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참룡공.
창의 달인이자, 용혈을 완전히 각성해 용인의 경지에 이른 자.
그리고, 다른 여섯 영웅과 함께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연합공국의 지배자 중 하나.
‘그런데 어째서….’
공작령에 있어야 할 자가, 어째서 제국의 신료들과 함께 섞여 있단 말인가.
아무도 자신의 옆에 공국의 공작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신료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스윽
자리로 이동한 이안의 오른손이 무의식중에 홀스터에 꽂힌 권총으로 향했다.
“이안?”
이안의 기도가 달라진 것을 알아챈 알론소가 물었지만.
“참룡공이야.”
“…뭐? 공국의 참룡공? 그 개자식이 왜?”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말이지.”
언제든지 권총을 빼 들 준비를 끝낸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구스타프 공작가와는 끝없는 악연으로 이어진 사이였으니, 그로서는 달갑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이안보다 더한 반응을 보이는 자도 있었다.
“빌어먹을, 참룡공이 여기 나타났다고? 아바마마께선 도대체….”
참룡공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알론소의 표정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 건데?”
연합공국의 공작인 참룡공이, 제국의 황자인 알론소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알론소의 갑작스러운 심경변화를 이해 못 한 이안이 상황을 분석하던 그때.
‘젠장.’
이안과 공작의 눈이 마주쳤다.
‘위험해.’
상대가 자신을 적대할 거로 생각한 이안은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씨익
‘웃어?’
공작의 반응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뭐지?’
공작의 썩은 미소를 마주한 순간, 불길한 예감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이안이 채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
“빛의 신 마르콘님의 대행자이자 아스텔리아 대륙의 정명한 지배자이신 알메네온 폰 메이라우스 마르세니아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정숙하십시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앉아 있던 모든 신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어전 안으로 들어온 것은.
‘침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마에 가까웠다.
침대를 위에 얹은 것처럼 생긴 거대한 가마가 어전 안으로 들어왔다.
마법을 사용한 것인지 스스로 공중에 떠서 들어오는 가마 위에 누운 것은, 초췌한 얼굴의 황제.
“지난번보다 수척해지셨어.”
“암살자들이 침소에 들었다는 게 사실인가?”
“나도 그 소릴 들었네. 화염궁 쪽에서 폭발음이 들리던데….”
“쉿.”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황제의 모습을 본 귀족들이 속닥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짐은.”
황제의 힘없는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겨있는 의미는 무거웠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국의 신민들을 보살필 그대들의 의무인 저.”
“황공하옵니다.”
알아서 조심해라, 라는 황제의 속뜻을 파악한 신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금일 어전회의에서, 짐이 선언할 일은 두 가지다. 이안 폰 아슈타르 공작은 앞으로 나오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안은 곧장 앞으로 나섰다.
“아슈타르 공작이라고?”
“신검의 주인이 여긴 왜?”
반역도의 수괴가 왜, 어전 안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자리에 앉은 신료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모르면 조용히 하게나.”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함세.”
어전회의의 주제를 알고 있던 일부 신료들은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안 폰 아슈타르 공작, 그대는 짐의 생명을 구함과 동시에 제국의 혼란을 막아냈도다. 이에.”
그들 역시 당황하는 것은 오래지 않았다.
“이안 폰 아슈타르 공작에게 적룡장을 수여하며, 공작을 포함한 일곱 반역도에게 씌워진 반역의 죄를 사한다.”
황제의 명이 떨어진 순간, 어전에 남은 것은 침묵뿐.
반역의 죄를 사한다.
그 의미는 곧, 연합 공국과 제국의 오랜 악연을 청산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동안 제국과 연합 공국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싸움을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축하하오, 공작.”
축하와 함께 재상이 직접 공작의 가슴에 달아준 붉은 용 모양의 훈장은, 황제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진 괜찮은데 말이지.’
하지만 훈장을 받은 이안은 썩 기쁘지 않았다.
구스타프 공작의 존재 자체가, 그의 기분을 찝찝하게 만들고 있었으므로.
“다음으로는.”
그리고.
“뢰베르 폰 구스타프 공작은 앞으로 나오라.”
황제가 두 번째 안건을 꺼낸 순간.
“잠시 황가의 그늘을 떠나긴 했지만, 구스타프 공작가는 곧 황가에 다시 돌아올 것인 저.”
‘뭐?’
이안은 찝찝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생각도 못 한 전개에, 이안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몰랐던 거냐?]
하지만, 미미르는 놀란 이안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구스타프 공작가는 본디 마르세니아 황가의 방계다. 괜히 놈들이 용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아니, 그건 그렇다 치자고.’
백번 양보해서, 그들이 황가의 방계라 치자.
그렇다면 용의 피를 완전히 각성한 자를 황가에 불러들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친.’
결론에 도달한 이안의 표정이 매섭게 굳었다.
그리고.
“그대에게 황녀를 맡기겠다.”
황제의 말은, 이안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
“어려.”
뢰베르 폰 구스타프 공작.
참룡공이 그의 새로운 약혼자를 처음 만난 소감은 짧았다.
“마력은 보잘것없고, 용의 피도 깨워내지 못한 풋내기라니.”
그것이, 썩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본녀가 그대보다 제국에서의 영향력은 더 강할걸요?”
당연히, 그 말을 듣는 황녀의 심정은 편치 않았다.
“그대가 날 원한 것 역시, 그 때문이 아닌가요?”
미래의 정혼자인 사내를 향해, 그녀는 독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상대가 용의 피를 각성하였으며, 한 공가의 지배자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결국, 본녀의 도움 없이는 제국을 얻지 못할 테니까.”
자신에게 쓸모가 있는 한, 그녀는 눈앞의 용인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으니.
“정녕 제국을 손아귀에 얻고 싶다면, 언행을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표독스레 쏘아낸 루미너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뭐, 뭐야.’
그녀는 알지 못했다.
용인(龍人).
고룡의 피를 완전히 각성해, 인간의 몸으로 용이 되어버린 자가 어떤 존재인지.
지이잉
뢰베르가 자신의 힘을 개방한 순간.
‘무, 무슨!’
처음 파충류의 눈을 마주한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일 텐데.’
정략결혼일 뿐이지만,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제국의 황녀다.
그것이 사랑이건, 욕망이건, 아니면 질투건.
그녀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감정이, 없어?’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하등 쓸모도 없는 널 필요로 하는 것은, 네가 황가의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를 마주하는 것 같은 눈빛.
공작이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모멸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내 인내를 시험하지 마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용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그녀의 몸이, 뱀 앞의 개구리처럼 차갑게 식어버렸을 때.
‘이건 아냐.’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구스타프 놈들, 무슨 생각인 거지? 연합공국을 탈퇴하려는 심산인가?]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어전회의가 끝나고, 죽상이 된 알론소를 보낸 이안은 정식으로 배정받은 화염궁의 별관에서 생각에 잠겼다.
“제국을 손에 넣으면, 연합공국을 자신들이 쥐락펴락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찌 되었건, 마르센 제국은 공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나라다.
구스타프 공작가가 제국을 손아귀에 넣는다면, 연합공국을 다시 제국의 품에 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슈타르엔 썩 좋지 않은 결과지.”
악연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안과 구스타프 사이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아슈타르의 입장에선 이 결합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되돌릴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야.]
미미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제 딸을 내주면서까지 구스타프를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뭐지?]
“생각해 봤자야. 어차피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까.”
다른 공작들을 모아, 뢰베르 폰 구스타프의 계략을 어그러뜨리는 것.
그것만이, 지금의 상황을 되돌릴 방법이었다.
“돌아가야겠어.”
다른 여섯 공작이 제지하고 나선다면, 참룡공 역시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테니까.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치이이이-
벽난로의 불이 갑자기 꺼진 것은 그때였다.
“뭐야?”
철컥
허리춤에 꽂아둔 글록을 뽑아 든 이안은 벽난로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켈룩, 켈룩.”
연기가 자욱한 벽난로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은 이안은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바몬트?”
이안이 준 마법총을 가져간 난쟁이.
“이 날씨에 벽난로라니, 연약하기 짝이 없기는.”
그와 함께, 몇몇 난쟁이들이 벽난로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허리춤에 망치를 하나씩 매단 난쟁이들이 이안을 포위하듯 모였다.
“무슨 일이지?”
바몬트를 빼면 모두 처음 보는 자들.
이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바몬트가 답했다.
“다른 일족의 족장들이다.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지.”
“족장?”
“그대가 보여준 병기는 잘 보았네. 첫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녀석이더군.”
이안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바몬트 옆에 선 난쟁이였다.
“아로니트라하네. 참으로 어마어마한 물건을 가지고 계셨어. 인간이 생각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고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수염이 숭숭 난 아로니트가 불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안의 속이 불편해졌다.
“원리는 알아내셨나? 고작 하루를 줬을 뿐인데.”
이안은 난쟁이들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바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혁신적이더군. 아무런 주문도, 마력도 없이 길게 나온 쇳덩이만 당기면 곧장 발사되는 마법기라니.”
[난쟁이답지 않은 칭찬이다. 이 정도면 극찬 중의 극찬이야.]
바몬트의 말을 들은 미미르가 놀란 눈을 떴다.
“인간답게, 그 위력은 썩 크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야. 크흠.”
말을 마친 난쟁이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이안은 턱을 쓰다듬었다.
“정말, 너희들이 만든 게 아니란 말이지?”
이안의 말에 바몬트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 난쟁이의 이름이 광산 가장 위에 걸려있었겠지. 우리는 뛰어난 무구를 만든 장인을 홀대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바몬트는 말을 마치곤 오른손을 뻗어 이안의 손에 들린 권총을 가리켰다.
“이제, 약속대로 그 무기를 우리에게 보여줄 차례일세.”
“그럼.”
난쟁이가 간곡한 표정으로 부탁하자, 이안은 씨익 웃었다.
“너흰 뭘 줄 수 있지?”
당연히, 공짜로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