥에서나 볼 법한 끔찍한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미미르는 차마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안의 괴롭힘, 아니 훈련이 채 시작되기도 전.
팟!
푸른 빛과 함께, 이안의 앞에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T?”
폐기장의 시설을 통제하는 기계정령, T-316.
홀로그램 너머로 보이는 스크린에는,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관리자님, 시설의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T가 가져온 낭보를 들은 이안은 반색했다.
이안이 T에게 주문한 것은, 폐기장에 마련된 공장시설의 완전복구.
이제.
‘저 녀석들에게 무기를 쥐여줄 수 있겠어.’
좀비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는 선봉대원들과 크리스틴을 곁눈질하던 이안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 바로 출발할게.”
[네, 관리자님.]
팟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T의 홀로그램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안은 간신히 서 있기만 한 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훈련 끝.”
“예?”
순간, 이안의 말을 들은 대원들의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훈련 끝이라고. 퍼질러 자든 말든 맘대로 해.”
이안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털썩!
일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원들의 몸뚱이는 일제히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하지만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섬의 지하를 향해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
수많은 기계들을 마주한 이안의 입에선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폐허나 다름없었던 2주 전에 비하면,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모습.
[표준재생공장의 복구를 완료했습니다. 관리자님께서 원하시는 물품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루 안에 양산 가능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T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T의 홀로그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뭐, 적을 것 없어?”
손을 내민 이안의 눈앞에, 그가 기억하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병기들의 설계도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