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147화 (148/224)

#149화

신과 마가 대립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짧게는 신마대전이 벌어진 600년 전. 길게는 이 대륙, 아스텔리아에 문명이 뿌리내렸던 태고적부터의 일.

직접적인 충돌은 단 한 번, 신마대전 당시뿐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신들은 인계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마경과 꾸준히 대립해왔다.

그런데.

“협약이 뭔데?”

죽고 못 사는 두 세력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니.

지금까지 마왕을 셋, 아니 넷이나 쓰러트려온 이안의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진정으로 모른다는 말이냐?”

그 말을 들은 메피스토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스스로 까발린 꼴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넵튠의 도움을 받아서 온 것이 아니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

말을 마친 메피스토는 이안의 뒤에 널브러져 있던, 한때는 마왕이었을 살덩이를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저 놈이 괜한 짓만 하지 않았다면.’

마왕토벌자가 마경의 한복판까지 몰래 숨어들어올 일도 없지 않았는가.

어째서 인계에 포탈을 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일일 터.

‘군주랍시고 콧대만 높아서는, 사고만 치는 쓸모없는 것들.’

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지금, 그의 뒤에는 남은 여섯 마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마경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입 다물고 서 있을 거야?”

이안이 깍지낀 손을 뒤통수로 넘기며 재촉하자, 메피스토는 인상을 찡그린 채 이안을 노려봤다.

“어차피 별 이야기도 아니니 설명해주지.”

곧, 그의 입에서 협약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법 긴 설명이었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뭐야, 불가침조약이잖아?”

메피스토의 꼬이고 꼬인 설명을 대번에 알아차린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불가침(不可侵).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동맹처럼 끈끈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는 한 상대가 내 뒤통수를 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의 비즈니스적 관계.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안의 생각하기에 하나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악으로 이용하는 관계라. 지금까진 좋았겠어?”

이안은 단번에 이 협약이 양쪽에 가져다 줄 이득을 명확히 꿰뚫어 봤다.

“신족들 입장에선, 마족만큼 적으로 삼기 좋은 존재가 없었겠지. 덕분에 인계의 주민들로부터 신앙심도 좀 끌어모으고 말이야.”

신족들이 인계의 주민들로부터 신앙을 쉽게 끌어모을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는, 신족이 인계를 수호한다는 사실.

하지만.

인계를 호시탐탐 노리는 마족이 완전히 사라지고, 마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면.

인계의 주민들은, 과연 신을 필요로 할까?

“그래, 이제 그 빌어먹을 놈들이 왜 전쟁을 반대했는 지 알겠어.”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전우, 에드너 폰 아슈타르 공작이 죽은 이유도.

결국.

‘신족놈들 밥그릇 싸움에 휘말리다니, 이런 개죽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전우와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달리했다.

고작.

신들이 자신의 손에 쥔 것을 놓지 않기 위해서.

“이건 좀, 불쾌한데.”

묻어두었던 전생의 불쾌한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해 자신과 전우들이 겪어왔던 불합리한 일들.

장소와 명령자만 바뀌었을 뿐,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추악한 행위란 점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제, 궁금증을 해결했다면 이만 마경을 떠나라.”

그 모습을 지켜본 마왕, 메피스토는 재차 이안을 향해 통보했다.

어찌 되었건 이안은 마경의 군주, 마왕을 넷이나 죽인 마경의 적.

자신들의 땅 한복판에 적을 남겨놓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난 떠날 수 없어. 나에겐 저 녀석이 꼭 필요하니까.”

“그러면 협상은 결렬이로군.”

이안의 거절에, 메피스토는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렸다.

파직 파지지직

순수한 마기로 이루어진 보라색의 검 끝이 이안을 향했다.

‘마경이 멸망한다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빠르건 늦건의 차이다.

등 뒤의 적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언젠가는 적이 등 뒤에 칼을 들이밀 테니까.

‘마왕들을 부른다.’

그를 포함한 일곱의 마왕은 대륙 전체에서도 최상위급의 강자.

일곱의 마왕이 함께 협공한다면, 제 아무리 마왕토벌자라 한들 이겨낼 도리가 없으리라.

그러나, 메피스토가 마왕들을 소환할 일은 없었다.

“저기, 내 말 아직 안 끝났거든? 그 칼 좀 치우지?”

“우리 사이에 더 할 말이 남아있었나?”

이안이 자신의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메피스토는 싸늘한 눈으로 이안을 내려다봤다.

자신은 제안했고, 상대는 거절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안은 달랐다.

“그럼, 남아있고 말고.”

메피스토의 말에 이안은 씨익 웃고는.

“내 생각엔 우리 둘 다, 같은 불만을 가진 것 같단 말이지.”

보라색으로 물든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진심인가?”

메피스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안의 손가락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신족.’

그렇기에, 메피스토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신검의 주인이, 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신검의 주인을 포함한 일곱 영웅들은, 신마대전 당시 마족에 앞장서 싸워온 자들.

그들의 후예가 이제와서 신족과 반목을 할 거란 이야기를 꺼낸다 해서,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뭐, 믿건 안 믿건 상관은 없어.”

메피스토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에 쥔 권총을 들어 올렸다.

“너희 전부와 싸워서 이기면 그뿐이니까. 안 그래?”

“…네놈.”

장전을 마친 권총을 겨누자 메피스토의 검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아직 이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물론 너희랑 나랑 싸우면 나도 무사할거란 보장은 없지만, 너희가 잃는 것도 적진 않을 거 아냐? 어쩌면, 마족이란 이름 자체가 대륙에서 사라질지도 모르지.”

“…흠.”

그것이, 메피스토가 가장 우려하는 일 중 하나였다.

눈앞의 마왕토벌자와 정말로 맞붙었을 때, 과연 마왕들 중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살아남은 마왕들이, 과연 인계의 침공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보여준 마왕토벌자의 힘을 생각한다면, 반수 이상은 소멸당할 게 뻔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한들, 그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남은 전력으로 인계의 침공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마경은 이미 네 명의 군주를 잃었다.

마왕의 숫자가 더욱 줄어든다면 마경은 스스로를 지킬 수조차 없을 만큼 약해지리라.

“…원하는 게 뭐냐.”

결국, 그는 눈앞의 인간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가 신들과 맺은 협약과 같은 것.”

메피스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이안은 한 쪽 입꼬리를 올린 채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했다.

메피스토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네가 밟고 있는 땅에서 나가는 게 먼저겠군.”

눈앞의 인간이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는 땅은, 분명 마경의 것이지 않은가.

이미 남의 영역을 침범해놓고서 할 말은 분명 아니었으니까.

“나도 비켜주고는 싶은데 말이지, 너희 친구가 너무 쩔어서. 이건 양보 못하겠더라.”

말을 마친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메피스토는 순간 할 말을 잊었지만, 곧 검을 들어 올렸다.

‘시간낭비였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놈의 시간벌이였을 지도 모르지.

이제, 더 이상 인간놈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 더 이상의 말은….”

“대신.”

하지만 이안은 메피스토의 말을 끊고는.

“날 도와주면, 최대한 빨리 꺼져줄 용의는 있는데.”

마왕을 향해 또 다른 제안을 남겼다.

“이번엔 또, 무엇을 도와달란 말이냐. 계속 허튼 소리만 할 거라면….”

물론, 메피스토가 이안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이안이 협상할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하고 있는 판국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씨익 웃으며, 대검이 꽂힌 살덩이를 가리켰다.

“저 녀석의 마석이 있는 장소.”

“…뭐?”

“그것만 알아낼 수 있다면, 네 말대로 이 땅에서 사라져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이안이 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마력생성기를 무사히 지켜내는 것.

그것만 달성할 수 있다면, 이안은 이 땅이 있건 없건 별 상관이 없었다.

“어때?”

말을 마친 이안은, 잠시 주춤한 메피스토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

이안의 제안을 받은 메피스토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이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땅에서 사라진다는 약속, 그것만은 확실하게 지켜라.”

“마석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메피스토가 으름장을 놓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마경을 떠날 수 없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마력발생기를 옮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석으로부터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왕의 육체에 공급되는 마기는 더욱 줄어들게 되니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왕, 마르바스의 본체라 할 수 있는 마석을 직접 취하는 것.

그리고, 마왕이 이안의 제안을 받아들인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쉽네, 쉬워.”

마경 모처의 지하공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머리통만 한 마석이 보랏빛 광채를 내뿜는 것을 보며,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마석의 위치를 찾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안이 가진 위성의 정찰능력은, 마력발생기-라고 이름 붙인 마왕-에 연결된 마기의 선을 추적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으니까.

마석이 숨어있는 위치를 찾아낸 이안은, 메피스토의 허락을 받은 다음 마경 안으로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다.

이미 목표의 위치 파악이 끝난 상태에서, 마석을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

“자, 이제 약속대로 마경에서 사라져라.”

이안이 마석을 보며 감탄하자, 그의 뒤에 선 메피스토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물론. 사라져 드려야지. 덕분에 큰 일 하나 해결했는데.”

마왕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그리고 이제, 이안의 계획은 다음 단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또 뭐냐.”

“누굴 좀 소개해줬으면 좋겠거든.”

“소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메피스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넵튠.”

이안의 입에서 신의 이름이 나온 순간.

“…내가 마경의 군주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로군, 마왕토벌자여.”

마왕은 이안을 미친 놈 보듯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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