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암살자는 평범해야 한다.
그래야만, 경계하는 자들의 기억에 쉽게 남지 않으니까.
저벅저벅
그에 걸맞게, 화염궁에 모인 서른의 암살자들은 모두가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황실 요리사와 이발사, 말을 관리하는 시종과 황족들을 보필하는 시녀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긴 경비병들의 시체가 아니었다면, 행사를 준비하러 모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
척
모든 경비병을 제거하고, 거대한 용이 새겨진 침소의 문 앞에 암살자들이 도달한 순간.
‘준비.’
마구간지기로 위장한 암살자가 손짓했다.
타타탓
동시에, 나머지 스물아홉 명의 암살자들이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스윽
제각기 품에서 기다란 막대기처럼 생긴 무언가를 꺼내든 암살자들.
황제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지만, 막대기를 문에 겨눈 그들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작한다.’
암살자들의 지휘자는,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움직였다.
스윽
그가 들어 올린 손을 내리는 순간.
저 문 너머에 있을 제국의 지배자는 그 명을 달리하게 되리라.
‘단장이 오기 전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퇴로를 확인한 지휘자는 들어 올린 손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드르르르르륵
이미, 그들의 계획은 발각된 지 오래라는 사실을.
퍼퍼퍼퍽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문을 꿰뚫고 쏘아져 나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든 철제 탄환이 전열에 서 있던 암살자들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
놀란 암살자들이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밀집대형을 이루고 있던 그들은 쉽게 몸을 뺄 수 없었다.
드르륵 드르르륵
쉴 새 없이 쏟아져나오는 적의 공격에, 암살자들이 속절없이 쓰러져나갔다.
하지만, 남은 자들 역시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리진 않았다.
퍼퍼퍼퍽
이미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들어 올려 방패로 삼은 후열의 암살자들이 양쪽으로 흩어졌다. 곧, 그들은 문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슥
이미 걸레짝처럼 흉한 모습이 된 문에 다가선 그들은, 좀 전의 막대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위력만은 확실하다 했지.’
그들을 사주한 자들이 보내준 신무기를 손에 꼭 쥔 지휘자는 때를 기다렸다.
적의 공격은 분명 매서웠지만, 한 번 쏟아낸 다음엔 쉬는 시간이 존재했으니까.
이윽고.
틱
적의 공격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문밖으로 울려 퍼진 순간.
타타탓
암살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문을 향해 돌진했다.
‘이제 와서 살기는 힘들다.’
오러 마스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의 침소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터.
그들이 택할 방법은 결국 하나뿐.
‘목숨을 대가로 임무를 성공시킨다.’
그것이, 자신들을 키워준 자들에 대한 보답이었으니까.
하지만.
데구르르
그들의 판단은 조금 늦었다.
‘응?’
방 안으로 들어온 암살자들의 지휘자가, 바닥으로 굴러든 주먹만 한 공을 발견한 순간.
펑!
섬광탄이 폭발했다.
***
퍼엉!
눈을 가린 이안이 섬광탄의 폭음을 들은 순간.
‘지금.’
쾅
황제의 옷장 안에서 때를 기다리던 이안은, 재빨리 옷장 문을 걷어찬 다음 권총을 겨눴다.
옷장 밖은 지옥이었다.
“내, 내 눈….”
강한 빛에 눈이 멀어버린 자.
“욱, 우우욱.”
극심한 멀미에 먹은 걸 모두 토해내는 자.
“모, 몸이, 왜 이래?”
일어나려 해도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쓰러져버리는 자.
눈과 귀를 마비시키는 섬광탄을 처음 경험한 암살자들의 머릿속에, 그동안 받아온 훈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안, 붙잡아서 배후를 캐내야 한다.]
“당연한 소릴.”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심문이라면 이안의 전문분야.
늦어도 내일 해가 밝을 때 즈음, 이안은 암살자들의 어머니 이름까지 알고 있으리라.
우웅
마력으로 만든 포박용 줄을 손에 쥔 이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암살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고오오
어전의 공기가 바뀐 것은 그때였다.
‘이건.’
익숙한 기세.
이안은 자신을 압박해오는 기운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단장?’
근위기사단의 단장, 멤피스.
암살자와 이안을 향한 그의 눈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스릉
“감히 폐하를 시해하려 들다니.”
지이잉
단숨에 뽑아 든 그의 검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검날이 솟아 나왔다.
오러 마스터만이 만들 수 있는 궁극의 검날.
오러 블레이드.
그리고, 상대가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
‘저 새끼, 진심이다.’
이안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
“오라, 미미르.”
파아앗
페르소나를 몸에 두른 이안은 곧장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 LAHAT을 무반동포에 꽂았다.
‘일단 당긴다.’
설마,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가 이거 한 방으로 죽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가 채 무반동포의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
서걱
그의 귓가에, 고기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익스퍼트 상급의 눈으로도 감히 쫓기조차 힘든 속도.
이안 역시 마왕을 토벌한 적은 있었지만, 그가 마왕을 상대한 것은 모두 거리라는 방벽을 앞에 둔 채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안과 상대의 거리는 고작 방 하나 사이.
‘빌어먹을.’
눈 앞에서 날아든 마스터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한 이안은,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툭
이안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멤피스의 검이 벤 것은, 오직 쓰러진 암살자들의 목뿐.
데구르르
수십 명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침소 앞의 복도를 굴러다녔다.
“…하?”
순간,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무시무시한 검에 자신의 목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분명 다행이었지만.
“이봐, 이게 무슨 짓이지?”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생포한 암살자들을 죄다 죽여버리다니.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안과 눈을 마주친 마스터, 멤피스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감히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자들에게 징벌을 내렸을 뿐이다.”
“놈들의 배후를 캘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나 보지?”
멤피스의 말에, 이안이 입꼬리를 뒤틀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지이잉
“죄다 베어버리면 되는데 말이지.”
2미터가 넘는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낸 사내는, 이안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안을 무시한 그의 눈이, 활짝 열린 침소로 향했다.
“재상, 거기 있나?”
“그래, 아직 살아 있소.”
단장의 물음에,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재상이 튀어나와 말했다.
“폐하께선?”
“황자 전하와 함께 피신하시었소.”
“그럼, 난 먼저 가보지. 폐하껜 안부 인사나 전해드리게.”
터벅터벅
재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단장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이안은 안중에도 없는 채로.
[이안, 상대는 마스터다. 멤피스 후작은 이미 백 년을 넘게 살아온 괴물이야. 상대의 반응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이안을 본 미미르가 그의 발치에 올라 위로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이안은 분노하지 않았다.
‘황제의 침소가 공격받을 때까지, 마스터급의 강자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단지, 맞지 않는 퍼즐들을 맞춰나가고 있었을 뿐.
오러 사용자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인지 영역은 킬로미터 단위로 확장된다.
그런데, 암살자들의 공격을 대처하지 못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하군.]
‘둘 중 하나지. 습격을 느끼지 못할 만큼 먼 곳에 있었거나.’
저 오러 마스터가, 습격과 연관되어 있는 자라거나.
‘생각보다 더 개판인데.’
생각을 마친 이안은, 제국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로 했다.
그리고, 암살자들의 시체로 시선을 옮긴 이안은.
“뭐야, 저건?”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보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미안하다, 이안.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해 버렸군.”
비상시를 대비해 존재하는 황궁 지하의 은신처.
이안이 근위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은신처에 들어서자마자, 알론소는 이안을 향해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이안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예상한 건 아니고?”
“그, 그건….”
알론소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너무 쉬웠다면 이안은 오히려 의심했을 것이다.
그가 알론소로부터 부탁받은 것은, 황위 싸움에 뛰어들 그를 지원해 주는 일.
조그마한 마을 이장 자리를 얻기 위해 온갖 암투가 벌어지는 게 현실이었다. 하물며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라는 자리를 얻으려는 과정이 더럽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그보다, 황제의 상태는 어때?”
“아바마마께선 다행히 무사하시다. 변고가 터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신과 수호룡께서 도우신 탓이지.”
물음에 답한 알론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제국이 들썩이겠군. 황제가 시해당할 뻔하다니.”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가 시해당했는가, 당하지 않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근위기사단과 수많은 황군이 지키는 와중에도 습격을 받을 만큼 황제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라면,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습격에 관한 얘기는 철저히 함구토록 할 것이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야. 궁 내에서 소문이 도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의 말에 알론소가 고개를 저었다. 이안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황제가 나한테 할 말이 뭐였는데?”
이야기를 나눠야 할 황제가 어딘가로 숨어버렸으니, 이안이 물을 사람은 눈앞의 알론소뿐.
알론소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바마마께선 나를 지지하신다는 말씀이었지.”
“그래?”
“수호룡께서 영원한 동면에 드신 이후로, 용혈을 각성한 자는 황족 중 내가 유일하니까.”
제국의 수호룡이자, 깨어날 가능성은 없지만 유일하게 소멸하지 않고 지상에 남아 있는 에인션트급 고룡, 메이라우스.
알론소가 용혈을 각성했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 수호룡의 피라는 제국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군.”
“그래서, 네가 말한 조건들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고.”
이안의 말을 들은 알론소의 표정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래, 다 좋은데 말이지.”
이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어째서, 황제가 우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지?”
“그, 그건….”
이안이 따지고 들자, 알론소가 당황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계약위반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본 이안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
알론소로부터 새로운 보상을 받기로 약속받은 이안은, 은신처의 남는 방 중 하나를 배정받았다.
황제가 습격을 받아 어수선한 시국에, 반역도의 수괴나 다름없는 이안을 대놓고 궁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뭐, 나쁘진 않네.”
시설만은 자신의 방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숙소를 한 번 둘러본 이안은,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스윽
이안은 탁자에 올려둔 무언가를 집었다.
[그건?]
“암살자들이 들고 있던 거야.”
툭 툭
미미르의 물음에, 이안은 손에 쥔 막대기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중간중간이 쇠로 덧대어진 나무막대기.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본다면 백이면 백, 웬 막대기라고 하겠지만, 이안의 눈엔 단순한 막대기로 보이지 않았다.
“화승총이라.”
손에 쥔 짧은 막대기를 본 이안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