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어지간한 성보다 거대한 직사각형의 거대한 빌딩, 만신전.
바드리안 공작가에서 가장 중요한, 공작가 그 자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신전의 어딘가.
“…으음.”
그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성광공, 엘로임 폰 바드리안의 표정은 심각했다.
“지금 하는 말, 사실인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엘로임은 다시 한번 상대에게 물었다.
부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며.
하지만.
-사실이다.
그의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후우.”
상대의 짧은 대답을 들은 엘로임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 위치한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많은 석상들.
통합주교인 그와 소통하는 모든 신들의 신상들이 이곳, 예배실에 모여 있었다.
목소리는, 그중 가장 빛나는 석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
신들 중 인계에서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신 중 하나이면서도.
‘인계에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신.’
꿀꺽
엘로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였다면, 아무리 상대가 신이라 하더라도 이토록 긴장하지는 않았으리라.
아무리 강력한 신이라 한들, 만신의 지상대리자인 그에겐 수많은 신들 중 하나일 뿐이었을 테니까.
-신계에서는, 신검공의 행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하지만, 지금만은 달랐다.
지금 그를 본뜬 석상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마법의 신이 아니라 신계 전체의 의지.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갈리우스의 신성은 수십, 수백의 신을 부리는 통합주교의 강인한 영혼마저 삼켜버릴 것처럼 강하게 타올랐다.
하지만, 엘로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종전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맞지만, 분명 신계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가 알기로, 신검공 이안 폰 아슈타르 공작은 홀로 두 명의 마왕을 소멸시킨 마왕토벌자.
신족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마왕들을 알아서 때려 잡아주고 있는데, 칭찬을 하진 못할망정 경고라니.
그러나.
-그는 균형을 깨고 있다, 대리자여.
통합주교의 물음에 갈리우스의 석상은 고개를 저었다.
-신마대전이 마족들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대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마치, 자신들이 마족을 멸망시키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멸망시킬 수 있었다는 뉘앙스.
말을 마친 갈리우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물론, 일곱 영웅의 후예들 중에서도 가장 신족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엘로임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신과 마의 균형.”
-그래.
엘로임의 말에 갈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균형을 이뤄야 하는 법이지. 그것은 상극이나 다름없는 신과 마도 마찬가지이고.
“몇몇 신들 중에선 부정하는 자들도 있지 않는가?”
-균형이 무너졌을 때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 여기는 자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두 다리 중 한 다리가 부러지면 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거늘.
엘로임의 말에 갈리우스는 그답지 않게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신족들이 볼 때 신검공은 다리를 부러트리는 존재라는 이야기일 테지.”
“흠.”
그 역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대륙, 아스텔리아에 존재하는 마법, 검, 전설.
그 어떤 것과도 연관되지 않은, 자신만의 병기를 다루는 존재였으니까.
‘마치 딴 세상에서 넘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이안이 부리던 기상천외한 병기들을 떠올린 엘로임은 저도 모르게 갈리우스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는 이 대륙에 걸맞지 않은 힘을 손에 쥐었다. 신마대전 당시의 제작자처럼.
말을 마친 갈리우스는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꺼내려는 이야기는, 세계의 극소수만이 알고 있던 추악한 비밀.
세계의 균형을 위해 움직인다는 미명하에 저지른 끔찍한 죄악.
“…역시, 자네들은 변하지 않았어. 초대 주교의 말씀 그대로야.”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극소수 중 하나, 엘로임은 갈리우스의 말을 듣곤 한숨을 내쉬었다.
“신검공 역시, 제작자의 전철을 밟게 할 셈인가?”
그의 표정도 갈리우스와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마법의 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대화를 해봐야겠지. 그와 척지는 것 또한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요인 중 하나일 테니.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신족과 마족,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인계가 서로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
단지.
“만일, 그가 거부한다면?”
신검의 주인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없을 뿐.
엘로임이 갈리우스를 향해 질문을 던진 그 순간.
파아아앗
예배실에 자리 잡은 수백, 수천의 신상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엘로임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드리안 공작가의 기록에서도, 몇 되지 않는 일.
만신(萬神)의 신탁.
-그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갈리우스.
아니, 만신전의 모든 신들은 선언했다.
-우리가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 테니까.
마왕토벌자를 향해.
***
아스텔리아에서 마력은 지구의 전기와 유사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이 쉽고, 그 덕에 수많은 상황에서 사용이 가능한 범용성을 지닌 에너지.
하지만, 전기와 마력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마력은 아무나 쓸 수 없지.’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육체가 마력을 느끼고 움직일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력을 느끼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마력이란 선택받은 자들이 다루는 힘일 뿐.
설사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력은 전기에 비해 사용할 수 있는 양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결국 마력은 자신이 축적한 마력에 기반을 두게 되니까.’
마력을 많이 축적한 자가, 더 강한 힘을 다룬다.
그 점이, 지구와 아스텔리아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힘과 달리, 선택받은 자에게만 허락된 힘은 결국 힘의 불균형을 만들어 냈으니까.
‘하지만 마력이 전기와 다른 점은 그뿐만이 아니야.’
마력은 분명 전기에 비해 축적하기도, 다루기도 어려운 힘이었지만.
“마력을 충분히 다룰 수만 있다면, 그 범용성은 차원이 다르거든.”
우웅
말을 마친 이안은 심장에서 들끓어오르는 마력을 향해 의지를 내쏘았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간 마력은 곧 그가 손에 쥔 영웅급 페르소나, 미미르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현재의 이안은 페르소나를 완전히 개방한 상태.
파아아앗
페르소나의 힘에 의해 50배로 증폭된 황금빛 마력은, 이안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이루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이 불러낸 것은 병기가 아니었다.
우웅
그가 대지 위에 구현해낸 것은, 회색의 시멘트로 지어진 사각형의 독특한 구조물.
보라색의 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색이었지만, 이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마력이 있고 봐야 돼,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니.”
말을 마친 이안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애오오옹
가사 상태에 빠진 마왕, 마르바스와 가슴 위에 대검을 꽂고 있는 보라색과 파란색의 고양이.
저들이야말로, 이안이 마력을 마음껏 뿜어낼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
[조금만 지나면 저 마왕놈에게 고개라도 숙이겠군.]
“이 정도 마력을 얻을 수 있다면야, 고개 정도는 얼마든지 숙여줄 수 있지 않겠어?”
주인의 밝은 표정을 본 미미르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이 세계에서 마력은 힘의 원천.
마기로 물든 대지에서 직접 빨아들이는 마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이렇게 많은 마력을 가지고 뭘 할 셈인게냐.]
“이런 거.”
미미르의 물음에 마력은 고양이들의 손에 쥐어진 HK416을 가리켰다.
그 크기 때문에 고양이 두 마리가 하나의 소총을 들고 움직여야 했지만, 이안에게 그런 것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나 혼자서는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잖아?”
이안이 분명 강력한 병기를 다루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불러낼 수 있는 병기의 숫자는 결국 마력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잘해야 둘 정도가 한계였지.’
새로운 병기를 하나 소환해내기 위해선, 병기뿐만 아니라 그 병기를 이안 대신 운용할 미미르의 분신들을 더 불러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안은 자신이 구현해낸 병기들.
아니, ‘기지’를 바라봤다.
폭탄이 만들어 낸 크레이터 주변으로 길게 이어진 참호선과 그 사이사이에 배치된 대공포, 그리고 야포들.
애오오옹
그리고 그 사이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수백의 고양이들까지.
그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이안이 공급하는 마력을 통해서.
‘결국, 개인은 집단을 당해낼 수 없는 법이지.’
이안이 다루는 병기 하나 하나는 좋게 말하면 전문화되어있고, 나쁘게 말하면 범용성이 떨어졌다.
지금까지는 각 상황에 맞게 병기를 구현해내는 방법으로 극복해왔었지만, 결국은 언 발에 오줌 누기식 미봉책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페르소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이안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보조할 군대를 직접 만들어 내는 것.
하지만, 이안의 계획엔 딱 하나의 문제가 존재했다.
[그럼, 마왕들은 어떻게 할 셈이냐.]
이곳은 마경,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마왕토벌자가 자신들의 구역 한복판에 침입했는데, 다른 마왕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미미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구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떨려왔다.
하지만 지진은 아니었다.
키에에에-
이안이 가진 마력과 신성력을 느끼고 찾아온 수많은 마수들.
셀 수 없이 많은 마수들의 파도가 크레이터 밖의 지평선을 가득 메웠다.
[이안, 5km 밖에서 측정 불가능한 숫자의 적들이 몰려온다. 예상 도달 시간 5분.]
사태를 파악한 미미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곳이 마경의 한복판이기 때문인 걸까, 상대의 숫자는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하나하나는 분명 약해빠진 마수일 뿐이었지만, 숫자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마왕에게 추적될 위험이 있더라도, 탈출을 권하고 싶다만.]
미미르는 조심스레 제 주인을 향해 조언을 건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내가 그 말을 들을 거 같아?”
그의 주인이 무한히 마력을 만들어 내는 마력발생기를 놓고 갈 리 없었으니까.
[…그럴 리 없겠지.]
“그리고, 난 혼자가 아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고양이를 들어 올린 이안은.
“전 대원, 공격.”
이 기지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대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콰과광-
그가 만들어 낸 기지에 배치되어있던 수십의 야포가 불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