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언데드 드래곤.
마르바스가 화신에 담긴 힘 대부분을 쏟아내 만들어 낸 강력한 언데드.
그의 예상대로라면, 언데드 드래곤은 마왕토벌자 이안을 상대로 충분한 시간을 끌어줄 수 있었겠지만.
콰우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쿵
언데드 드래곤의 몸뚱이는 본디 다른 언데드들의 살과 뼈를 이어 만든 누더기였지만, 이젠 누더기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박살 나 있었다.
처참한 몰골을 한 채, 한 때 만년빙하라 불리던 강 한가운데 떨어진 언데드 드래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쐐애액-
하늘 위에서 추락한 언데드 드래곤의 상태를 확인한 이안은 미미르에게 말을 걸었다.
‘미미르, 이쪽은 해결했어. 그쪽 상황은?’
[절반 이상의 언데드를 소멸시키는 데 성공했다만…, 상당수는 이미 북쪽에 만들어진 마법진을 통해 빠져나갔다.]
미미르의 목소리는 영 좋지 않았다.
이안이 불러낸 병기는 분명 강력했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를 상대하기엔 숫자가 부족했다.
그들이 잡아낸 언데드의 숫자는 못 해도 5천은 될 것이 분명했지만, 그보다 갑절은 많은 병력이 아직도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뭐가 문제야? 어차피 작전대로 가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이안은 미미르의 반응에 피식 웃고는, 상승하던 썬더볼트의 기수를 다시 아래로 향하게 하며 스위치를 당겼다.
부아아아앙-
GAU-8의 30밀리 철갑탄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자, 미처 피하지 못한 하급 언데드들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하지만 부서진 언데드들의 빈자리는 곧 다른 언데드들로 채워졌다.
그럼에도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우리가 하는 건 몰이 사냥이니까.’
포탈을 향해 사라지는 언데드들을 내려다보며, 이안은 눈을 빛냈다.
***
수백, 수천의 병력을 한순간에 보낼 수 있는 포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궁극마법, 다크포탈.
마경을 지배하는 군주들 중에서도, 이 마법을 익힌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병력 이동에 궁극마법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많은 병력을 가진 군주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다크포탈을 지키던 마왕, 마르바스는 조금 전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리 지속시간에 제한이 있다지만, 언데드 드래곤의 힘 자체는 본신이 불러냈을 때와 동일하다.’
다른 마왕과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혁혁한 공을 세워왔던 언데드 드래곤이, 마왕토벌자의 손에 처참히 박살 났기 때문.
‘저런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혼자의 힘으로 마왕을 셋이나 토벌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마르바스에게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위 언데드들만 데려갈 수 있다면, 나머지는 조금 잃어도 상관없다.’
스켈레톤 따위의 하급 언데드를 만드는 데는 영혼이 필요하지 않다.
육체를 만들어 낼 재료만 충분하다면 마경에서도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존재들.
하지만, 제작할 때 강력한 힘을 가진 영혼을 필요로 하는 고위 언데드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들이야말로 죽은 자들의 왕, 마르바스의 진정한 힘.
‘아무리 마왕 토벌자라도, 내 영지까지 쳐들어올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마왕과 그 권속의 힘은 태어난 영지에서 더욱 강해진다.
적을 막아내기 위한 수 많은 안배들이 영지에 펼쳐지기도 했거니와, 대지에 깊게 뿌리박힌 고농도의 마기는 마족과 마수들에게 끊임없는 힘을 제공해주었으니까.
거기에.
‘내 영지는 마경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 덕택에, 인계를 침공하기엔 썩 좋지 않은 위치였다.
이번처럼 계약을 맺고 인계로 나선 게 아니라면, 자신의 영지를 가로막은 다른 마왕들의 영지를 가로 질러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단점은 자신의 영지를 침공하려는 적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마경이 통째로 저 괴물에게 당하지 않는 이상에야, 내가 당할 일은 없다.’
자신의 영지에 도달하고 싶다면, 그보다 먼저 자신의 앞에 선 마왕들과 싸워야 한다.
아무리 마왕토벌자의 힘이 강하다 한들, 마경 전체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을 터.
‘남은 건, 무사히 이 영혼을 들고 빠져나가는 것뿐.’
손에 쥔 순백의 영혼을 만지작거리며 마르바스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의문 하나가 남아있었다.
‘피해가 줄고 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군단을 향한 적의 공격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이나 좀비와 같은 하급 언데드들이야 꾸준히 죽어 나가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상급 언데드들의 피해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콰아아앙-
‘어쩌면, 놈의 힘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걸지 모르지.’
마르바스가 생각하기에, 상대가 소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그것 밖에 없었다.
공중에서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저 정체불명의 새는 분명 강했지만, 적의 병기인 페르소나는 마력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아무리 마왕토벌자라 한들, 그가 가진 마력은 공격을 시작할 때에 비하면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터.
물론, 상대가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지만.
‘저런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함정 따위에 의존할 리 없지.’
마경의 마족들을 지배하는 군주, 마왕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르바스는 고개를 젓고는, 이제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나간 포탈을 내려다봤다.
‘마왕토벌자, 안됐지만 이번엔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모든 상급 언데드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마르바스는 텅 비어버린 마법진을 향해 돌진했다.
정확히는, 마법진의 중앙에 자리 잡은 동굴 모양의 포탈을 향해.
쑤욱
거대한 포탈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꿀꺽 삼켜버렸고.
그와 동시에.
우우우웅
포탈을 감싸고 있던 마기는 그 빛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마르바스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파이톤, 준비는 됐지?”
흑마법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마경의 마족만이 아니란 사실.
[준비는 옛저녁에 끝났지. 좁아터져서 죽는 줄 알았네. 뭐 이따위로 만들었데?]
“원래 사람 타라고 만든 게 아니니까.”
전우의 툴툴거림을 들은 이안은 피식 웃고는 미미르가 조종하고 있을 AC-130을 바라봤다.
여전히 건쉽의 옆구리에선 쉴 새 없이 고폭탄과 기관포탄을 뿜어대고 있었고, 뒤쪽에선 수 많은 유도폭탄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럼, 간다!]
이번에 지상으로 투하될 것은 폭탄이 아니었다.
쐐애애액-
파이톤의 대답과 동시에, 건쉽의 꼬리로부터 몇 개의 인형이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중력의 힘이 더해진 그들의 낙하속도는 점점 빨라져 갔다.
하지만 파이톤과 함께 뛰어내린 자들은 모두, 마왕 디아블로의 피를 이은 자들.
“마법을 펼쳐!”
파이톤의 명령이 내려진 순간, 그들은 일제히 마법을 발동했다.
우우웅
3급마법, 리버스 그래비티.
대상에게 작용하는 중력을 역전시켜버리는 마법으로, 본래는 비행함을 공중으로 띄우는 데 사용되는 대단위 마법 중 하나지만.
슈우우우-
이들의 몸에 흐르는 마족의 피와 마법센스는 반중력 마법을 낙하산 대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버렸다.
“좋아, 성공이야.”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마법이 구현되자, 파이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 목표까지 내려간다!”
“예!”
염마단.
그, 백염의 파이톤이 직접 키워낸 그의 혈육들이자 가장 가까운 부하들은, 단장의 명령에 힘찬 목소리로 답하고는 마력을 움직였다.
이윽고.
타탓
순식간에 낙하속도를 줄여버린 그들이 발을 내딛은 곳은, 조금 전 마왕 마르바스가 빠져나갔던 다크포탈의 마법진 바로 위.
대부분의 언데드들은 이미 포탈을 통해 빠져나갔거나 건쉽의 포격에 소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진 주변에는 언데드들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파이톤은 염마단의 힘을 믿었다.
“절반은 언데드들을 정리하고, 나머지 절반은 날 따라와!”
“예!”
화르르륵
양 손에 청색 불꽃을 내뿜으며 달려드는 부하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파이톤은, 다음으로 마법진을 살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거랑 구조는 똑같네.”
그렇다면.
“움직여볼 만 하겠어.”
생각을 마친 파이톤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모두 위치로.”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은 염마단의 단원들은 사전에 얘기한 위치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마법진이 온전해서 다행이야.’
마법진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포탈 하나를 여는 마법이었지만, 그래도 대마법사의 궁극마법 중 하나.
마법진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면, 이렇게 빨리 궁극마법을 가동할 수는 없었겠지.
‘하마터면 쪽팔릴 뻔 했네. 연구도 다 안 끝났는데.’
이안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파이톤은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럼, 시작한다.”
마법진 위에 자리잡은 단원들에게 신호를 보낸 다음.
우우웅
백염의 파이톤은,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게, 진짜로 될 줄이야.’
마법진을 내려다본 이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본래 흑마법과 마기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마경의 군주였던 탈마공이라면, 마기 없이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가정에서 시작됐던 이안의 생각은 적중했고.
그 결과가 지금,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게 궁극마법이라니.’
거대한 동굴의 입구처럼 땅 위로 드러난 포탈.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린 궁극마법, 다크포탈을 이안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안, 미리 말해두지만 오래는 못 간다. 마기를 마력으로 대체하는 건 효율이 떨어져.”
그 꼴이 답답했는지, 파이톤이 그의 옆에서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독촉했다.
그와 함께 마법진을 움직인 염마단원 역시 상태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데?”
“5분, 아니 4분.”
이안이 추가병력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파이톤은 말을 마치곤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잘해야 나랑 저 하늘의 고양이, 그리고 염마단 정도.’
그리고, 고작 그 정도 병력만으로는 마왕의 영지를 공격하기에 한참 부족했으니까.
“충분하네.”
하지만 이안은 태평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파이톤은 그 말을 듣곤 어이없어했지만.
“어차피, 저 포탈엔 나 혼자 들어갈 거니까.”
“…미쳤어?”
이안의 그 다음 말을 들은 파이톤은 불같이 화를 냈다.
“네가 아무리 마왕 토벌자라고 해도, 혼자서 영지에 틀어박힌 마왕을 쳐부수겠다고? 지금 돌았어?”
친구이자 실험체의 자살계획을 들은 파이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 전에 선물 하나를 보내줘야겠지만.”
“…선물? 마왕을 포섭이라도 할 셈이야?”
뜬금없이 마왕에게 선물을 보낸다니.
이안의 말에 파이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비켜봐.”
이안은 파이톤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아앗
페르소나를 거친 황금빛 마력은 이안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이루었다.
곧.
“어….”
파이톤은 이안이 말한 ‘선물’을 보곤 입을 벌렸다.
이안이 구현해낸 것은, 집 한 채 만 한 크기의 쇠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통.
“이 정도 크기는 돼야, 답례로 충분하지 않겠어?”
친구의 반응을 보고 입꼬리를 올린 이안은, 원통을 가볍게 발로 차올렸다.
뻥
오러마스터의 강화된 각력에 의해 공중으로 떠오른 집채만 한 철통은, 정확히 거대한 포탈 안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안 선수, 골인, 골인입니다!”
포탈 안으로 빨려 들어간 철통을 확인한 이안은 기쁨의 세레모니를 펼쳤다.
그 모습을 미친놈 보듯 바라보던 파이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방금 포탈에 넣은 건 뭔데?”
그의 물음에, 이안은 한 마디를 남겼다.
“어머니.”
“…뭐?”
여기서 어머니가 왜 나온단 말인가.
마왕도 울고 갈 이안의 패드립을 들은 반마족은 당황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안은 오히려 파이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고.”
“모든 폭탄의 어머니?”
“모두에게 참된 가르침을 내리는 분이지.”
그리고 이번엔, 너희 차례다.
일렁이는 거대한 포탈을 바라보며, 이안은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