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만년빙하 너머의 대지는 녹지 않는다.
아인 연방에서 태어나 살아온 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진리이자 신앙.
인간보다 훨씬 강건한 육체를 지닌 마수들조차도 접근하기를 꺼려할 만큼 춥고 척박한 땅이 바로 만년빙하 너머다.
하지만.
콰과과광-
신마대전 이전. 아니, 어쩌면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존재했을 만년빙하는.
콰과광-
건쉽의 매서운 화력 앞에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죽음의 천사.
AC-130J 두 대가 쏟아내는 화력 앞에서는, 만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빙하라 한들 버틸 수 없었다.
그러한데.
키에에에-
만년 빙하 위를 건너던 언데드들이 포격을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콰과광-
마르콘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30밀리 기관포와 105밀리 고폭탄, 그리고 건쉽에 장비된 온갖 유도폭탄이 빙하 위에서 폭발할 때마다 수십, 수백의 언데드들이 소멸했다.
키에에에-
4급 마법에 버금가는 강력한 물리력에 신성력까지 섞이니, 스켈레톤이나 좀비와 같은 하급 언데드들은 재생조차 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대지를 집어삼키는 포격을 뒤집어쓰고도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영체로 이루어진 스펙터나 강한 저항력을 가진 데스나이트, 듀라한, 리치와 같은 고위급의 언데드들뿐.
파스스스
하지만 그들 역시,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포격을 무한히 버텨낼 수는 없었다.
설사 버텨냈다 한들, 녹아서 강이 되어버린 만년빙하에 휩쓸려나간 언데드들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
“저게 바로, 마왕토벌자의 힘인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 만년빙하와, 강으로 변해버린 빙하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가는 권속들을 바라보던 마르바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 아스타토트가 당할 만해.”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힘이다.
그의 육신이 화신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
하지만.
‘굳이 싸워줄 필요는 없지.’
손에 쥔 순백의 영혼을 잠시 내려다본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 강력한 포격을 견디지 못한 에리히만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대마법사의 영혼이라, 200년 만의 보물이 내 손에 들어왔어.”
죽은 자를 다루는 그에게, 강자의 영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혼령의 상태로도 이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는 영혼이라면.
“아크리치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겠지.”
대마법사의 힘을 부릴 수 있는 언데드가, 내 손에 들어왔다.
고작 스켈레톤 따위를 희생해서.
“흐흐, 흐흐흐.”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입에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목적을 달성한 그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
“뼈는 뼈로, 살점은 살점으로.”
자신의 영지와 이 얼어붙은 땅을 잇는 통로를 다시 열 동안, 시간을 버는 것.
“쓰러진 것들아.”
우웅
마르바스가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과 대지에 잠든 마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마왕은 능숙한 솜씨로 마기를 뭉쳐낸 다음,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빚어나가기 시작했다.
“너희의 적법한 주인이 명하오니.”
파아앗
주문이 이어지자, 포격에 얻어맞은 채 대지에 흩뿌려진 언데드들의 뼛조각과 살점들이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떠오른 시체 조각들이 움직인 곳은, 다름 아닌 마르바스가 빚어낸 마기의 덩어리.
뼛조각은 뭉쳐 거대한 골격을 이루어나갔고, 그 위를 찢겨져 나간 살덩이들이 덮었다.
콰과광-
마르바스가 주문을 영창하는 그 순간에도 포격은 계속 쏟아졌고, 언데드들은 끊임없이 학살당했지만.
그들의 유해는 곧 새롭게 만들어져가는 언데드의 재료가 될 뿐.
“이제 너희의 마지막 쓸모를 증명해라.”
영창을 마쳐나가는 마르바스의 앞에서 만들어져나가는 것은, 용이었다.
비늘 대신 누더기같은 피부가 전신을 뒤덮고, 마력이 가득 들어차 있어야 할 드래곤하트는 지독한 사기와 마기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분명, 그것은 용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화신의 힘으론 고작 이 정도인가.”
덩치만은 에인션트급의 고룡과 맞먹을 크기의 용을 마주한 마르바스는 맘에 들지 않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눈을 찌푸렸다.
본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했다면 영원히 살아 움직일 언데드 드래곤을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비루먹은 육신으로는 고작해야 용을 흉내낸 어보미네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
‘그것도, 고작해야 두 시간밖에 유지할 수 없는 반푼이지.’
하지만 마르바스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언데드 군단의 핵심전력이 다시 통로를 타고 영지로 되돌아가기에는.
“가라.”
마르바스는 시체 용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하늘로 올라가, 마왕토벌자의 날개를 단숨에 꺾어버려라.”
콰우우우
명령을 듣자마자, 용은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만년빙하.
아니, 이젠 만년강이라 불러야 할 곳의 하늘 어딘가.
[이안, 무언가가 우릴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포격을 위해 하늘을 맴돌던 이안의 머릿속에 미미르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는 당황하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마왕.
공중의 적을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자다.
머리 위에서 무차별적인 포격을 하루종일 때려대는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애당초 이안의 머릿속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안, 상대는 용이다. 그것도 에인션트급.]
‘뭐? 용이 왜 여기서 나와?’
미미르의 말에, 측면의 관제석에 앉아있던 이안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장착된 카메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누더기?“
미미르의 말대로, 용이 있었다.
아니, 용처럼 생긴 누더기가.
산산조각 난 솜인형을 어린아이가 얼기설기 이어붙인 것 마냥, 용의 전신에는 바느질 자국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안은 그 누더기 용이 뿜어내는 마기를 감지하고는 혀를 찼다.
“못해도 에인션트급은 되겠는데.”
AC-130은 분명, 비행전열함의 마력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비교적 약한 적을 상대로 할 때의 이야기.
‘대마법사 놈이야, 포격을 몽땅 맞아준 덕에 쉽게 처리했지만.’
단순히 포격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직접 하늘로 날아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30밀리 기관포와 그리핀 공대지미사일, 그리고 105밀리 곡사포.
분명 강력한 무장들이긴 했지만, 오러마스터와 비견될 만한 강자에게 들이밀기엔 부족한 병기였다.
그렇다 해서, 항공폭탄으로 날아다니는 용을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
콰우우-
시끄러운 비행기 엔진소리 너머로, 마기 섞인 놈의 울음소리가 이안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즉사했을 만큼 강력한 저주가 담긴 울음소리였지만.
“젠장, 안 그래도 시끄러워 죽겠는데.”
이안에겐 조금 불쾌한 소음일 뿐.
잠시 짜증을 낸 이안은 미미르를 향해 의념을 보냈다.
‘미미르.’
[그래, 목표를 변경하겠다. 우선은 저 용부터 떨어뜨려야 하니….]
이안이 무슨 말을 할 지 예상한 미미르는 기체를 움직이려 했지만.
‘아니, 넌 하던 대로 계속 지상의 언데드들을 공격해.’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저 놈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이안….]
‘넌 계획대로 움직여. 이런 상황도 작전에 포함되어 있었잖아?’
당황한 미미르를 향해 명령을 내린 이안은, 점점 가까워져 가는 용의 기워 붙인 머리를 보곤 피식 웃었다.
“만들려면 좀 잘 만들지, 무슨 누더기를 만들어 놓은 거야?”
콰우우-
비행기 안에 있는 이안의 비웃음을 듣기라도 한 걸까.
언데드 드래곤이 울음소리를 내뿜자 이안은 입꼬리를 스윽 올리고는.
우우웅
자신이 타고 있던 AC-130의 구현을 해제했다.
쐐애애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날개를 잃은 그의 몸이 지상을 향해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콰우우우-
재빨리 팔다리를 휘저어 중심을 잡은 이안은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언데드 드래곤과 눈을 마주했다.
놈의 눈에서 전해져오는 진한 사기가 그의 몸을 기분 나쁘게 훑고 지나갔다.
콰우-
마치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입을 쩌억 벌린 언데드 드래곤은 한참 위에서 떨어지는 이안을 향해 전속력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안이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강자라 할 지라도, 거대한 시체용의 위장에 들어간다면 무사하긴 힘들 터.
하지만.
씨익
이안은 웃었다.
“누더기 주제에 성질은.”
상대가 뱃속의 약점을 훤히 드러낸 지금이야말로.
단숨에 끝내버리기 좋은 때였으니까.
우웅
이안은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움직였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두 대의 건쉽으로 쉴 새 없이 포격을 해댔으니 마력을 거의 소진한 것도 당연한 일.
그럼에도 이안은 마력을 소모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역시, 차오르고 있어.'
마도위성 아스가르드.
그가 페르소나의 특성, 흡마를 통해 전환해놓은 무궁한 마력이 그대로 이안의 몸 안에 흘러 들어갔다.
파아앗
순식간에 마력을 몸속에 다시 가득 채운 그의 몸을, 또 다른 강철의 새가 감싸 안았다.
하늘을 나는 총, A-10 썬더볼트II.
그 별명에 걸맞게 거대한 30mm 기관포, GAU-8을 랜스처럼 장비한 공격기가 언데드 드래곤의 입을 향해 기수를 틀었다.
‘목표는 저 누더기 용.’
하지만.
하늘을 나는 총이 쏘아낸 것은 총탄이 아니었다.
‘덩치가 크면, 이런 게 좋단 말이지.’
딸깍.
육안으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체 용의 아가리를 스윽 훑은 이안은, 조종간의 버튼을 눌렀다.
순간.
콰아아-
기체의 날개 아래에 달려있던 미사일이 불꽃을 뿜으며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AGM-65 메버릭.
GAU-8과 함께 A-10이 탱크 킬러라는 별명을 갖게 해 준 공대지미사일은, 곧 쩌억 벌린 드래곤의 아가리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콰아아앙!
언데드 드래곤의 뱃속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용의 몸이 공중에서 휘청거렸다.
콰우우우우-
언데드임에도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뭔지도 모르고 미사일을 꿀꺽 삼켜버린 시체용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언데드 드래곤은 알지 못했다.
똑같은 고통을 안겨줄 미사일이, 아직 세 발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직, 세 발 남았다.”
딸깍“
고통스러워하는 용을 향해 영화의 명대사를 날린 이안이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쐐애애액-
두 번째 메버릭이 고통스러워하는 용의 아가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