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케니스의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말대로, 일곱 용과 마족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
‘확실한 명분이 생긴 거지.’
여섯 공작과의 회담에서 마족 얘기를 끼워 넣은 것은, 이안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장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이안의 궤변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인계의 한복판에 마족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른 공작들 역시 지금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테니까.
단지.
“근데, 그 마족은 도대체 어디서 기어 들어온 거야?”
이안은 그 의문을 풀 수 없었다.
마족이 인계로, 그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아인연합에 잠입할 방법은 그가 알기로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해로를 이용하는 것.’
하지만 대륙의 해로는 사실상 막혀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륙을 둘러싼 바다를 제 성역처럼 사용하는 바다의 신, 넵튠이 마족들에게 길을 열어줄 리 만무했으니까.
그래도, 두 번째 방법보다는 말이 되었다.
‘공국을 통과해서 인계로 넘어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다른 여섯 공작들에게 그런 말을 꺼낸다면, 당장 칼부터 날아올 게 뻔했다.
“놈들의 위치는 알고 있나?”
“알고 있었다면 진작에 말했겠지.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야.”
케니스의 답은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안은 입맛을 다시고는 생각에 잠겼다.
‘결국, 알아볼 방법은 하나뿐인가.’
스윽
결정을 내린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뭐야, 갑자기?”
“프레이야.”
묘인족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시스템의 제어정령을 불러냈다.
[부르셨나요, 관리자님!]
“저, 정령?”
“프레이야, 고철 덩어리를 고치려면 마력이 얼마나 더 필요한 거야?”
난데없이 허공에서 나타난 정령에 놀란 케니스를 뒤로하고, 이안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 그게 말이죠.]
이안의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일까.
프레이야는 당황한 듯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프레이야?”
이안이 재차 묻고서야, 프레이야는 이안에게 답할 수 있었다.
[위성의 자가수복기능을 가동하려면, 못해도 2,000만 갈리움은 필요해요.]
그리고, 프레이야가 말한 수치는 이안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뭐, 2,000만?”
오러의 궁극에 도달한 존재인 오러마스터.
그중에서도 마력을 많이 축적한 편에 속하는 그가 가진 마력도 30만 갈리움이 채 되지 않는다.
1급 비행전열함, 골든 라이온이 운용하는 마력의 수십 배를 가뿐히 뛰어넘는 양.
프레이야가 말한 수치가 얼마나 큰 지 잘 알고 있는 이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왕들한테서 마석이라도 빼놓을 걸 그랬네.”
지난 전투에서 소멸시킨 두 명의 마왕을 떠올린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마왕들은 마석은커녕, 시체 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소멸해버렸으니 이안의 말은 그저 한탄일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마왕 토벌을 다시 진행할 수도 없지 않은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니, 원.’
결국, 이안이 취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안, 아슈타르 혼자서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하다. 연방은 이미 항복을 선언했어. 네게 부담이 너무 클 거다.]
애옹….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간파한 미미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연방을 지금 공격한다 해서 놈들이 숨을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지 않느냐. 놈들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는 게 먼저다.]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후우.
이안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하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와, 고양이가 말을 하네? 우리 동족은 아닌 것 같은데….”
[난 고양이가 아니다, 묘인족!]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보지 그래? 네 꼬라지가 뭐로 보이는 지.”
[나는 신검 레온하르트에 깃든 인공자아….]
애오옹!
캬옹!
“둘 다 닥쳐봐, 좀.”
두 고양이의 기싸움을 보다 못한 이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안의 목소리에 담긴 무시무시한 기운에, 묘인족과 고양이는 순간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눈치도 없는 두 고양이들을 잠시 노려본 이안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곤 생각을 이어나갔다.
‘마력이 모자라면 채워야지. 어떻게? 마력을 불어넣어서. 마력은 어디서 구하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은?’
결국.
“정보.”
[이안 폰 아슈타르]
[페르소나명: 미미르]
[등급: 영웅]
[마력: 290,000]
[개방 필요마력: 20,000]
[증폭률: 5000%]
[특성]
[장비교체][장전][과부하][보조인격][파편화][그림자의 화신][통신]
[신검의기운][흡마][폭주][위성제어]
“이거….”
페르소나의 정보창을 한 번 훑어본 이안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단지.
“가능하려나…?”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을 뿐.
“프레이야.”
[네!]
“저 고물의 기능 중에, 마력의 전송과 저장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
[네, 관리자님. 지난번 만들어내신 분신도 마력의 전송기능을 활용한 기술이죠.]
그녀는 이안의 물음에 친절히 답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이렇게 하자고.”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
아슈타르 공작령의 수도, 슈바이크.
아니, 슈바이크였던 곳은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었다.
마력엔진의 폭주로 인해 소멸해버린 성과 그 주변에 남은 것은, 마경으로부터 스멀스멀 넘어오는 마기들 뿐.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곳의 마기를 제거하려면 족히 백 년은 걸릴 거다.]
마기에 의해 침식되어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땅을 바라보곤 미미르가 혀를 찼다.
두 마왕을 소멸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지만, 수백 년을 함께해 온 도시의 폐허가 주는 공허함이 그의 마음을 콕콕 찔러왔다.
“그래,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말이야.”
하지만 이안은 미미르의 마음에 공감해주는 대신, 보라색 대지를 발로 밟았다.
스으으
그의 발이 마기에 의해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마기에 의한 침식.
이대로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이안의 다리는 못 쓰게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이럴 줄 알고 분신으로 찾아온 거니까.’
우웅
“오라, 미미르.”
신검의 기운이 섞인 오러에 의해 황금빛으로 빛나는 권총을 손에 쥔 채, 이안은 페르소나의 시동어를 외쳤다.
파앗!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이안의 몸을 수많은 전투장비들이 빈틈없이 감쌌다. 곧, 이안에게 마왕토벌자의 위명을 쥐여준 영웅급의 페르소나, 미미르.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병기가 아니었다.
“이건 또 오랜만에 잡아보네.”
삽.
그것도, 보통 삽이 아닌 팔뚝만한 길이의 야전삽이었다.
살기 위해 미친듯이 비트를 파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이안은 잠시 감회어린 눈빛을 보낸 다음.
푸욱!
푸르딩딩하게 멍든 대지를 향해 꽂아 넣었다.
“후우.”
삽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야전삽을 깊게 박아넣은 이안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지금은 본신이 아닌 마력으로 이루어진 분신의 상태.
소모되는 마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높았지만, 이안이 안전하게 계획을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윽고.
“과부하, 흡마.”
삽을 힘껏 쥔 이안의 입에서, 두 가지 특성을 깨워내는 시동어가 발동되었다.
파아앗
황금색으로 물든 오러가 이안의 몸을 감싸 안았다.
쩌저적
마력으로 만들어낸 육체가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그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우웅
흡마.
마족에게 검을 꽂을 때, 마족의 마기를 마력으로 전환하는 특성.
레온하르트가 본래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지만, 실제로 활용하는 데에는 꽤나 문제가 많은 능력이었다.
상대인 마족의 몸에 검을 계속 꽂고 있어야 한다는 제약은 물론, 마기를 흡수할 때 육체의 부담을 주기까지.
‘실전이었다면 써먹지도 못할 기술이지. 왜 달려있는지도 모를 쓰레기.’
그 때문에, 전대 신검공인 에드너도 마왕과의 전투에선 이 기술을 아예 배제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되잖아?’
이안의 상대는, 마기를 듬뿍 머금은 대지.
이안의 삽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는 상대에게 삽을 꽂아 넣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 않은가.
스으으-
이안이 흡마의 특성을 개방하자, 삽자루를 타고 보라색 마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마기를 듬뿍 빨아들인 그의 팔은 중독이라도 된 것마냥 푸르딩딩하게 멍들어있었지만.
우웅
흡마의 특성은, 이안이 빨아들인 마기를 신속하게 정제해내기 시작했다.
곧, 빨아들인 마기는 마력이 되어 이안의 몸속을 휘돌고는 위성과 연결되어 마력 통로를 따라 빠져나갔다.
‘젠장, 정수기 필터가 된 기분인데.’
온몸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고통에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제한 마력의 일부를 육체를 수복하는 데 돌리고는 있었지만, 기분 나쁜 통증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고통을 참아낸 보람은 확실했다.
[관리자님, 마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차오르고 있어요!]
위성의 상태를 확인한 프레이야가 놀라 소리쳤다.
[100, 110, 120…. 이대로 간다면 2,000만 갈리움을 모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그녀의 말 대로라면, 이안의 분신이 부서지기 전에 모든 마력을 채워 넣은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이안이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마기를 흡수하고 있던 그때.
[이안, 멈춰라.]
미미르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북서방향 3.1킬로미터에서 강한 마기가 느껴진다. 마왕급이야.]
“뭐?”
쑥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안은 마기를 흡수하는 것을 중단하고는 삽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온다.’
곧, 이안 역시 미미르가 말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오러를 불어넣고서야 간신히 보일 거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끈적하다 싶을 만큼 농도 짙은 마기.
곧, 이안의 존재를 눈치챈 마왕이 저 멀리에서 우뚝 멈췄다.
“나약한 인간이 주제도 모르고 홀로 찾아왔구나.”
두 마왕이 소멸한 뒤, 빈 영토를 차지한 마왕, 아스타토트는 이안의 분신이 가진 힘을 느끼곤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느끼기에, 상대가 가진 힘은, 고작해야 오러익스퍼트 상급의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얼굴을 모르는 그는 알지 못했다.
“야.”
상대는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영웅급 페르소나를 손에 쥔 대륙의 강자이며.
“한 번만 말한다.”
이미 두 명의 마왕을 소멸시킨 마왕 토벌자라는 사실을.
“뭐…?”
“지금 당장 양 손을 들고 무릎을 꿇어. 시키는 대로 하면 목숨은 붙여줄지도 모르니까.”
우웅
당황한 마왕을 앞에 둔 채 장난스레 두 손을 들어 보인 이안은.
손에 쥔 삽을 표적지시기로 변환시키고는, 마왕을 향해 겨누었다.
싸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