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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121화 (122/224)

#121화

민혁은 죽을 때까지 혼자였다.

천애 고아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정부 기관에 입양돼 특수훈련을 받아온 그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곤 땀내 나는 전우들과 피 흘리는 적뿐.

당연히, 결혼이나 가족과 같은 평범한 삶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청혼이라고? 하필 여기서?’

루미너스에게 생전 처음 프러포즈를 받은 그는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이안의 묘한 눈빛을 느낀 황녀가 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보, 본녀가 그대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져 있….”

“그 입 다물어요.”

황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낀 이안은 농담을 그만두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식힌 황녀가 말을 이었다.

“그저, 지금의 본녀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에요.”

“나와 결혼하는 게?”

“제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니까요.”

말을 마친 루미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황위는 제 손을 떠난 지 오래예요. 알론소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황녀이자 황제의 누이인 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뿐이죠.”

얼굴도 모르는 제국의 귀족과 혼인하거나, 조그만 궁에 유폐되어 남은 삶을 보내거나.

“마왕토벌자이자 아슈타르의 공작인 당신과 혼인한다면, 최소한 혼인상대는 제 의지대로 고른 셈이니까요.”

“그리고, 나를 이용해 제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겠다?”

황녀의 속셈을 파악한 이안은 피식, 웃었다.

제국의 유력자 중 하나가 될 이안과 피를 섞게 된다면, 그녀의 후계는 다시 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맞아요.”

루미너스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생각 없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이안은, 곧 고개를 저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이 나이에 결혼이라니, 참.”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명백한 거절.

[인간들은 보통 네 나이쯤 이미 결혼을 마치고 아이를 갖지 않나?]

미미르가 이상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봤지만, 이안은 무시하며 루미너스를 바라봤다.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러던가. 맘대로 하라고.”

하지만 루미너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애써 미소 짓는 그녀를 향해,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럼, 황실비고는 어떻게 들어가야 하지?”

황실비고 자체가 이안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수백 년 동안 대륙의 절반을 지배해 온 제국의 황실이 가진 보물창고라면, 도움이 될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겠지.’

화기에 오러를 발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거라면, 이안은 뭐든 써먹을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황녀는 대답 대신 검지를 들었다.

“그 전에, 서약을 하나 해줘야겠어요.”

“서약?”

이안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비고 안에서 보고들은 어떠한 것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요.”

“까다롭기는.”

말과는 달리, 이미 루미너스가 할 말을 예상하고 있었던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지만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귀찮게 구는 황녀를 향해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뭐? 자꾸 귀찮게 이것저것 달 생각이면 그냥….”

“황족이 아닌 자가 황실비고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황족을 동반해야 해요.”

말을 마친 루미너스의 손가락이, 황녀 자신을 향했다.

“비고에 내려갈 때는, 본녀와 함께 가는 거로 하죠.”

“난 또, 뭐라고.”

그녀의 말을 들은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달랐다.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황녀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본 이안의 표정이 굳어 들어갔다.

***

어느 저택의 방 안.

손때묻은 가구들로 가득한 방 한가운데엔, 구김 하나 없이 잘 다려진 정복을 차려입은 외알 안경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노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구스타프 공작가의 지배자인 참룡공의 환영.

“자네가 이리도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네만. 벌써 제국을 손에 넣기라도 한 겐가?”

통신마법기에서 떠오른 참룡공의 환영을 마주한 노인의 첫 마디는, 빈정거림이었다.

하지만 참룡공은 감정의 동요를 내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곧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지.

“호오, 그게 정말인가? 진작 이렇게 해줬으면 좀 좋았겠는가. 하마터면 자네와 구스타프의 능력을 의심할 뻔했군.”

-후우….

노인이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자, 뢰베르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국 내에서 나와 우리 가문의 입지가 매우 곤란해진 상황이야. 아무래도, 내가 너무 손해인 것 같은데.

아쉬운 것은 뢰베르였으니까.

곤란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겐 눈앞에서 빈정거리는 노인의 힘이 꼭 필요했다.

“이제와서 거래를 뒤집을 셈이라면, 너무 늦었다는 말 밖에는 해 줄 게 없군.”

-물론, 거래는 그대로 지속될 것이다. 단지.

“단지?”

-나 역시,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데.

뢰베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은 짚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찍었다.

“안타깝네만, 그건 들어줄 수 없네.”

노인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의 표정에선 불쾌감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리에게, 그녀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녀는 노인이. 아니, 노인이 속한 조직이 추구하는 목표 중 하나였으니까.

-그건 나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지. 내가 필요한 것과 그대가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르니,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뢰베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없다면, 그 아슈타르놈과 마스터를 상대할 방법은 없다. 그 사실은 그쪽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지금, 우리의 힘을 무시하는 것인가?”

뢰베르의 말에 노인은 언짢음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환영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마침 열쇠도 구해놓은 참이니,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을 뿐이네.

노인은 한동안 입을 다물곤 생각에 잠겼다.

툭 툭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손익을 따져보기를 수차례.

“…동지들 몇을 보내도록 하지. 자네가 만족할만한 자들로.”

계산을 끝낸 노인은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뢰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그녀와 함께 오도록 하지.

말을 마친 참룡공의 환영이 꺼지듯 사라졌다.

“글쎄, 과연 그렇게 될는지….”

삐익

홀로 남은 노인은 중얼거리며 탁자 위의 버튼을 눌렀다.

“스승님, 부르셨습니까.”

버튼을 누른지 일 분이 지나지 않아, 리자드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만한 동지 몇이 필요하네, 특급으로. 오늘 중으로 제국에 보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특급,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노인의 말을 들은 리자드맨은 경악했다.

특급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조직 내에서도 많지 않다.

강력한 힘을 가진 만큼,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에만 투입되는 자들.

리자드맨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건 내가 동지들에게 직접 보내도록 하겠네. 자네도 조직의 율법을 알고 있지 않나?”

그 말에 노인은 외알 안경을 고쳐 쓰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너무 놀란 나머지.”

스승이 불쾌해한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도마뱀은 고개를 숙였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일세. 그게 반복되어선 곤란하겠지만.”

노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연신 고개를 숙이던 리자드맨은, 품속에서 두툼한 종이뭉치를 꺼내 들었다.

“말씀하셨던 아슈타르 공작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고맙네.”

리자드맨이 바친 종이뭉치를 받아들자마자, 노인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채 오 분도 지나기 전, 노인은 보고서를 전부 읽고는.

“흐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닐세. 단지….”

제자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동지들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일세.”

고민에 빠진 그의 지팡이가 툭, 툭 바닥을 두들겼다.

***

황실비고.

대륙의 삼분지 일을 지배하는 마르센 제국이 여태껏 모아온 금은보화와 신병이기 중에서도, 최고의 보물들만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곳.

하지만 황실의 금고에 발을 들여놓은 이안의 첫 감상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빨갛네.”

제도를 둘러싼 성벽의 색과 마찬가지로, 비고를 구성하는 벽의 색은 온통 시뻘겠다.

그 말에 루미너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화염룡의 힘 때문이에요.”

“화염룡?”

“지금은 봉인되어 힘을 회복하고 계시지만, 메이라우스 님의 힘은 아직 이 땅에 남아 제국을 지키고 있거든요.”

말을 마친 그녀는 경외하는 눈으로 붉은 벽을 훑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군. 말 그대로 색깔만 남은 찌꺼기이긴 하지만.]

애오옹

그 말에 미미르가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이안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물들은 언제 보러 갈 수 있는 건데?”

그에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루미너스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보러 갈 필요는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약속은 지켜야지.”

“본녀를 따라오다 보면, 곧 알게 될 거에요.”

말을 마친 황녀가 그의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순간, 이안은 그녀가 혹시 딴생각을 품은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뒤통수를 칠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행동과 눈빛, 표정 어디에서도 무언가를 숨기는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뭔가 있는데… 모르겠단 말이지.’

그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선, 그녀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안.]

어깨에서 쉬고 있던 미미르가 이안을 부른 것은 그때였다.

‘왜?’

[강렬한 기운이 저 앞에서 느껴지고 있다.]

심상찮은 표정을 지은 미미르는 이안의 어깨에서 뛰어내리고는 앞을 자세히 살폈다.

‘황실비고라면, 강력한 마법기나 신기도 존재할 테니까. 당연한 거 아냐?’

이안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드넓은 제국의 온갖 귀한 것들을 모아 놓았을 테니, 그중 한두 개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미미르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이건 그 정도가 아니야. 이건….]

미미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도착했어요.”

루미너스의 목소리를 들은 이안은,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곧, 그는 미미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용?”

거대한 수정구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는, 붉은 비늘의 파충류.

“제국과 황실의 수호신, 화염용 메이라우스 님이에요.”

제국의 황녀 루미너스가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본 그 존재는.

분명 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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