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메피스토.
마경을 다스리는 열 두 군주 중 하나이자, 그들의 가장 위에서 마경을 통솔하는 존재.
마왕 중의 마왕이라 불리는 그는 지금.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분노에 몸을 떨며 팔걸이를 힘껏 쥐었다.
콰드드득
마경의 마기를 듬뿍 머금은 보라색 왕좌의 내구성은 어지간한 강철보다 높았지만, 메피스토의 손아귀 힘 앞에선 종잇장처럼 구겨질 뿐.
“바르바토스, 단탈리안, 아스타토트….”
이제는 세계에서 사라져버린 세 명의 마왕.
이들이 사라지면서, 마경과 인계 사이의 균형은 크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마왕이란 것들이 자존심만 높아선, 아주 제 멋대로야!”
백 년 동안, 메피스토가 이렇게 분노한 적은 없었다.
마경에 남은 마왕은 이제 그를 포함해 여덟 명.
자칭 인계의 방패라는 일곱놈들의 후예와, 그 뒤의 제국을 상대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숫자였다.
“방법을 내야 되겠어.”
메피스토는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해야 할 때였으니까.
하지만.
삐이-
“…이건?”
그에게 전해진 불길한 경보음에, 메피스토는 얼굴을 굳혔다.
지난번 회합 이후, 메피스토는 남은 마왕들에게 추적마법을 걸어두었었다.
위치뿐만 아니라, 대상의 상태까지 알 수 있는 고차원의 마법.
다른 군주들의 반대마저 무릅쓰고서 시행한 마법이 드디어 작동한 것이다.
“빌어먹을.”
그리고, 메피스토는 이 경보음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고 있었다.
“또 어떤 놈이….”
마왕 중 하나의 육체가 위험 상황에 처했다는 경고음.
삐- 삐-
메피스토는 눈을 감은 채 급히 경보음이 울린 곳이 어디인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보음의 위치를 파악한 메피스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르바스라고?”
경보가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죽은 자들의 왕 마르바스의 영지가 위치한 곳이었으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는 메피스토는 경악했다.
“인계놈들이, 마경의 후방에 들어왔다고?”
인계와 마경 사이의 싸움은, 결국 하나의 전선을 두고 이루어져 왔다.
자신들을 일곱 영웅의 후예라 주장하는 연합공국과 마경의 최전선.
가끔씩, 인계의 몇몇 마법사가 마왕이나 마족을 인계에 강림시키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마경의 후방이 공격당하는 것은, 신마대전 이후 처음 겪는 일이다.
메피스토는 달아오르는 머리를 진정시키면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경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오는 건 불가능해.’
마르바스의 영지, 시타델이 위치한 곳은 마경의 최후방.
연합공국에서 시타델까지의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중에, 다른 마왕들이 자신의 영지에 나타난 침입자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아니, 당장 메피스토 자신이 먼저 느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뿌드득
가능한 시나리오 두 가지 중 하나를 부정한 메피스토는, 남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곤 이를 갈았다.
‘바다다.’
시타델은 마경의 최후방이자, 해안에 위치한 영지.
바다를 통해서 침입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설마, 넵튠 놈이 길을 열어준 것인가?’
대륙의 바다를 관장하는 신, 넵튠.
놈이 인계 놈들에게 바닷길을 열어줄 것이라고는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이 사실이라면.
‘이런 식으로, 협약을 깨겠단 말이지.’
사실, 이안이 마르바스의 영지에 침투한 방법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지만.
‘역시, 음흉한 신족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메피스토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협약을 지킬 이유가 없겠지.
우우웅
메피스토는 몸 안에 가득 들어찬 마기를 힘껏 끌어올렸다.
[모여라, 때가 되었다.]
마왕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피이잉-
진한 마기로 가득찬 여섯 개의 보라색 화살이 빠른 속도로 마경의 각 마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뿌드득
화살을 쏘아낸 메피스토는 이를 갈며.
”정 네놈들의 뜻이 그렇다면, 어울려주지.”
보라색으로 물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
마르바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육체가 마흔 일곱번 째 조각났을 때였다.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다. 그러니 이제….”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마왕이라고 해도, 자신의 존재가 소멸했다 재구성되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그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수십 번이나 반복하니, 천하의 마왕도 굴복할 수밖에.
하지만 이안은 마르바스의 애원을 듣곤 씨익 웃었다.
“그래? 내 생각엔, 네가 말해줄 게 좀 더 있을 거 같은데 말이지.”
기이이잉
“저, 정말이다! 내가 아는 것은 이게 전부란 말이다!”
이안의 말과 함께, 비호에 달린 기관포가 꿈틀대자 마르바스는 경기를 일으켰다.
자신의 몸을 마치 다진 고기처럼 잘게 찢어버리는 저 경악할 무기 앞에서, 힘조차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몸을 부르르 떠는 것뿐.
“잘 생각해 봐. 뭔가 잊어버린 게 있지 않아?”
“그런 건 없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아는 건 전부….”
이안의 끈질긴 질문을 받은 마르바스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지만.
“그럼, 생각나면 다시 말해달라고.”
기이잉
“그, 그건 안 된다! 잠깐!”
이안이 자백제(물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미 정신이 꺾여버린 마르바스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부아아아아앙-
비호의 30밀리 기관포는 다시금 마르바스의 몸뚱이를 다진고기로 만들어버렸으니까.
[내가 볼 땐, 정말로 아는 게 없어 보인다만.]
그 모습을 비호 안에서 지켜보던 미미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이건 괜한 시간 낭비지 않나.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이니,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다.]
미미르의 말대로, 이안이 밟고 선 땅은 마경, 그중에서도 가장 후방에 위치한 곳이었다.
아무리 이안이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한들, 마기가 시도 때도 없이 육체를 침식하려 드는 마경에선 전투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안은 긍정하는 대신 꿈틀거리며 재생을 시도하는 마르바스의 육체를 가리켰다.
“그냥 내버려 두기엔, 좀 아깝지 않아?”
[뭐가 아깝단 말이냐?]
아깝다니.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마왕을 포섭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그만 두어라. 저들이 아무리 강자를 따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왕이다. 최소한의 자존심은 가지고 있으니, 아직도 저렇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 마석의 위치를 불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지.”
이안은 고양이의 말에 동의했다.
하긴, 자신의 생명이자 전부나 다름없는 마석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건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지 않은가.
“삶에 대한 의지가 저렇게 강한 녀석이라면 죽어도 마석의 위치를 말해줄 생각이 없을 거야.”
만약 자신이 저런 상황에 처했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미미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이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다른 마왕들이 몰려온다면 너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 문제가 생기기 전에, 어서 움직여야 할 거다.]
미미르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혹여나, 둘 이상의 마왕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마왕토벌자 이안이라 할 지라도 힘에 부칠 게 뻔했으니까.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근데 말이지.”
그러나.
“방금, 쓸만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거든.”
그 말과 함께, 이안은 꿈틀대는 살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미미르, 분신 하나만.”
[어, 어? 어, 그래. 알았다.]
이안이 갑자기 마르바스를 향해 움직이자 미미르는 당황했지만, 그는 주인의 말에 따라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보냈다.
애오옹!
반투명한 고양이는 재빨리 이안을 향해 달려와 안겨들었다.
애옹
이안은 그런 고양이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고는.
우웅
그의 손에서, 대검 한 자루를 구현해냈다.
그리고는.
“자, 이걸 잡아.”
애옹?
어리둥절해하는 미미르의 분신을 향해 손잡이를 들이댔다.
“절대로 놓으면 안 된다. 알았지?”
애옹!
앞발로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꽉 붙든 고양이의 모습을 확인한 이안은.
휙
그대로 마르바스, 아니 마르바스가 되려는 살덩이를 향해 집어 던졌다.
애오오옹!
난데없이 하늘을 날게 된 고양이가 당황해 울어댔지만,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손에 쥔 대검을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푸욱
미미르의 분신이 쥔 대검은, 그대로 마르바스였던 살덩이를 향해 파고들었다.
애오옹?
이안은 영문을 몰라하는 고양이가 대검을 쥔 채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잠시 바라보고는.
“흡마.”
페르소나의 특성을 발동시키는 시동어를 외쳤다.
그와 동시에.
스으으-
애, 애오오옹!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마기를 느낀 고양이가 놀라 울어댔다.
“좋아, 그대로 가만히 있어.”
하지만 이안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르는 그의 페르소나에 부속된 인격이고, 그것은 저 고양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우우웅-
미미르의 분신도, 페르소나의 특성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디어를 떠올린 이안은 그대로 실행에 옮겼고.
파아앗
결과는 곧장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역시.”
보라색을 띤 마기가 점점 푸른색으로 변해간다.
반은 보라색으로, 반은 파란색으로 나뉜 고양이의 몸뚱이는, 이안의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안, 설마….]
“그래.”
그제야 이안의 생각이 무엇인지 눈치챈 미미르가 놀라 크게 눈을 떴다.
이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라면….
마왕이 품고 있는 마석은 끊임없이 주변의 마기를 흡수하고, 내뱉는다.
그리고, 눈앞의 마왕이었던 살덩이는 마석으로부터 마기를 공급받는 존재.
그리고 이안이 가진 페르소나의 특성 중 하나, 흡마를 활용하면.
[허, 허허.]
애오옹….
마왕의 본체인 마석이 소멸할 때까지 반영구적으로 마력을 생산해내는 장치가 완성된다.
그 효용을 깨달은 미미르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이름은, 음. 마력발생기라고 지어줄까?”
이제, 더이상 마력부족에 시달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이안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몸뚱아리에 꽂힌 대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간신히 입을 재생한 마르바스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경악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마기가 몸뚱이에 꽂힌 대검에 뽑아 먹힐 지경이었으니까.
“아, 안….”
당황한 마르바스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안을 향해 애원했지만.
“돼.”
마왕토벌자 이안에게, 자신의 영역을 먼저 건드린 마왕을 향해 베풀 자비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