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마르센 제국의 수도, 테라로사의 흙과 돌은 화염룡의 힘 때문에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
그것은, 황궁 지하에 축조된 거대한 황실비고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화르륵-
루비처럼 빛나던 황실비고의 벽과 바닥은, 온통 시꺼먼 그을음과 노란 화염으로 뒤덮여있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참룡공 뢰베르 폰 구스타프 공작은, 죽어가고 있었다.
페르소나가 해제되고, 원래대로 돌아온 용인의 몸엔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수십의 구멍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이…나를….”
한쪽 눈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은 짧았다.
“잘.”
타아앙!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이안은 대답과 동시에 황금색으로 물든 글록의 방아쇠를 당겼다.
퍽
열여섯 발의 헬파이어 미사일에 유린당한 뢰베르에겐, 권총 탄환을 막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금색 오러를 머금은 9mm 파라블럼 탄환이 그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겼군. 진짜로 이겼어.”
불길 너머에서 이안을 향해 다가오며, 멤피스 후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찰나의 순간, 공작이 마스터의 벽을 깨부술 줄 감히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정말이지 놀랍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 공작.”
물론, 후작은 이안이 300년 동안 봉인 안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난 댁이 더 놀라운데. 마스터의 벽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넘은 거야?”
300년의 수련 끝에 간신히 벽을 넘어선 이안의 눈엔, 채 백 년도 걸리지 않아 오러 마스터의 벽을 넘어선 멤피스가 괴물처럼 보였다.
“이미 벽을 넘어놓고선, 겸손이 지나치군.”
이안이 질린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멤피스는 무슨 말을 하냐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래서 재능있는 놈들은….”
할 말이 없어진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멤피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문제?”
“자네의 그 병기에, 오러를 담아내는 문제 말일세. 호기심이 생겨서.”
탄환에 오러를 싣고자 이안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직접 봐왔던 후작이다.
당연히,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잘.”
하지만 이안이 대답해 줄 의무는 없었다.
“그러지 말고….”
“댁도 나한테 말해 준 적 없잖아?”
무려 200년 만에 얻어낸 깨달음이다.
어차피 총기가 없으면 써먹지도 못할 깨달음이겠지만, 굳이 자신의 것을 알려줄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스승인데 너무하는군 그래.”
“스승이면 스승답게 제자의 앞날에 축복이나 빌어달라고.”
둘은 언제 큰 싸움이 있었냐는 듯, 쓰러진 참룡공 앞에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안! 멤피스 후작!”
저 멀리서, 차기 황태자가 될 사람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후작이 알론소를 향해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전하, 존체는 무사하십니까?”
“나는 괜찮네. 형님은?”
“황태자 전하께선….”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황태자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아, 아아아.”
황태자, 피에르는 동공 없는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보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런. 황태자 전하!”
피에르의 상태를 확인한 멤피스는 즉각 달려가 황태자의 뺨을 툭툭 쳤지만, 그의 정신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넋을 놔버렸어. 재수 없으면 평생 저 신세일걸.”
극도의 공포와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결과.
하지만 이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뭐, 본인으로선 저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이안, 그게 무슨 소리냐.”
그 말을 들은 알론소가 눈을 부라렸다.
“우리 형님이 미쳐버렸어야 한단 소리냐, 지금?”
뒤늦게 내려와 전후 사정을 모르는 알론소에게, 이안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반역자로 평생을 갇혀 지낼 건데, 어차피 제정신으로는 못 있을 거 아냐?”
“바, 반역자라니. 그게 무슨….”
이안의 말을 들은 알론소가 당황해 목소리를 떨었다. 뒤따라온 루미너스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께선, 메이라우스 님을 해하려 하셨어.”
“…메이라우스 님을?”
“그래.”
“그럴 리가….”
알론소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형이 끌고 온 고철덩이나 보고 말하지 그래?”
그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이안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이제는 산산이 녹아내리고 부서져 버린 고대 병기, 고렘의 잔해가 그곳에 있었다.
“저건….”
“내가 신나게 두들겨 팼지. 수호룡을 노리러 오는 줄은 나도 몰랐지만.”
“형님, 어째서….”
이안의 말을 들은 알론소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수호룡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은 황족이라도 씻어낼 수 없는 죄.
이게 사실이라면, 그의 형은 유폐를 피할 수 없으리라.
“뭐, 황태자 자리가 아까웠나 보지.”
이안은 신파극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받을 것도 다 받았으니까. 미미르?”
애오옹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은 그는 미미르를 어깨에 올렸다.
“어딜 가는 겐가?”
그의 등 뒤에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받아낼 빚이 좀 있어서.”
대답과 함께, 시체가 되어버린 참룡공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교수의 저택.
“돌아온 인원은?”
노인의 물음에, 제자인 리자드맨은 손가락 하나를 폈다.
“한 명입니다. 다른 한 명은 연결이 끊긴 뒤로 아직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다만, 곧 연락이 닿는 대로….”
“앞으로도 들려오지 않을 걸세. 이제 신경 쓰지 말게나.”
도마뱀 인간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젓고는 수정구에 재차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을 머금은 수정구슬 위로 떠 오른 것은, 황실비고 지하에 파견되었던 고렘이 전송해 온 영상.
키이이잉-
그 영상에 등장한 것은, 생전 처음 보는 강철의 괴물이었다.
사막의 모래 빛으로 칠해진 괴물의 주둥이에 달린 것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기다란 장창.
그리고.
콰아앙!
끼기기긱
괴물이 문 장창에서 굉음과 함께 화염이 솟았다. 그와 동시에 고렘의 시야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굉음이 울릴 때마다 고렘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치지지직
고렘의 머리에 창을 들이댄 괴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끊어졌다.
“흠.”
영상이 끝나고도 교수는 한참 동안 수정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스무 번은 넘게 본 영상이었지만, 고렘이 보내온 영상은 그만큼 놀라웠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수정구에 재차 마력을 불어넣으며 교수가 물었다. 리자드맨은 막힘없이 답했다.
“신검공이 다루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페르소나의 힘이지 않겠습니까.”
연합 공국에 제국과 맞먹는 힘을 가져다준 강력한 병기.
그 수장 중 하나인 신검공이 다루는 병기라면, 당연히 페르소나이지 않겠는가.
단지.
“대륙의 전설 중, 저렇게 생긴 괴물은 처음 봤습니다. 신검공이 검이 아니라 괴물을 다룬다는 것도 그렇고….”
그 괴물의 정체도, 신검공의 의도도 알 수 없었을 뿐.
하지만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본 적이 있네.”
“예?”
그 말을 들은 리자드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수는 영상의 강철 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네, 본부에 방문해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본부에 방문했을 때였지.”
리자드맨이 고개를 젓자, 옛일을 회상하던 교수의 눈이 아련해졌다.
“본부의 벽에는 신기한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었지. 단순한 스케치일 뿐이었지만 대륙, 아니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그림들이었어.”
그래, 그랬지.
분명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그림 중 하나가 저 괴물과 많이 닮았네.”
교수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리자드맨은 놀라 꼬리로 바닥을 쳤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본부에 걸려있는 그림이라면….”
“맞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외알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확실해졌군.”
이제까진 의심일 뿐이었지만, 영상의 강철 괴물은 의심을 사실로 만드는 명확한 증거였다.
“우리 새로운 신검공이, 관리자의 권한을 부린다는 걸 말야.”
관리자의 권한.
조직이 그토록 원해왔던 것 중 하나.
교수의 말을 들은 도마뱀의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관리자의 권한이라니요. 그건 우리 조직에서도 얻지 못한 게 아닙니까?”
“최소한, 제작자와 연관이 있는 자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네.”
그렇다면, 교수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당분간 자리를 좀 비우겠네. 내가 없는 동안은, 자네가 내 대신일세.”
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스승이 선반 위에 놓인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자,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갑자기 어디로….”
도마뱀의 물음에, 짐을 챙기던 교수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본부에 갈 일이 생겨서 말이네.”
40년 만에.
***
“당신은 누구지?”
구스타프 공작령의 관문 도시, 타이런트의 정문을 지키던 디트리히는 수상한 차림의 사내를 향해 창을 겨눴다.
애오옹
온몸을 로브로 뒤집어쓴 사내의 오른 어깨엔 커다란 자루가 매어져 있었다. 그의 발치에서 검은 고양이가 구슬피 울어댔다.
“누구냐니깐?”
사내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자, 디트리히는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창을 들이댔다.
사내가 자루를 집어 던진 것은 그때였다.
“뭐, 뭐야!”
사내가 자루를 던지자, 당황한 디트리히는 창으로 자루를 힘껏 쳐냈다.
쿵
창에 맞고 날아간 자루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충격에,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내용물이 드러났다.
자루 안의 내용물을 알아본 디트리히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고, 공작 전하?”
뢰베르 폰 구스타프.
구스타프 공작가의 주인이자 용의 피를 각성해 용인의 영지에 오른 자가, 왜 저 자루에서 나온단 말인가.
그제야 사내는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참룡공은 내 손으로 끝냈다.”
후드를 벗자 드러난 것은, 금발 머리의 사내.
이안이었다.
“공작 전하!”
“전하께서 시해당하셨다!”
비상임을 알리는 경보음과 함께 수많은 인간들이 창을 꼬나쥔 채 정문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하지만 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 모든 것은 이안이 만들어 낸 무대였으니까.
“너희에게도, 날 끝장낼 기회를 줄게.”
참룡공의 시신을 가져온 것도, 앞에서 당당히 선 것도.
구스타프와의 해묵은 원한을 풀기 위해 준비한 무대일 뿐.
“신검공! 신검공이 나타났다!”
“시해범을 죽여라!”
“전쟁이다!”
성벽 위로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들 앞에서.
“오라.”
이안은 천천히 외쳤다.
“미미르.”
이계의 병기를 불러내는 주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