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용인(龍人).
자신이 받아들인 용의 피를 완전히 깨워내어, 용이 가진 모든 특성을 자신의 몸에 불어넣은 존재.
“용인을 본 소감이 어떠냐, 신검.”
온몸이 비늘로 덮인, 인간보다는 리자드맨에 가까워 보이는 모습의 존재가 이안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죽기 전에 소감 한마디 내뱉을 시간 정돈 주지.”
그가 가진 용의 피는 에인션트급.
강력한 피에 담긴 모든 힘을 깨워낸 순간, 그는 어지간한 오러마스터와 비견할 만한 힘을 낼 수 있었다.
“뭐, 어쩌라고.”
하지만 이안은 겁에 질리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인간의 몸으론 안될 것 같아서 도망친 거 아냐? 인간을 포기한 주제에 말이 많아.”
이안은 참룡공, 뢰베르의 꼬락서니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필 용도 못생긴 놈으로 골라서는, 쯔쯔.”
이안의 비아냥이 계속되자, 참지 못한 용의 눈이 검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입을 놀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고룡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그에게 이 정도의 거리는 지척이나 다름없다.
파지지직
그의 전신에 솟아난 푸른 비늘이 하얗게 달아오르면서 스파크가 튀었다.
“글쎄.”
하지만 이안은 동요하지 않고 왼손을 들어 등 뒤를 가리켰다.
“힘자랑할 시간에, 뒤나 보는 게 어때?”
하지만 뢰베르는 코웃음 쳤다.
“용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나에게, 그런 잔재주를….”
손가락을 등 뒤로 가리킨 것은, 누가 봐도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수작.
이안의 손가락을 무시한 뢰베르가 힘을 내뿜으려 했다.
그러나.
‘아니, 어느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뢰베르는 급히 몸을 돌렸다.
까앙!
용의 권능을 모두 끌어낸 그의 팔에 솟아난 비늘이, 순백의 오러블레이드와 맞붙었다.
“네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용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러블레이드를 뿜어낼 수 있는 것은, 제국에 오직 한 사람뿐.
‘멤피스 반 바르테온 후작.’
마르센 제국과 황실의 수호자를 그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뢰베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황실비고엔 황족의 피를 가진 자만이 들어올 수 있을텐데….”
어떻게, 마르세니아의 피가 흐르지 않는 후작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의문을 해소할 시간은 없었다.
채채채챙
대답 대신 후작은 검을 휘둘렀다.
무쇠도 두 동강 내 버릴 수 있는 위력의 오러블레이드가, 눈 깜짝할 새 수십 번 번쩍였다.
“소용없다.”
그렇지만, 상대는 뇌전룡의 힘을 몸에 받아들인 용인.
까가가강!
뇌전의 힘을 머금어 백색으로 달아오른 비늘과 그의 손에 들린 단창은 후작의 오러블레이드를 막아내기에 충분했다.
“네놈의 검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숨 쉴 틈도 없이 날아오는 검을 차례차례 막아낸 용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쐐애애액-
그의 등판을 향해 길쭉한 미사일이 날아오기 전에는.
콰앙-
LAHAT.
초소형 대전차미사일이 폭발하면서 메탈제트가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컥.”
순간, 강력한 충격을 받은 용인의 몸이 휘청했다.
후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채채챙
순식간에 뢰베르의 비늘 위로 수십 개의 상처가 생겨났다.
하지만 후작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얕아.’
오러블레이드로 베었음에도 고작 생채기 정도만을 낼 수 있다니.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채챙, 챙!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후작은 상대의 방어를 파훼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반응장갑인가?’
그것은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사일이 도달하기 전에 폭발했어.’
폭발력으로 성형작약탄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탈제트를 흩어놓는 것은, 반응장갑의 원리와 완전히 동일했으니까.
그 대가로 비늘 하나가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
‘재생되는 반응장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성능이야.’
다시 복구된 하얀 빛을 본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대전차화기로는 뚫어내기 곤란한 장갑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차포를 사용하기엔 후작과 용인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다.
‘전술을 바꾼다.’
우우웅
이안은 결심했다.
무반동포를 흩어버린 그가 구현해낸 것은, 사람 머리 정도 되는 지름의 녹색 원통.
두근
‘마력이 슬슬 달리는데.’
녹색 원통을 어깨에 짊어진 이안은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입술을 짓씹었지만, 멈출 시간은 없었다.
딸깍
자신의 머리보다 거대한 조준경에 얼굴을 파묻은 이안이 방아쇠를 당긴 순간.
콰아아-
녹색 원통에서 한 발의 미사일이 쏘아져 나갔다.
쾅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간 미사일이 용인의 비늘과 마주친 순간, 미사일의 앞부분에 부착된 탄두가 폭발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콰과광!
뒤이어 폭발한 미사일. 동시에 쏘아져 나간 메탈제트가 강화된 비늘을 꿰뚫었다.
“크, 크헉. 어떻게….”
이번엔 휘청이는 것으론 끝나지 않았다.
127mm 구경의 미사일에 담긴 고온의 액체금속은, 비늘을 뚫고도 모자라 용인의 복부를 관통해버렸다.
뢰베르는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맞아 빈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흐압!”
후작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푸푸푹!
참룡공의 비늘이 꿰뚫리면서 생겨난 틈새에, 셀 수 없이 많은 검격이 작렬했다.
비늘에 모든 방어력을 집중한 용인의 육체는 그 검을 막아낼 수 없었다.
“크, 크흐흐.”
뢰베르의 상태는 처참했다.
쉴 새 없이 헤집어진 복부는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내상을 입은 그의 입에선 연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크흐흐흐, 쿨럭.”
그럼에도 그의 입가에선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허억, 허억.”
털썩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이안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피를 토하며 이안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본 뢰베르의 미소가 진해졌다.
“이게, 전부냐?”
곧 죽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참룡공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사실 뿐.
“그렇다면, 너흰 나를 이길 수 없다.”
우우웅
말을 마친 참룡공은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 잠들어있던 마력과 오러, 그리고 용의 피가 들끓어 올랐다.
“오라.”
그의 입에서 한마디 말이 흘러나온 순간.
“그렇게 놔둘 성싶더냐!”
참룡공이 무엇을 하려는 지 눈치챈 멤피스는 곧장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늦었다.
“레메네온.”
연합공국의 칠영웅 중 하나인 그의 입에서.
영웅급 페르소나의 봉인을 푸는 주문이 완성된 순간.
파아앗
단창에서 뿜어진 거대한 마력이 공작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내 황실비고의 천장에 이를 만큼 거대해진 마력이, 그 형태를 이룬 순간.
“용이라니.”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쿠아마린처럼 푸른 비늘과 머리에 우뚝 솟은 뿔을 제외한다면, 메이라우스와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용.
-한때 최강의 용이라 불린 레메네온이다. 너희가 이길 가능성은 없어.
쿠르릉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 만큼 높이 달린 용의 머리가 그 입을 열자, 지하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강도새끼 주제에.”
심장 어림을 움켜쥔 이안이 작게 비아냥거렸지만, 용의 시선은 이미 그를 벗어나 있었다.
-오러마스터는, 과연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파직 파지직
푸른 용이 오만한 어조로 내려다보며 스파크를 튀기던 그때.
[이안.]
‘미미르?’
황녀에게 딸려 보냈던 미미르의 말이 이안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미미르가 다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조금만 버텨라. 알론소가 합세했다.]
‘알론소?’
[후작과 함께 들어왔더군. 방금 합류했다.]
그제야, 이안은 후작이 어떻게 황실비고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설마, 알론소가 에인션트급의 용을 이길 수 있단 개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알론소 역시 의식을 통해 용의 피를 깨워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용의 피를 완전히 각성한 용인과 비교하면 이제야 걸음마를 뗀 아기에 불과한 것도 사실.
이미, 이안은 알론소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었다.
[있다, 방법이.]
“뭔데?”
하지만 미미르가 말을 멈추지 않자, 이안은 일단 들어나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네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방법이.]
미미르의 말을 들은 순간, 이안은 희망을 발견했다.
***
-시간의 봉인이야.
“시간의, 봉인 말입니까?”
조그마한 수정구를 받아든 알론소는 고개를 들어 황가의 수호룡을 바라봤다. 봉인구 안에서 수호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봉인구의 일부를 뜯어낸 다음, 내 언령을 더해 만들어냈어. 원랜 이러려고 쓴 게 아닌데… 하아.
쩌적
그녀가 한숨을 쉼과 동시에, 봉인구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메이라우스님!”
-걱정 마. 이건 조금 지나면 복구될 거니까.
알론소와 루미너스가 놀라 외치자, 메이라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 언령은 복구할 수 없지만. 그래도 300년 넘게 공들인 건데… 으으. 좀 있으면 나갈 수 있나 싶더니만.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뼈아픈 손해긴 했지만, 그녀가 가진 권능은 지금이 너무나 큰 위협이라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봐, 고양이.
애오옹?
[무슨 일인가, 화염룡.]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용의 목소리에,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얼른 뛰어가서 네 주인한테 전해.
메이라우스는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러고도 마스터의 경지에 못 오르면, 내가 죽여버릴 거라고.
[…알았다.]
애오오옹….
고룡의 살벌한 눈빛 앞에서, 미미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용과 인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덩치만 놓고 본다면, 둘의 승산은 굳이 비교해 볼 필요조차 없어 보였지만.
우우웅
인간이 뿜어내는 오러의 검, 오러블레이드는 그 승산을 절반까지 끌어올렸다.
-쥐새끼같은 놈…!
파지지직
뇌전룡 레메네온으로 화한 뢰베르는 덩치답지 않게 빠른 움직임으로 멤피스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 오러마스터.
“덩치가 큰 만큼, 빈틈도 크구나!”
후작은 순수한 오러의 힘으로 강화된 육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용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어렵겠어.’
체급의 차이가 너무 컸다.
아무리 멤피스가 마스터급의 강자라지만, 상대 역시 영웅급 페르소나를 부리는 강자.
둘의 힘이 비슷하다면, 더욱 강인하고 거대한 육체를 가진 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빈틈을 노린다면 승산은 있다.’
후작에게 남은 방법은 그저, 상대가 실수해 주기만을 바라며 버티는 것뿐.
그리고.
[이안, 이걸 받아라.]
퉷
말을 마친 미미르가 입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토해냈다.
“구슬?”
난데없이 튀어나온 구슬을 본 이안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지만, 미미르는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간의 봉인이다. 네 손이 닿는 순간 봉인이 발동할 거다.]
“최소한 그게 뭔지는 설명해 줘야….”
[설명은 발동한 다음에 해 주마. 이대로 가면 후작의 패배가 확실해.]
미미르의 표정을 읽은 이안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구슬과 맞닿은 순간.
우웅
수정구슬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