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참룡공 뢰베르 폰 구스타프.
“지금, 뭐라고 했나?”
그는 실로 오랜만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눈앞에 나타난 요정 여인의 환영 때문.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말을 마친 요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선 서늘한 안광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언제부터 공국의 공작들이 서로한테 훈수를 둬 왔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낸 참룡공은 코웃음 쳤다.
마족의 발호를 막아낸다는 공동의 목표만 없었다면 적이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공국을 다스리는 일곱 공작 중 하나이자 용인인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대륙에 없었다.
물론.
-심안공 말이 맞아. 근래 구스타프의 행동은 좀 지나친 감이 있지.
-자네가 젊은 신검공과 반목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네만, 그것도 공국의 안위를 해하지 않는 선에서일세.
다른 공작들이 합세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신들도 우려하고 있네. 특히 빛의 신 마르콘이 말이야.
말을 마친 성광공이 안타까운 눈으로 뢰베르를 바라봤다.
-계속 무리한 행동을 감행할 생각이라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네.
“엘로임, 구스타프를 우습게 보고 있구나. 그런 협박이나 하고 있다니.”
-협박인지 아닌지는 얼마든지 확인시켜줄 수 있네. 자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큭.”
까득
성광공의 말에 뢰베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리 참룡공가가 용의 힘을 부린다지만, 다섯의 공작가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하루, 하루면 모든 것이 끝날 거다.”
참룡공은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뢰베르의 말을 들은 성광공, 엘로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심에 말하는 것이네만.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게, 뢰베르.
-괜히 황제 자리 따위에 눈이 멀어선, 그깟 제국이 뭐가 중요하다고.
-본분을 잊지 말게나, 참룡공. 젊은 신검공의 헌신을 좀 본받아보게나.
파파팟
말을 마친 공작들의 환영이 하나둘 꺼지듯 사라졌다.
어느새 제국의 황궁 안에 홀로 남은 참룡공은, 결국 화를 참지 못했다.
“빌어먹을 자식들.”
쨍그랑!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최고급 다기들이 깨져나갔지만, 그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가야겠어.”
황실비고로 내려간다면, 분명 신검공이 그곳에 있을 터.
“누굴 본받으라고? 빌어먹을 대머리 자식.”
환세공의 말을 떠올린 순간.
우웅
참룡공은 자신이 가진 진정한 힘을 끌어냈다.
꾸득 꾸드득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피부에 비늘이 자라났다. 그의 붉은 머리 아래에 자리한 이마에 기다란 뿔이 솟았다.
우우웅
용인(龍人).
그의 몸속에 잠든 고룡의 피를 깨워낸 그가 옆에 세워둔 단창을 집어 들었다.
“부디, 살아 있어라.”
아슈타르.
분노한 참룡공의 눈동자가, 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
고렘.
복잡한 마법술식으로 움직이는 고대의 전투 인형.
그 튼튼함은 능히 오러 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를 견뎌낼 수 있고, 전투능력은 어지간한 오러사용자를 뛰어넘는 강철의 괴물.
하지만.
“무, 무슨 마법이지?”
고렘을 부리는 마법사는 눈앞의 참상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쐐애애액-
콰아앙!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날아드는 무언가가, 달려나가는 고렘을 하나씩 침묵시키고 있었다.
쾅, 콰앙!
어지간한 마법은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내구력을 지닌 것이 고렘이다.
하지만 상대의 마법은 그 고렘의 몸뚱이에 바람구멍을 숭숭 뚫어냈다.
끼기기긱
한두 번 맞았다면 모를까, 벌집이 되어버린 고렘에 새겨진 마법술식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것이냐!”
멈춰선 고렘을 보고 당황한 것은 마법사만이 아니었다.
“분명,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 않았나!”
제국의 황태자, 피에르가 옆에 선 마법사를 향해 성을 냈다.
고렘 하나가 바닥에 쓰러질 때마다, 피에르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사이자 일곱 용의 특급 요원, 레미노프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십시오, 황태자 전하.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강력한 병기라 하지 않았나? 그 고대의 병기들이 병든 말처럼 쓰러지고 있는데, 걱정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가?”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피에르다.
뜻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그 기회가 날아가게 생겼으니, 그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저길 보십시오.”
레미노프는 설명 대신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황태자는.
“저건…?”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끼리리릭
정체불명의 마법에 당해 볼썽사납게 쓰러져있던 고렘들이. 마력을 뿜어내며 한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뭉쳐진 고렘의 잔해들은 마치 눈덩이처럼 서로 엉겨 붙었다.
한 고렘이 팔의 형태를 취하면, 다른 고렘은 다리의 형태로 변해 몸통 역할을 하는 고렘에 부착되었다.
이윽고, 등장한 것은.
기이잉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사와 군마.
적게 잡아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고렘을 마주한 황태자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기가스…?”
제국에서도 아직 시험단계에 불과한 강철의 거인이, 어째서 연방의 손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황태자의 말을 들은 요원은 코웃음 쳤다.
“기가스? 아, 그 제국의 강철 거인 말입니까? 아슈타르 공작에게 처참하게 당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그걸 어찌!”
요원의 입에서 제국의 기밀 중의 기밀이 나오자, 황태자는 경악했다.
하지만 레미노프는 개의치 않았다.
“저희는 모든 것을 보고 듣는 자들입니다. 그 거대한 거인이 쓰러지는 걸 못 볼 리 없지요.”
우웅
놀란 황태자를 놔둔 채, 레미노프는 손에 쥔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순간.
쿠궁 쿠궁
명령을 전달받은 군마가 강철 기사를 태운 채 네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아슈타르 공작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들어갔다.
오러 마스터라도 쉽사리 막아낼 수 없는 강철 거인.
‘과연, 그대가 이 거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피할 공간도 없는 이 좁은 곳에서?’
통로를 가득 메운 고렘의 등을 보며, 레미노프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허, 참.”
이안은 이미 오래전, 보행병기를 상대해 봤고.
“얘네는 학습능력이 없나?”
파훼법 역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우우웅
이안은 망설임 없이 새로운 병기를 구현해냈다. 그의 몸을 감싼 빛이 광활한 복도 전체를 가득 메웠다.
이윽고 등장한 것은.
키이이잉-
최강의 전차, M1에이브람스.
가스터빈 엔진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에이브람스의 기다란 주포가 철마(鐵馬)를 향했다.
‘지금.’
딸깍
이안은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포성과 함께 천장에서 붉은 흙먼지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쐐애애액
포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과 함께 쏘아져 나간 것은 기다란 금속화살 모양의 날개안정철갑탄.
콰아앙!
열화우라늄으로 만들어진 화살은 초음속으로 날아가선, 곧장 철마의 다리 하나를 꿰뚫어버렸다.
쾅
네발짐승이 한 다리를 잃고도 멀쩡히 뛰어다닐 수 있을 리 없다.
끼이이익-
강철기사를 태운 채 한쪽으로 기울어진 철마는 그대로 고꾸라진 채 앞으로 미끄러졌다.
키잉 키이잉
기사와 말이 버둥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관성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끼기긱
바닥에 쓰러진 두 고렘은, 철판 긁는 쇳소리와 함께 한참을 미끄러지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위치는 이안이 구현해 낸 전차의 바로 앞.
“나이스 타이밍.”
조준경에 눈을 갖다댄 이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짐과 동시에.
콰아앙!
에이브람스의 주포는 그대로 강철기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파지지직
기사의 머리가 달려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푸른색의 스파크뿐.
“아, 아니, 저게. 왜.”
그 모습을 본 요원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자신의, 그리고 조직의 비밀무기 중 하나인 고렘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겐 아직, 마지막 무기가 남아 있었다.
“이걸 쓰게 될 줄이야.”
쨍그랑!
이를 악문 요원은 곧장 손에 쥔 수정구를 깨부쉈다.
‘돈 주고도 못 구할 유물인데, 교수가 한소리 하겠군.’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가기엔 들어간 비용이 너무나 컸다.
‘아무리 못해도, 공작의 목 정돈 가져가야겠지.’
수정구에 들어 있던 것은, 고렘들을 움직이는 마력의 원천.
우우웅
수정구에 담겨있던 마력이 퍼져나가면서, 마법사의 주변을 파랗게 물들였다.
‘반드시 끝장내주마.’
온몸이 파랗게 물들어가며, 요원은 다짐했다.
그러나.
쾅
그는 다짐을 실행할 수 없었다.
상체 없이 하체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흐억!”
핏물을 뒤집어쓴 황태자가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오러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그였지만, 온종일 황실 안에서만 지내온 그가 피를 뒤집어쓸 일이 언제 있겠는가.
쾅 쾅
“아, 아….”
몇 번의 폭음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지만, 이미 패닉상태에 빠진 황태자의 귀엔 들려오지 않았다.
“뭐야, 얘 정신 놨네?”
거대고렘에게 확인사살까지 끝마친 이안은 전차의 구현을 해제하고는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오, 오라버니?”
뒤에서 따라온 루미너스는 피에르를 알아보고는 경악했다.
황실비고에 잠입해 자신들을 공격한 것이, 다름 아닌 제국의 황태자라니.
“어, 어째서….”
“아, 아, 아.”
“지금은 대화가 안 되겠는데.”
정신을 놓아버린 황태자를 본 이안은 고개를 젓고는 손날을 휘둘렀다.
퍽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황태자가 뒷목을 가격당하곤 피 구덩이 안으로 쓰러졌다.
“무, 무슨 짓이에요? 어떻게, 제국의 황태자를….”
“곧 반역자로 전직할 사람 아냐? 그리고, 배후를 캐야 할 거 아냐.”
루미너스가 놀라 외쳤지만 이안은 태연히 말하곤 핏덩이, 아니 황태자를 어깨에 둘러업었다.
‘연방, 아니면 참룡공의 짓일 게 뻔하다만.’
정신을 차린 황태자에게 직접, 사실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쿠르르릉
[이안.]
“어, 들었어.”
누군가가, 또다시 비고 안에 들어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안은 어깨에 멘 황태자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이봐, 황녀.”
“제 이름은 황녀가 아니라 루미너스 폰 마르세니아….”
“잔말 말고.”
루미너스가 발끈했지만, 이안은 신경쓰지 않았다.
“뒤로 가서 용이랑 같이 숨어 있어. 아니면.”
우우웅
“저 용인을 어떻게 잡을지, 둘이 머리라도 맞대보던가.”
살가죽 대신 비늘로 전신을 덮은 참룡공을 향해 무반동포를 겨눈 채.
딸깍
이안은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