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불 꺼진 마르센 제국의 황궁 중 하나엔, 적발의 사내가 환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의 연락이로군요, 구스타프.”
-그렇군. 석 달 만이던가?
적발의 사내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놀랍게도 참룡공 뢰베르 폰 구스타프 공작이었다.
참룡공이 쓴웃음을 짓자, 사내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그 년하고 붙어먹는 줄 알았는데, 잘 안된 모양이더군요. 삼삼한 위로를 보내지요.”
-귀여운 여동생에게 년이라니, 황태자가 입에 담을 언행은 아니지 않나?
황태자.
그 단어가 가진 의미는 무거웠다.
차기 황제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자가 다름 아닌 붉은 머리 사내란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르센 제국의 황태자, 피에르는 그 말을 듣곤 코웃음 쳤다.
“황태자? 그런 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입니까? 아버지께선 이미 핏덩이같은 동생 녀석을 점찍으셨는데. 그리고.”
으드득
말을 하다 만 피에르는 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았다.
“그 년이 내 뒤통수를 친 이후로, 난 한 번도 내 동생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당신도 마찬가지고.”
루미너스, 고 년이 갑자기 눈앞의 구스타프 공작과 작당하지만 않았더라도, 그의 계승권은 이미 반석 위에 올라있었을 터.
그때의 일을 떠올린 피에르의 눈에 살의가 차올랐다.
하지만 참룡공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자리싸움이란 게 생각보다 치열하다네. 조금 입지를 굳혀보려고 하면, 밑에서 끌어내리려고 안달이 나거든. 정상을 차지하는 건 쉬워도, 지키는 건 어려운 법이지.
“잔소리나 할 생각이라면 이만 통신을 끊겠소. 잔소리는 아바마마께만 들어도 충분하니까.”
뢰베르가 유들유들하게 굴자, 기분이 언짢아진 피에르는 통신을 끊으려 했다.
-정상에 오르고 싶지 않나?
참룡공이 한마디를 던지기 전까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요?”
순간, 피에르가 멈칫했다.
뢰베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남들을 제치고 정상에 오르는 건 자네 생각보다 쉽다네.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과감히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만이 정상에 먼저 오를 수 있는 법이거든.
순간, 뢰베르는 참룡공의 말이 가진 의미를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지금, 반역을 저지르라는 거요?”
반역.
입에 담기만 해도 목이 달아나기 충분한 단어.
법 위의 존재인 황족의 신분일지라도 피할 수 없는 중죄 중의 중죄.
뢰베르는, 지금 제국의 황태자에게 반역을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네. 단지, 자네가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지.
“도움?”
-그래, 그 아슈타르 놈이 네 동생들에게 그랬듯이.
말을 마친 뢰베르의 눈동자 깊은 곳에 분노가 일렁였다.
황태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군, 어려워.”
자신이 참룡공의 지원을 받는다 한들, 알론소는 이미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성공확률이 반을 넘기기 힘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뿐이겠지.’
황제도, 황태자도 아닌 평범한 황족 중 하나.
그 수모를, 견딜 수 있는가?
-정상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만, 그 걱정도 우선은 높은 곳에 오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이라네.
악마가 고뇌하는 황태자의 귓가에 속삭였고.
“…하겠소.”
황태자는 그 유혹을 받아들였다.
***
“마, 마, 말도 안 돼….”
마르콘의 신관인 세리아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진짜, 얻었다고요? 마르콘님의 힘을?”
이안의 손에서 옅게 빛나는 새하얀 빛.
그 빛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빛의 신 마르콘의 신성력이었다.
“왜, 신성력 처음 봐?”
“…마르콘이시여, 어째서, 어째서 이런 자에게 당신의 힘을….”
이안은 신성력이 일렁이는 손을 그녀의 눈앞에 휘두르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그는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더라고.”
[말이 아니라 뇌물이겠지. 저 파편을 차라리 나한테 줬더라면….]
애오옹
미미르가 아쉬움에 가득 찬 울음을 내뱉었지만 이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뭐, 좋아요. 그분의 계획에 당신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어쩔 수 없다니, 말이 뭔가 이상한데.”
“잘못 들은 거예요. 자, 그럼 이제 볼 일은 더 없는 거죠? 제가 좀 바빠서….”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세리아는 급히 자리를 떠나려 했다.
“잠깐.”
“…왜요? 저 진짜 바쁜데.”
하지만 이안의 용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귀찮은 표정으로 그녀가 돌아보자, 이안의 입이 열렸다.
“어딜 가서 날 좀 도와줘야겠는데.”
“…뭔데요? 설마 또 마경 같은 곳으로 가는 건…”
이미 이안의 수작에 여러 번 넘어갔던 그녀다.
‘이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굳이 넘어가 줄 필요는 없어.’
마음을 단단히 굳힌 그녀가 입술을 앙다문 채 이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가는 건 맞는데, 딱히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 마. 보수도 충분히 챙겨주지.”
“…어딘데요?”
“그건 수락하면 알려줄게.”
순간, 그녀는 이안의 말에 넘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보수만큼은 확실히 챙겨주는 게 그의 후원자, 아슈타르 공작이 아닌가.
‘안 그래도 신상을 하나 세워야 했지.’
신상에 보석이라도 하나 박아넣으려면, 아무래도 돈이 좀 들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좋아요. 용돈이나 버는 셈 치죠, 뭐. 어디로 가는데요?”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안의 제안을 승낙하곤 물었다.
그리고.
“제국.”
“…네?”
“마르센 제국의 황궁으로 갈 거야.”
이안의 말을 들은 그녀는 한동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
이안이 세리아를 제국으로 데려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군, 마르콘의 신관이여.”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5황자이자, 이제는 차기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자.
‘이런 자리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황궁으로 간다고 하기에 대강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황자와 함께하는 자리일 줄이야.
애써 웃으며 알론소와 재회한 그녀는 예를 갖추면서 이안을 슬쩍 노려봤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 이제 준비는 끝난 건가?”
“음, 그렇지. 이제 날짜만 잡으면 되네.”
“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천녀를 어떤 연유에서 부르신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둘의 대화를 들은 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 미안하오, 신관.”
그 말을 들은 알론소는 아차 한 표정으로 손뼉을 치고는.
“내 책봉식에 그대가 함께 해 주었으면 좋겠소.”
“책봉, 말인가요? 책봉이라면….”
“다음 주에 있을 황태자 책봉이지.”
말을 마친 알론소가 기쁜 마음에 씨익 웃었다.
황위 계승권에서 밀린 것이나 다름없던 그가, 차기 황제의 자격이 있음을 만인에게 알리는 날이었으니까.
“어, 어….”
하지만 세리아는 기뻐하는 대신 당황했다.
“제국엔 이미 대신관님들께서 계시지 않나요? 어째서 제가 그 자리에….”
그녀 역시 마르콘의 신관이었지만, 그녀가 담당하는 신도들은 고작해야 아슈타르 공작령에 사는 자들뿐이다.
당연히, 제국에는 제국 전체를 관할하는 대신관들이 있을 터.
타국의 조그마한 공작령을 관할하는 그녀를 굳이 황태자 책봉식까지 데려올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 대답은 이안에게서 나왔다.
“나와 알론소의 관계를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까.”
“관계요?”
“내가 그래도, 이제는 이래저래 명성을 좀 쌓았잖아? 함부로 건들지 말란 거지.”
용혈을 각성하면서 정통성을 획득한 알론소였지만, 그에겐 지지해 줄 세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마왕토벌자의 위업을 달성한 이안의 명성을 이용한다면, 황자의 세력을 끌어모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한 일이지 않아?”
“그건 그런데…좀 찝찝한데요. 이용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모두가 모두에게 이용당하는 게 세상이야.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의식 준비나 하면 돼.”
세리아의 불만을 한 마디로 일축한 이안은 다음 일을 생각했다.
‘베티에게 보고를 받은 다음, 제국의 세력분포를 알아보고 나선 연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다음엔 지하에 내려가서… 젠장, 쉴 틈이 없네.’
앞으로 해야 할 수많은 일을 떠올린 그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금만 지나면 제국 일은 끝날 테니까.’
정통성을 잃은 지금의 황태자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알론소가 새로운 황태자가 된다면 제국은 다시 안정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좀 쉬어야지.’
언제 올지 모르는 휴식을 기다리며,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황자 전하, 루미너스 황녀전하로부터 전갈이옵니다.”
황자를 수행하던 기사 중 하나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바쳤다.
“누님께서? 어쩐 일이시지?”
연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한 알론소는 서신을 뜯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허.”
입에서 헛웃음을 내뱉곤 이안을 바라봤다.
“너를 보고 싶다는데.”
“날? 왜?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건가?”
난데없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알지 못한 이안이 묻자, 황자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가 보면 알 거야. 여기서 이야기 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 네게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으니 걱정은 말고.”
“뭐, 그렇다면야.”
거짓말과는 거리가 먼 알론소가 호언장담하자,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루미너스를 보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푸, 푸후훗.”
홀로 남은 알론소의 경박한 웃음을.
“누님도 제법 급한 모양이군. 이런 서신까지 보낼 정도라니. 후후후.”
황녀의 서신을 다시 읽어내리는 그의 입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그, 이런 말 들어본 적 없어?”
루미너스의 궁에 들어온 이안의 첫마디는 의문이었다.
그녀가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자, 이안은 침소의 벽을 가리켰다.
“취향이 고상하지 않다거나, 뭐 그런.”
어지간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는 이안이었지만.
“마수 대가리를 방에 걸어놓고 사는 사람은 거의 못 봤는데.”
벽에 걸린 마수들의 머리를 보면, 누구나 이안의 심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제국군의 정복을 입고 있는 루미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대가 아니라도, 시녀들에게 하루에 세 번은 듣는 것 같네요. 거기에 잔소리를 추가할 생각은 없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춤의 검을 톡톡 쳤다.
“제국의 황녀인 본녀가 직접 쓰러트린 아이들이니, 당연히 함께 할 가치가 있지 않겠어요?”
“직접 잡았다고?”
“본녀 역시, 검을 수련하는 기사니까요.”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되긴 하네.”
그 말을 들은 이안은 잠시 놀란 빛을 띄웠지만,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이제 황위계승권과는 저만치 떨어진 그녀다.
황위를 포기하겠다 한 약속을 깰 게 아니라면, 굳이 이안과 이야기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그, 본녀와.”
말하기 힘든 이야기인지, 얼굴이 새빨개진 루미너스가 말을 더듬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팔짱을 낀 이안은 어리둥절했지만, 천천히 그녀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곧.
“본녀와, 혼약을 맺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녀가 말을 마치곤 떨리는 손을 가슴에 얹으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지금, 무슨 개수작이야?”
생애 첫 프러포즈를 받은 이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