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오러 마스터.
의지를 불어넣은 마력인 오러를 물질의 형태로 뿜어낼 수 있는, 모든 오러 사용자들의 정점에 도달한 초인.
‘위험해.’
오러를 다루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근접전에 강하다.
원거리 전투를 주로 펼치는 이안에게는 상극.
장년의 사내가 오러 마스터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안은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전하, 저자는 누구입니까? 궁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그 행동이 오히려 오러 마스터의 시선을 끌었다.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후작은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이 후작과 눈을 마주친 순간.
‘지독하군.’
선대 신검공, 에드너를 마주할 때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고오오오
사람의 눈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민 것 같은 기세에, 이안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 내 잊고 있었군.”
불쾌한 조우를 끊어준 것은 알론소였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감지한 그가 가운데 끼자, 둘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이안, 이쪽은 멤피스 반 바르테온 후작. 적룡기사단의 단장이자 제국 유일의 오러 마스터지. 후작, 이쪽은….”
황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안이라면, 아슈타르 공작이로군요.”
후작은 이미 이안의 정체를 눈치챈 상태였다.
“전하, 반역도들의 수장이 어째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요?”
순간.
마스터에 이른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흡.”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공작의 심장을 조여왔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잘못 움직이면 심장이 터지겠군.’
이제야 간신히 익스퍼트 상급의 격에 오른 이안이 감당하기엔 벅찬 살기였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만큼, 이안은 마스터의 살기를 감당하는 데 모든 정신을 쏟았다.
이윽고.
휘이잉
바람과 함께, 이안의 심장을 조이던 기운이 사라졌다.
“아직 마스터의 위에는 오르지 못했군. 그런 것 치곤 제법 잘 버텼다만.”
기운을 거둔 후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안을 보곤 냉소했다.
“무슨 짓인가, 후작! 공작은 내 손님일세.”
상황을 파악한 알론소가 후작을 향해 성을 냈다.
알론소는 마르세니아의 성을 이은 용혈의 각성자.
변고만 없었더라면 다음 황위와 가장 가까운 자였으니,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사람은 제국 전체를 뒤져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 반역도가 말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신 와중에, 반역도를 손님이라 칭하시다니요.”
상대는 홀로 초인의 격을 거머쥔, 제국 제일의 강자.
후작은 알론소의 말을 듣고도 콧방귀를 뀌었다.
“황위 싸움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반역도를 끌어들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자신의 세력을 만들지 못했다 한들, 반역도와 손을 잡다니.
황실과 제국을 지키는 근위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소신은 다음에 다시 찾아오기로 하지요.”
말을 마친 후작은 황자를 향해 예를 갖춘 다음, 몸을 돌리려 했다.
“누가 반역도란 거지?”
이안이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진.
“아슈타르의 폐검으로 불렸다더니, 역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모양이군.”
그 말에, 돌아서 이안을 마주한 후작은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 내가 아는 역사랑은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지.”
이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능한 제국 대신 인계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독립했다고 알고 있는데, 제국에선 다르게 가르치나 봐?”
“…반역도 놈이 혓바닥은 길구나.”
순간.
파아앗
마력의 폭풍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분노한 후작의 몸에서 흘러나온 불안정한 오러가 이안을 다시금 얽매려 했다.
‘기를 한번 꺾어줘야겠어.’
상대인 공작은 고작해야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자.
그가 전력을 다해 오러를 움직인다면, 상대의 마음을 꺾어놓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후, 후작!”
오러의 영향을 받은 5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지만, 그의 분노를 막지는 못했다.
‘오줌을 지리게 만들어주지.’
분노한 후작의 눈앞에, 비틀대다 쓰러질 공작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오라.”
이안도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미미르.”
파아아앗
허리춤의 권총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의 기운이 시동어를 외친 이안의 몸을 감쌌다.
이계의 전투 장비를 전신에 걸친 그의 양손에 들린 것은, 105밀리 무반동포.
“그만하는 게 좋을 텐데? 황자 앞에서 피를 볼 생각이 아니라면.”
철컥
대전차 로켓 발사기에 무언가를 끼워 넣은 이안이 총구를 들어 올렸다.
“그 알량한 병기를 몸에 두르지 않고는 나를 마주할 수 없는 건가?”
한층 혈색이 밝아진 이안을 보며, 후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가소로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맞는 말인데 말이지.”
툭 툭
“이거, 마왕한테도 통하는 물건이거든?”
무반동포 앞에 꽂힌, 헬파이어 미사일을 축소한 듯한 병기.
“원한다면, 얼마든지 시험해도 좋아.”
녀석을 툭툭 치며, 이안은 상대를 도발했다.
“흠.”
인상을 찡그린 후작은 침묵했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기류가 두 강자 사이를 감돌았다.
누군가가 먼저 손을 쓰는 순간, 전투는 시작되리라.
하지만.
“…피를 보기엔 때가 좋지 않군.”
먼저 물러난 것은 후작이었다. 그는 알론소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추태를 보인 점, 송구합니다. 그럼.”
또각또각
곧장 몸을 돌린 후작은 궁의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알론소가 이안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안, 괜찮나?”
“뭐, 괜찮긴 한데…후욱, 후욱.”
페르소나를 해제한 이안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마력을 급격히 소모한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환수급 페르소나의 보호력만으로 마스터의 기운을 받아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잘 버텼다, 이안.]
“후욱,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내 마력부터 회복시켜 봐.”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하군.]
이안이 퉁명스레 말하자, 발밑에 앉아 있던 미미르가 이안의 어깨에 올라와 앞발로 어깨를 쳤다.
이안은 고개를 젓고는, 아직 하얗게 질린 알론소를 향해 눈을 돌렸다.
“뭐야, 너까지 당했다고?”
신하라 칭하던 주제에, 황자의 심지를 꺾을만한 살기를 뿜어내다니.
이안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격이 좀 변하긴 했지만, 권력으로 속박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강자를 어찌하겠나. 그보다, 어서 출발하지. 아바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다.”
알론소는 당연하다는 듯 별말 없이 고개를 젓고는, 준비해 둔 마차에 올라탔다.
‘이거, 여기도….’
영 멀쩡하진 않은 것 같은데.
판단을 끝낸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
화염궁.
황궁에 존재하는 수십의 궁전 중 가장 존귀한 곳.
화염이라는 이름답게 황색과 적색으로 칠해진 궁의 침소에 거하는 것은.
“아슈타르 공작을 이곳에서 볼 줄이야.”
대륙의 삼분지 일을 영토로 삼은 마르센 제국과 거기에 소속된 이천만 지성체의 지배자.
알메네온 폰 메이라우스 마르세니아.
‘누가 황제 아니랄까 봐, 이름 한 번 장난아니게 기네.’
[마르센 제국 황제의 이름 중간에는 수호룡의 이름이 들어간다. 지금은 휴면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만.]
‘그냥, 용의 피가 섞였다고 자랑하는 거잖아. 구스타프 놈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할지 훤히 보이는군.’
이안은 미미르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힘없이 누워있는 백발의 황제를 내려다봤다.
“평생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거늘. 쿨럭.”
황제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은 거의 빠져있었고, 검게 번들거리는 입에선 피 냄새가 풍겨왔다.
대륙의 삼분지 일을 손에 쥔 자라기엔, 너무나 초라한 몰골.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그러나, 황제를 대하는 이안의 태도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다 죽어가는 황제와 굳이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를 갖추시오, 공작.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앞이오.”
그 말에, 황제의 침대 바로 옆에서 기사들을 부리던 재상이 주의를 줬다.
자신들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는 것으로 모자라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이안이 마왕 토벌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그들의 검은 이안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으리라.
“예?”
물론, 이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안은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부터 여기까지 찾아와준 내게 예를 갖추지 그래?”
대가를 받기로 했지만, 그로선 일정조차 미루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 자가….”
그 말을 들은 재상은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고맙네.”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폐, 폐하!”
황제의 감사를 들은 재상이 대경실색해 소리쳤지만.
“재상. 그대는 제국을 보위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스리려는 것인가?”
“화, 황공하옵니다.”
황제의 한 마디에 재상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황제라 이건가.’
수십 년간 제국을 지배해 온 황제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본 이안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제, 그대 역시 짐에게 예를 갖추라.”
황제의 눈빛이 이안을 향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처음부터 예를 갖춰 대했습니다, 황제. 그리고, 저희가 예의를 따지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틀린 말은 아니로군, 쿨럭. 반역도만 아니었더라도 곧장 어전에 불러들였을 것이거늘.”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제 영지 하나 관리하기도 귀찮으니까.”
이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한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짐은 이미 다섯째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군.”
‘알론소가?’
순간, 이안의 눈이 옆에 서 있던 알론소로 향했다. 당황한 황자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두고 보자.’
이안이 황자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쏘아낸 그때.
[이안.]
‘왜?’
[문 너머에 침입자다.]
미미르의 경고를 들은 순간.
철컥
사선(射線)을 피해 방 가장자리로 물러난 이안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 역도가! 감히 폐하 앞에서 무기를 꺼내다니!”
스릉
당연히, 놀란 재상과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지만.
“재상, 나 말고 오기로 한 사람이 있나?”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선 당연히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법. 오늘은 더 없소.”
“그럼, 밖에 있는 건 침입자겠지?”
“치, 침입자?”
이안의 말을 들은 재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숫자는 약 서른. 진형을 갖춰서 방 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른 경비병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있어.]
‘대략적인 위치는?’
[침소의 문을 포위하고 있다. 곧 문을 돌파할 거야.]
미미르의 보고를 받자마자, 이안의 총구가 문 쪽을 향했다.
‘나는 적의 공격을 알고 있지만, 적은 내가 알고 있단 사실을 모르지.’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먼저 친다.’
틱
이안은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드르르르르륵
Glock 18C에서 뿜어져 나간 수십 발의 총탄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가볍게 뚫고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