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이안의 페르소나가 가진 힘은, 마력을 재료로 사용해 지구의 병기를 세계에 구현해내는 것.
니미츠급 항공모함을 구현해내기 위해 들어간 미증유의 마력은, 신의 방패를 별명으로 사용하는 방공구축함 다섯 척을 구현해내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하지만.
“배, 배가 쪼개졌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이 엄청난 마력은 대체….”
거대한 항공모함 한 척이 마력으로, 그리고 다시 다섯 척의 구축함으로 쪼개지는 모습은 일곱 용의 조직원들에겐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게, 관리자님의 힘이라고?”
“이렇게 거대한 마력은 지금껏 본 적도 없어.”
“이만한 마력을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분이라면, 정말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이안의 입장에선 본의 아니게 힘자랑한 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이를 마주한 조직원들의 가슴엔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저건 뭐지?”
거대한 배가 사라진 자리에 정체불명의 함선이 또다시 나타나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조금 전 사라진 거대한 배와 똑같은 모습의 배가, 항구를 향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나, 나 저게 뭔지 알아!”
개중, 섬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배를 알아본 조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분명, 관리자님께서 강철둥지를 나포해온다고 하셨다고!”
강철둥지.
수십 마리의 강철 새가 잠들어 있는, 강력한 기계 중 하나.
발굴자와 발굴대를 제외하면 이야기로만 들어본 전설의 기계.
저 배는 사실상, 그들이 대륙으로 대규모 침공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이지 않은가.
“그럼, 저게 그 강철둥지란 말야?”
“마, 말도 안돼. 그럼, 적의 공격이란 소리잖아?”
“아냐, 잘 보라고! 관리자님께서 위에 타고 있어!”
이야기로나 들어왔던 강력한 기계 중 하나, 강철둥지.
그리고, 그 강력한 기계를 혼자서 제압한 일곱 용의 주인, 관리자.
“과, 관리자님 만세!”
“마, 만세!”
만세- 만세-
누군가의 선창을 시작으로, 항구는 순식간에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물론.
“뭐야, 갑자기 반응이 왜 이래?”
난데없이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관리자님의 방문을 환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C-218 역시도 저들처럼 관리자님을 언제나 기쁨과 충심으로….]
이 때를 놓칠세라, 항공모함의 인공지능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이안에게 굽신대기 시작했다.
사람이었다면 분명 간신으로 이름을 날렸을 게 분명한 혀놀림.
하지만 이안은 비굴한 태도가 영 익숙치 않았다.
“그만.”
[예.]
거북한 표정을 지은 이안이 한마디를 내뱉자마자, C-218의 입은 다물어졌다.
“다 좋은데, 혀가 너무 길단 말야.”
[이참에 저항력을 좀 키워놓는 것이 어떻겠나? 인간들 중엔 높은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하려는 놈들이 수두룩하다고 들었는데.]
몸에 닭살이라도 돋은 듯 이안이 몸을 부르르 떨자, 미미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검공 이안은 이미 아슈타르의 주인이자, 일곱 용의 지배자가 아닌가.
그가 원치 않더라도, 혀를 놀리는 자들은 언제나 이안의 옆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런 놈들은 옆에 안 두면 돼.”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럼, 다녀올 테니까 허튼짓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걱정 마십시오, 관리자님! 저는 절대로, 절대로 관리자님께 충성하겠습니다!]
이안과 멀어진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일까.
C-218은 왠지 모르게 들뜬 목소리로 아양을 떨어댔다.
그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구는 데에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 폭탄을 좀 어떻게 처리해 주시면….]
“눌러 달라고?”
[아, 아닙니다.]
하지만 손에 든 기폭장치를 흔들고 있는 이안 앞에선 깨갱할 수밖에 없었다.
[자, 잘 다녀오십시오….]
타앗
침울한 항공모함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이안은 배의 비행갑판에서 단숨에 뛰어내렸다.
거대한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은 지면보다 수십 미터는 더 높았지만,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안에겐 울타리 넘기보다 쉬운 일.
갑자기 배 위에서 뛰어내린 이안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자, 조직원들의 만세 소리가 끊기듯 멈췄다.
“다들, 오랜만이야?”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진 항구에서, 왠지 모르게 상기되어 있는 일곱 용의 조직원들을 향해 이안은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와아아아-
항구를 메우던 만세 소리는, 함성으로 뒤바뀌었다.
***
폐기장으로 돌아온 이안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T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받는 것이었다.
[폐기장의 잔존자원 분류작업은 모두 마쳤습니다. 현재는 시설의 가동률을 높이기 위한 복구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예상보다 빠른데?”
T의 보고를 듣고 이안은 휘파람을 불었다.
작업을 끝내는 데 예상했던 시간보다 거의 절반 가까이 줄인 셈이었으니까.
이안이 놀란 표정을 짓자 T는 부연설명을 이어나갔다.
[잔존자원 분류작업을 위해 추가로 배정해 주신 인간들의 작업속도가 예상보다 빨랐습니다.]
“아… 그 친구들.”
T의 말을 들은 이안은 폐기장 지하에서 구슬땀을 흘렸을 전 수호대원들과 크리스틴을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작업속도야 보통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겠지만, 그들이 그 일을 기꺼워했을 리는 없으니까.
[모두가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인간들인 덕에 자원운반이 수월했습니다. 그들이 제 힘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들어가 준 덕분입니다.]
“그건 잘된 일이네.”
예상치 못한 T의 극찬에 이안 역시 미소를 지었다.
폐기장의 역할은 수거자원-이라고 쓰고 폐기물이라고 읽는다.-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변환해, 새로운 쓸모를 찾아주는 것.
이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부품 정도는 만들 수 있는 공장이 기본적으로 설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생산공장은 언제부터 가동할 수 있는 거야?”
공장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은 기계를 조립하는 기본적인 부품들 정도였지만, 약간의 개조만 거친다면.
‘조직원들에게 필요한 병기를 공급할 수도 있겠지.’
이안의 머릿속엔, 이미 지구에서 사용하는 각종 병기의 설계도들로 가득했으니, 생산설비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 정돈 일도 아니다.
이안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T의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T는 건조한 어투로 내뱉었다.
[복구작업이 끝나는 2주 뒤에는 가능할겁니다.]
“2주라, 더 빨리할 수는 없어?”
이안은 아쉬운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마키나 대륙으로 가고 싶었던 이안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작업효율을 조금 더 높여보겠습니다.]
“좋아.”
T로부터 답을 들은 이안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쓸모가 생기겠는데.’
미미르의 분신들에게 무기를 쥐여주고 유지하는 데엔 적은 양이나마 마력이 필요하다.
이안과 마도위성이 가진 무궁한 마력에 비하면 티끌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숫자가 늘어난다면 무시할 수 없는 양.
일곱 용의 조직원들에게 지구의 병기를 쥐여 줄 수 있다면, 그 부담을 덜 수 있으리라.
“그럼, 수고해. 난 할 일이 있어서.”
생각을 마친 이안은 T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네, 관리자님.]
인사와 함께 T의 홀로그램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안은.
“들어와.”
집무실 문 밖에 있을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끼익
이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여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전수자 미네르바.
이안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곱 용을 이끌던 실질적인 수장.
“미안, 오래 기다렸겠는데?”
“관리자님을 뵙는 일입니다. 이 정도는 기다림도 아니죠.”
그러나, 지금은 이안을 보좌하는 비서의 역할을 할 뿐.
그의 말에 고개를 저은 미네르바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이안이 앉은 책상을 향해 다가왔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이안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여섯 아이들에 대해 설명해 줘.”
“마키나 대륙을 통제하는 여섯의 기계정령입니다.”
미네르바의 답은 빠르게 튀어나왔다.
“잘 알고 있는 모양인데?”
“일곱 용을 대륙에서 쫓아낸 장본인이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의 눈에선, 숨길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놈들은 마키나 대륙의 주요 생산설비와 방어체계에 깃들어 있습니다. 대륙을 기계로 가득 채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존재들이죠.”
‘기계 정령이라.’
프레이야와 같은 존재들인 걸까.
‘괜찮으려나.’
이안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지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당연히, 놈들도 제작자의 산물이겠지?”
“물론이죠. 제작자님께서 남긴 유지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키긴 했지만요.”
이안의 물음에 씹어뱉듯 말을 내뱉은 그녀의 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반란이라.”
“마키나 대륙에서 거주하던 생명체 대부분이 사망했습니다. 벌써 수 백년 전의 일이지만요.”
기계의 반란.
SF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지만, 이미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들의 침공을 받아본 이안은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럼, 놈들에 대한 정보 같은 것도 남아 있겠는데?”
“이 섬으로 탈출해오신 선조님들께서 남기신 자료가 있습니다. 자료를 보여드릴까요?”
이안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은 그녀는, 관리자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물론.”
“그러면, 기록보관소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네르바는 몸을 돌려 집무실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럼….”
집무실에 홀로 남게 된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집무실 한켠에 자리한 거대한 책장.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일곱 용이 수백 년간 보관해 온 수많은 책들 중에서.
“어디….”
이안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보다는 수첩에 가까울 만큼 얇고 작은 책 한 권.
노트인지 책인지 모를 무언가를 쥔 채 책상으로 돌아간 이안은 책의 제목을 읽어내렸다.
[이계에서 온 강민혁을 위한 아스텔리아 안내서]
제작자가 자신을 위해 남긴 책.
“오랜만인데.”
한동안 열어볼 일이 없었던 책을 오랜만에 집어든 이안은, 감회어린 눈으로 책 표지에 쓰인 한국어를 바라봤다.
“이미 아스텔리아가 아니긴 하지만….”
제작자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분명 대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서걱서걱
안내서를 펼친 이안의 펜이 텅 빈 백지 위를 가로질렀다.
‘마키나’
‘여섯 아이들’
‘기계정령’
“흠.”
종이 위에 한글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단어들을 내려다보며, 이안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으으-
글씨를 검게 물들인 잉크들이, 하얀 종이 위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교차검증의 시간이다.
꿈틀대며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는 글자들을 바라보던 이안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