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이안과 거래를 마친 황녀는 곧 자리를 떠났다.
[쉽지 않을 거다.]
할짝
한 고양이와 한 사람만이 남은 방에서, 미미르가 물그릇에 고인 차를 핥으며 말했다.
[참룡공이 저렇게 공격적으로 나온다는 건, 이미 다른 공작들과 입을 맞췄다는 얘기일 거다.]
수백 년간 앙숙처럼 지내오던 마르센 제국의 황가와 공국의 공작가가 혈연관계를 맺는 일이다.
다른 공작들의 묵인이 없다면,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터.
“그럼, 나는? 내 허락은 어디로 가고?”
[네 허락 따윈 굳이 받고 싶지 않았나 보지. 이야기는커녕, 칼이나 겨누지 않으면 다행인 사이잖나.]
“하긴.”
이안은 순순히 인정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참룡공가와 자신 사이엔, 이미 깊은 감정의 골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둘 사이의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선, 끝장을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 돌아서 가야지, 일단은.”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이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애오옹….
이안을 향해 미미르가 겁먹은 표정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두 번은 안 보여줄 거니까.”
철컥철컥
이안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미미르의 본체가 부품의 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애오오오오옹!
권총이 분해될 때마다 고양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지만.
“아니, 어째서 저렇게 작은 용수철을 사용하는 거지?”
“도무지 저 철침의 용도를 모르겠군.”
자리에 모인 수십의 난쟁이들과 이안에겐 그저 작은 소음일 뿐.
난쟁이들의 눈은 이안의 해체 쇼에서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 여기까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자, 잠깐!”
이안의 말을 들은 난쟁이들이 채 당황해 외쳤지만, 이안의 손은 그보다 빨랐다.
철컥철컥.
이안의 손이 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죽이 덮인 탁자 위에 늘어서 있던 부품들은 다시 원래의 권총 형태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애, 애오옹….
그 꼴을 보던 고양이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력으로 이루어진 본체면서, 좀 분해하면 어때?’
이안은 미미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네놈을 당장 발가벗겨놔도 그런 말이 나올까?]
‘아.’
페르소나의 말을 들은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치자고.’
[이런 개자식….]
울먹이며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고양이.
그 시선을 조심스레 피한 이안은, 난쟁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그 부품, 기억나나?”
“나는 모르겠는데, 누구 본 사람 없어?”
“어떻게 이 많은 놈 중에 종이 한 장 챙겨온 놈들이 없냐!”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 난쟁이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럼, 난 이만.”
물론, 이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지만.
몸을 돌린 그는 좁은 동굴을 떠났다.
‘본국으로 돌아간다.’
황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때.
“이보게, 인간!”
뒤를 졸졸 쫓아온 바몬트가 이안을 불러세웠다.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되겠나?”
“뭔데?”
다시 돌아선 이안이 귀찮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인제 와서 딴소리는….’
보나 마나 제대로 보지 못한 분해과정을 다시 보여달라, 같은 얘기일 게 뻔했다.
“혹시 분해과정을 다시 보여달라는 거면, 약속대로 추가 계약을….”
물론, 이안은 공짜를 모르는 사내.
“아니, 그런 게 아니네.”
이안의 말을 들은 난쟁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가 싸우는 곳에 따라갈 수 있게 해 주게.”
“…왜?”
자신을 전장에 데려가 달라니.
생각지도 못한 부탁을 받은 이안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바몬트의 눈이 욕망으로 빛났다.
“자네가 부리는 페르소나의 위력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싶네.”
바몬트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인간이 다루는 페르소나는, 기존의 상식과는 차원이 다른 병기일 거란 걸.
‘그렇지 않고서야, 페르소나를 저렇게 복잡하게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어.’
병기를 만들 줄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 인간이 부리는 병기들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감이 그의 머릿속에 쏟아질 게 분명했으니까.
말을 마친 바몬트는 들뜬 아이 같은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뭐, 어려울 거야 없지만.”
당장 괴물들과 싸우러 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싸우는 건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단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겠지?”
손해 볼 일을 만들 생각이 없을 뿐.
이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난쟁이를 내려다봤다.
“부족의 장인들을 그대의 영지에 파견해 주지.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만들어줄걸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몬트는 준비해 둔 답을 꺼내 들었다. 이안은 피식 웃었다.
“내가 뭘 만들라고 할 줄 알고? 평생 낫이랑 쟁기만 만들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 그렇지만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네.”
이안의 뼈있는 농담에 난쟁이는 순간 당황했지만, 조건을 바꾸지는 않았다.
“우리의 무구가 그대에게 썩 가치가 있진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흠.”
이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난쟁이들의 손재주에 관한 이야기는 온 대륙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면, 난쟁이들은 살아 있는 공작기계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뭐, 여차하면 진짜 낫이랑 쟁기나 만들라고 하지 뭐.’
물론, 이것만 받아낼 생각은 없었지만.
“거기에, 난쟁이들의 지하 통로를 사용할 권한도 추가해서.”
이안은 바몬트가 제시한 조건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광산길의 사용법은 우리 일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그건….”
그건 절대로 안 된다는 듯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바몬트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만들라는 걸 그대로 만들기만 해도 너희가 얻어가는 게 없진 않을 거 아냐?”
“그건, 그렇다만.”
이안의 다음 말에 난쟁이는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굳이 장인들을 보내는 이유 중에는, 이안의 명령을 따르면서 새로운 병기에 대한 영감을 얻어오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럼 내가 너무 손해란 말이지.”
“하지만….”
“사용법은 오직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거로. 어때?”
“으음….”
이안이 한발 물러나자, 바몬트는 고민에 빠졌다.
‘새로운 병기는 필요해. 하지만 비밀을 그대로 넘겨주기엔….’
얼마나 지났을까.
“좋네.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거야.”
결국, 난쟁이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계약서라도 쓰자고.”
그제야 이안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지하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지하 통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이안에게 큰 이점이 될 테니까.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런데, 제국은 어떻게 처리하려고?”
난쟁이들은 마르센 제국의 신민이다.
최고의 장인들이 제국을 떠나 다른 국가에서 일하는 것을, 과연 황제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하지만 바몬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장인을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저들이 어찌 알겠나? 정 문제가 된다면, 제국에서 벗어나 지하로 숨어들면 그뿐이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스윽 내밀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몬트가 이안은 영 미덥진 않았지만.
“뭐, 그렇다면야.”
곧 제국의 오러 마스터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벽난로를 통해 다시 돌아온 이안과 바몬트가 계약서를 작성하려던 그때.
쿵
구구궁
어딘가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궁이 흔들리면서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뭐, 뭐야!”
보기와 다르게 새가슴인지,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가루를 맞은 바몬트가 즉시 엎드려 벌벌 떨었다.
철컥
이안은 곧장 권총을 손에 쥐었다.
“미미르?”
[잠깐.]
주인의 물음에 미미르는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내 감각엔 걸리지 않는다. 감각의 범위 바깥인 것 같은데.]
“그럼, 장난이 아니잖아.”
이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미미르의 감지범위는, 못해도 일 킬로미터.
일 킬로미터 밖에서 벌어진 폭발의 충격파가 이토록 강하다면.
‘폭심지는 이미 날아가 버렸겠지.’
보지 않아도, 이안은 그곳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폭발의 주인공이 누구일지도.
쿵쿵
“공작 전하, 안에 계십니까? 속히 입궁하라는 황녀 전하의 전갈이옵니다.”
기사로 보이는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엎드린 바몬트를 바라봤다.
“어이 난쟁이.”
“끄, 끝났나? 설마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그만 일어나라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난쟁이를 향해 다가간 이안은.
“계약서가 필요할 것 같으니까.”
굳은 표정으로, 엎드린 난쟁이의 손에 깃펜을 쥐여주었다.
***
그의 예상대로, 일은 이미 벌어져 있었다.
‘언약을 이행할 때가 되었어요, 공작. 후작이 드디어….’
심마에 잡아먹힌 후작은 결국, 미쳐버렸으니까.
참룡공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던 이안과 황녀가 택할 방법은 하나뿐.
‘빌어먹을 황녀 같으니.’
미쳐버린 마스터를 사냥하는 것.
‘정말 위치만 알려줄 줄이야.’
하긴,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 아무리 많은 병력을 동원해 본들, 미끼 이상의 의미는 없겠지만.
‘대가를 좀 더 챙겨야겠어.’
그래야만, 이안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저기다.’
쌍안경으로 적룡기사단의 수련장을 살피던 이안은, 후작의 익숙한 얼굴을 확인했다.
그 주변에 널린 것은, 누군가의 피와 살점들.
아마도, 폭발 당시 함께 있었던 적룡기사단의 것이리라.
[이안, 이쪽은 준비가 끝났다.]
‘좋아.’
우웅
미미르의 보고를 들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인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오러 사용자를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웅급 페르소나, 용의 힘을 완전히 깨워낸 용인, 그리고 3급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대마법사와 마왕.
하지만.
‘근접전에선 오러 마스터를 이길 수 없어.’
페르소나보다 월등한 지구력에, 용인보다 강력한 힘과 대마법사보다 강한 저항력. 그리고 마기를 태워내는 오러 블레이드까지.
‘오러 블레이드가 닿는 거리에선, 절대로 상대할 수 없다.’
기이이잉
그렇기에, 이안이 택할 방법은 한정되어 있었다.
“발사.”
상대와의 거리를 방패로 삼는 것.
이안이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콰아아앙-
이안의 뒤에 자리한 K-9 자주포가 불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