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133화 (134/224)

#135화

‘여긴?’

기절한 묘인족, 케니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일은 주변을 살피는 것이었다.

‘어디야?’

그녀가 갇혀있던 방은 분명 아니었다.

하얀 벽면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은, 뭐라 써 있는지 읽기도 힘든 크기의 글자들이 빼곡히 쓰여진 종이들.

그리고.

“이건 별 쓸모없어 보이고, 이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서류뭉치를 뒤지는 인간의 뒷모습.

순간.

“어, 언데드!”

조금 전, 잘려 나간 인간의 머리가 말하는 끔찍한 광경을 떠올린 그녀가 펄쩍 뛰어올랐다.

아니, 뛰어오르려 했다.

그러나 몸을 단단히 얽매고 있는 밧줄 때문에, 그녀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리고.

“뭐야, 꺠어 났어?”

언데드가 등 뒤를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제, 젠장….”

의자에 묶인 채 앞으로 고꾸라진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언데드의 시선을 느끼고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보려 애를 썼지만, 마법으로 강화된 밧줄은 묘인족이 가진 뛰어난 유연성과 근력으로도 풀지 못할 만큼 질기고 견고했다.

“소용없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언데드는 몸부림을 치는 케니스를 잠시 노려보곤, 다시 서류를 뒤지는 작업에 몰두했다.

‘뭐 하는 녀석이지?’

그녀는 상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리히만의 저택에 침입해 서류를 뒤적거리는 것을 볼 때, 상대는 분명 에리히만의 정적일 터.

‘하지만 언데드는 마족의 권속이지.’

연합공국도 아니고, 마경과는 한참 떨어진 연방에 올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케니스는 바닥에 엎어진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언데드의 차림새를 살폈다.

그리고.

‘저건, 아슈타르의 문장이잖아?’

마족으로부터 인계를 지키는 연합공국의 일원인 아슈타르가, 마족의 일부인 언데드를 부린다?

사내의 허리춤에 새겨진 사자의 문장을 확인한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도.

“뭐야, 쓸만한 건 하나도 없잖아?”

저택을 돌며 수집한 서류를 모두 확인한 이안은 인상을 썼다.

분명 일곱 용의 거점이라해서 들어왔건만.

‘죄다 에리히만에 관련된 자료뿐이야.’

저택의 주인이니 에리히만 의원에 대한 자료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곱 용과의 연관성을 유추할 만한 자료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짐작 가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싹 청소해놓은 모양인데.’

그가 저택에 도착한 지 채 두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올 거란 사실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아니, 그게 맞을지도.’

그렇다면, 이 빈집에서 건질만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봐.”

의자에 꽁꽁 묶여있는 묘인족.

“우리 대화를 좀 나눠보는 게 어때?”

지하에 감금되어있던 그녀라면, 집주인과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미안하지만, 언데드와 할 말 따위는 없는데.”

하지만 이미 이안을 마족의 하수인이라 단정 지은 케니스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언데드? 아까부터 그게 뭔 개소리야?”

“목이 잘려 나가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인간은 언데드 뿐이니까.”

어이가 없어진 이안이 되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묘인의 차가운 눈초리뿐.

“마족의 끄나풀에게 할 말은 없다.”

“아니, 뭐 이런….”

단번에 철벽을 쳐버린 그녀를 본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보아하니 너도 힘 좀 쓰는 것 같은데, 나한테 무슨 기운이 느껴지는지 정돈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순리를 거스른 존재가 지니고 있을 기운이야 뻔하….”

케니스는 이안의 말을 그대로 무시하려 했지만.

“음?”

이안의 말을 듣고 보니, 그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언데드라면 절대로 느껴지지 않아야 할 힘.

“…신성력이라고?”

미약하지만, 신성력의 향기가 이안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케니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그럼 내가 언데드가 아니란 건 증명됐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난 이안 폰 아슈타르. 네 이름은?”

질문을 시작했다.

“이, 이안?”

하지만 케니스는 대답 대신 입을 쩍 벌렸다.

“마왕토벌자 이안이라고?”

마왕토벌자.

제국과 달리 연합공국의 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연방이었지만, 홀로 마왕 둘을 소멸시킨 이안에 대한 정보는 그녀에게 전달되어있었으니까.

단지.

“얼굴이 좀 다른데…?”

그녀가 알고 있던 이안은 뒤룩뒤룩 살찐 돼지였다는 게 문제였을 뿐.

누가 봐도 강건한 육체를 지닌 사내와 초상화 속 돼지 간의 괴리감에 케니스는 어리둥절해했다.

“믿건 말건 그건 네 맘이고. 이제 내가 답을 들을 차례인 것 같은데?”

하지만 이안은 더 이상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묘인족은 의심스런 눈으로 잠시 이안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케니스. 연방의회의 의장이다. 아니, 이었지.”

“의장? 그거, 꽤 높은 자리 아닌가?”

아니, 꽤 높은 수준이 아니다.

연방의 최고 권력기관인 연방의회의 의장은, 말 그대로 연방에서 가장 높은 자.

제국이라면 황제, 공국이라면 일곱 공작과 같은 직위였으니까.

“의장이 지하에 갇혀있는데도 아무 이야기가 없다니, 연방도 알 만 하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안이 코웃음쳤다. 그 말에 케니스가 이를 악물었다.

“아마 외부엔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겠지. 에리히만 그놈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짓이니까. 놈이 이렇게 본색을 드러낼 줄이야….”

에리히만.

저택주인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만에 대해서 좀 알고 있나?”

이안이 아는 건 여기 집주인에, 대마법사이자 연방의회의 의원이라는 사실 뿐.

하지만 케니스가 답할 기회는 없었다.

“내 집을 부순 쥐새끼가 여기 있었군.”

문 밖에서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퓨퓨퓻

이안은 지체없이 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쏘아져 나간 9mm파라블럼탄이 외알안경을 낀 노인의 몸뚱이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하지만.

티티티팅

탄환은 적의 몸뚱이를 파고든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튕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노인을 둘러싼 푸른 빛의 보호막.

“이런, 쥐새끼가 아니라 사자였군.”

갑작스런 이안의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낸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안 폰 아슈타르 공작께서 몸소 여기까지 찾아와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안의 얼굴을 알아본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케니스가 노인의 정체를 확인하곤 경악했다.

“에리히만…!”

불타는 저택의 주인.

그리고, 오러마스터와 동급의 힘을 지닌 3급의 대마법사.

“이런, 의장께서도 이곳에 계실 줄이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챈 에리히만은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무덤에 계셔야 할 분이 올라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몸을 지탱하던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콰앙!

힘없는 노인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간 것은, 평범한 사람 한 둘 정도는 단숨에 터뜨려버릴 수 있는 위력의 충격파.

범위는 좁았지만, 충격파는 자신이 지나간 곳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믹서기에 갈아버린 것처럼 갈가리 찢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충격파의 파괴행위를 지켜본 노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셨다.

“그 짧은 순간에 의장까지 데리고 충격파를 피해낼 줄이야.”

이안은 어느새, 충격파가 쏘아져 나갈 방향을 예측하곤 피해냈으니까.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단숨에 끝장냈을 텐데 말이야. 운 좋은 줄 알라고, 노인네.”

충격파를 피해냈음에도, 이안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파편들이 그의 몸 이곳저곳에 박혀있었다.

“젠장, 아프긴 더럽게 아프네.”

칼로 전신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고통에 이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 에리히만은 손에 든 지팡이를 이안에게 겨누었다.

“약자들이나 하는 말을 마왕토벌자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네만.”

“약자를 상대할 땐, 약자의 마음으로 생각해야하는 법이거든. 역지사지라고 알까 모르겠네.”

에리히만이 놀리듯 말헀지만, 이안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군.”

하지만 에리히만은 이안의 태도에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의 계획이 쉽게 성공할 것 같으니 말야.”

모든 일이, 자신이 뜻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계획?”

노인이 흘린 말에서 실마리를 얻은 이안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하지만 에리히만은 대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곧 죽을 사람에게 더 해줄 말은 없네.”

그의 눈에, 아슈타르 공작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죽을 만큼 큰 부상.

소설 속 악당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의장.”

그의 생각과 달리.

“재주껏 살아 남아봐.”

이안에겐 아직, 비장의 무기가 남아있었다.

“과부하, 폭주.”

이안의 입에서, 페르소나의 두 특성을 발동시키는 시동어가 튀어나온 순간.

파아아앗

빈사상태에 빠진 이안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몸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쩌저적

피부가 갈라지면서 금색의 기운이 몸 밖으로 새어 나갔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

우웅

하지만 이안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병기를 소환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허공에 둥둥 떠서 주인의 발사만을 기다리고 있는 AGM-114 헬파이어 미사일.

“잠깐 잠이나 자라고.”

쐐애액

미사일이 꽁무니에서 불꽃을 토해낸 순간.

푸스스스

이안의 몸뚱이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

알자스성에 위치한 이안의 집무실.

“허억!”

연방의 이안이 먼지가 되어버린 것과, 알자스의 이안이 눈을 뜬 것은 거의 동시였다.

[괜찮나, 이안?]

언제 연방에 있었냐는 듯, 검은 고양이 미미르가 깨어난 이안 위에 올라탔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빌어먹을. 이 느낌을 또 경험할 줄이야.”

이미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해본 이안은, 조금 전의 끔찍한 느낌을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성을 이용해 분신을 만들어낸 것까진 좋았는데 말이지.’

분신이 느끼는 감각까지 그대로 전달될 줄은 몰랐으니까.

온몸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경험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프레이야.”

[네, 관리자님!]

“지금 당장, 리아나 주변을 살펴봐.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리아나.

구현의 방과 시스템이 위치한 공국 소유의 섬.

부름과 동시에 나타난 시스템의 제어정령을 향해, 이안은 명령을 내리며 눈을 빛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