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부자든 거지든, 개미건 코끼리건 시간의 흐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이 세계의 법칙.
하지만.
“허.”
지금의 이안에겐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뭐야, 이게?”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은 다음, 고개를 든 이안은 놀라 눈을 끔뻑였다.
거대한 용의 뿔에서 뿜어진 푸른 번개도, 그에 맞선 인간의 새하얀 오러블레이드도.
그리고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과 바닥에서 튀어 오르려는 돌조각도.
“미친.”
그와 미미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시간과 함께 멈춰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안의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시간의 봉인이다. 수호룡이 널 위해 만들어낸 물건이지.]
“용도는 뭐, 뒤통수 때리기 쪽인가? 멈춰있으니 때리긴 쉽겠네.”
말을 마친 이안은 힘겹게 몸을 일으킨 다음 페르소나의 힘을 이끌어내려 했다.
“…윽.”
하지만 마력을 거의 소진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가슴의 둔탁한 통증뿐.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마력으로는,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것조차 벅찼다.
‘마력이 더 필요해.’
눈앞에 적을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미미르는 그 모습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이 아공간은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
“뭔 소리야, 그게? 평행우주, 뭐 그런 건가?”
[그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더라도 현실의 존재는 멀쩡할 거라더군.]
미미르의 말이 맞다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건 참룡공을 쓰러트릴 수는 없다는 뜻.
“그럼, 아무 의미도 없잖아.”
파아앗
마력을 모두 소진한 그의 몸에서 페르소나가 사라졌다. 이안은 찡그린 얼굴로 용과 후작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여기서 마력이라도 회복한 다음에 싸우란 건가?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충분하다 한들, 마력을 담아낼 그릇이 좁다는 게 문제였다.
이안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마력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의 크기를 키워 더욱 강력한 무기를 구현해내는 것.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 여기서 주구장창 수련이라도 해서 마스터의 경지에라도 오르라는 건가, 뭐?”
마스터의 경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신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도 마스터의 벽을 넘지 못해 늙어 죽은 자들은 하늘의 별만큼 많았고, 이안의 재능은 출중했지만 거기까지니까.
‘지금 당장은 어렵지.’
아무리 빠르게 벽을 넘는다 한들, 이안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선 족히 수십 년은 필요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음.]
미미르는 이안의 말을 듣곤 침묵했다.
침묵의 의미를 깨달은 이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진심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다고, 마스터의 벽을 넘으라는 게 정상적인 발상은 아닌 것 같은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참룡공을 이길 수 있다. 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스승만 있다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미미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다 치고, 스승? 내 스승은 저기 얼어붙어 있는데.”
말을 마친 이안은 손가락으로 후작을 가리켰지만, 고양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나, 그리고 본신인 신검 레온하르트는 지금까지 수십 명의 마스터와 함께 해왔다. 그들이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함께 들어왔고.]
“잠깐, 잠깐만.”
이야기가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이안은 말을 끊었다.
미미르의 말 대로라면.
“그러면, 네가 내 스승이 되겠다고?”
급하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지만, 고양이를 스승으로 삼는 것은 너무 나간 게 아닌가.
하지만 미미르는 자신 있게 말했다.
[후작도 그러지 않았나. 마스터까지 올라가기 위해선 영감과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마스터의 경지는 결국 오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의 차이.
[그 정도라면, 신검으로 살아온 나 역시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걸 믿어야 하나, 하.”
애오옹
이안은 자신만 믿으라는 표정으로 바닥에 선 미미르를 영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물론, 이안이 딱히 다른 대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진작 도와주던가.”
[나보단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가 직접 알려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살다 살다, 고양이한테 뭘 배울 줄이야.”
[이 모습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나는 신검 레온하르트를 계승한….]
이안의 한탄을 들은 미미르가 발끈했지만.
애오오옹!
그의 눈엔 그저 검은 고양이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안에겐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난 이곳에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는 건데? 봉인이 풀리기 전엔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야 할 거 아냐.”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 봉인이 풀린다면, 어차피 같은 결말을 맞이할 뿐이다.
봉인의 제한 시간을 알아야, 그에 맞는 계획을 짤 수 있지 않겠는가.
이안의 생각은 나름 합리적이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300년.]
“…뭐?”
아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300년이다.]
미미르가 재차 강조했지만, 이안은아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300년.
세기가 세 번 바뀔 시간 동안, 이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네 육체의 시간은 이미 멈춰있는 상태니, 수명이 줄어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미미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 개새끼들이.”
이안은 분노를 터트렸다.
***
이안이 미미르를 찢어 죽일 뻔한 지 200년이 흘렀다.
우우웅
하지만 이안의 모습은 200년 전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수백 년간 쌓아온 용의 언령이 그의 수명마저 멈춰놓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쾅
“…젠장”
마스터의 벽을 넘기 위한 이안의 여정 역시, 200년 전보다 별달리 진척되지 않았단 게 문제였지만.
“마력은 이제 넘쳐흐르는데. 어디가 잘못된 거야?”
손에서 폭발하고 남은 탄환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이안은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을 본 미미르가 입을 열었다.
[단순히 마력량의 문제가 아니라, 마력을 오러로 변환하는 방식의 문제라고 몇 번을 말했지 않나.]
“그게 말처럼 되면, 내가 200년 동안 이러고 있겠어?”
아니, 200년이 맞기는 한 걸까.
햇빛조차 들지 않는 이 빌어먹을 지하공간에선 시간을 짐작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봉인의 힘이 남은 정도를 대충 계산해서 남은 햇수를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말을 들은 미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100년이지 않나. 첫 100년은 빼야지.]
“네가 뭔데 그걸 빼라 마라야.”
그 말에 이안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이 봉인된 공간에 들어온 첫 백 년간은, 심장에 만들어진 마력의 그릇을 최대한 천천히 키워나가는 데 집중했다.
‘결국 오러를 만들어내는 것은 마력이니까.’
그리고 300년이란 시간은 인간의 기준에선 무한에 가까운 시간.
마력의 그릇을 키워내다 보면 언젠가는 오러마스터의 경지로 가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이안이 전략을 바꾼 것은 100년을 넘게 허비한 뒤였다.
“정보.”
[이안 아슈타르]
[페르소나명: 미미르]
[등급: 환수]
[마력: 290,000]
[개방 필요마력: 2,000]
[증폭률: 2000%]
[특성]
[장비교체][장전][과부하][보조인격][파편화][그림자의 화신][통신]
[신검의 기운][흡마][폭주]
“빌어먹게도 많이 쌓았네.”
200년 동안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이안의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그의 심장에 모인 마력량은 비행전열함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그만큼 마력의 그릇과 심장 역시 강한 내구력을 갖췄지만.
[오러를 제대로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네가 원하는 걸 이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게 말처럼 되면 내가 200년 동안 이러고 있었겠냐니까? 말이라고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냐?”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200년.
한 국가가 세워졌다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만큼을 수련으로만 보내왔다.
그런데도 성과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 이안의 맥이 빠질 수밖에.
정신력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이안이었기에 이 정도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벌써 미쳐버렸으리라.
“100년 안엔 될 수 있을까, 젠장.”
이미 봉인의 제한 시간은 삼분지 일도 남지 않았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을 쏟아부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아무리 강철의 정신력을 가진 그라도 초조해질 수밖에.
‘이대론, 이대론….’
너무나 긴 세월에 지쳐버린 그가 정신을 놓아버리려고 할 때.
툭 툭
[이안.]
발치를 두드리는 무언가를 느낀 이안은 다시 정신을 차리곤 아래를 내려다봤다.
미미르가 앞발로 자신의 구두를 할퀴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그래. 또 이러면 안 되지.”
짝 짝
정신을 차린 이안은 고개를 흔들며 뺨을 때렸다.
미미르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즉에 정신을 놓고 미쳐버렸을 터.
뚜벅 뚜벅
마음을 단단히 먹은 이안은 어디론가 걸어나갔다.
그가 아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황실비고 안뿐.
그중, 이안이 가장 자주 찾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여전히 압도적이군.]
번개를 내뿜는 용과 오러블레이드를 뿜어내는 오러마스터의 전투장면을 보며 미미르는 감탄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잘 만든 조형물이라며 극찬했을 것이다.
“200년쯤 됐으면, 쓰러질 때도 되지 않았나?”
당사자인 이안의 입에선 한숨만 나올 뿐이었지만.
하지만 그가 여길 찾은 이유는 전투를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우리 스승님의 오러블레이드는 여전히 변함이 없단 말이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이안은 수천, 수만 번은 봐왔을 후작의 오러블레이드를 살폈다.
오러마스터가 오러블레이드를 뿜어내는 순간을 분석한다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의 일환이었지만.
“역시, 아무리 봐도 모르겠단 말이지.”
지구의 과학자가 외계인의 우주선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분석과 시뮬레이션을 거쳤음에도, 이안은 오러블레이드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었다.
“도대체 뭘까….”
말 그대로, 거대한 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있는 것 같은 막막함에,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그래, 스승님?”
인형처럼 굳어버린 후작의 표정을 보며, 이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총탄을 손에 쥐고 휘두를 수도 없고….”
오러를 탄두에만 내뿜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야 아니다.
하지만, 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탄환들을 쥐고 휘두를 바엔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순간.
“…어?”
이안은 그토록 원하던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