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각기 다른 색깔의 일곱 날개를 가진 용.
이안은 저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분명, 신드라의 페르소나에 새겨진 문장이다.’
알자스를 지배했던 트로이카의 주인이 숨겨놓은 문장.
그렇다면, 트로이카는 과연 이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을까?
‘나에게만 이런 제안을 했을 리가 없지.’
이안이 제안을 거부하기 위해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전하?”
이안이 적의를 드러내자, 리자드맨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이안의 손에 들린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의 몸에서 풀풀 풍겨 나오는 살기는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니까.
“혹시, 내 제안을 거부하려는 건가?”
이안의 살기가 리자드맨의 비늘을 찔러댔다. 사절이 질린 눈으로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오해입니다. 의문가는 부분이 있다면 전부 설명을….”
“그래, 오해일 수도 있겠지. 근데 말이야.”
리자드맨의 변명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싫다니까?”
이안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결국.
“…알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지요.”
먼저 포기한 것은 사절이었다.
질린 표정으로 황급히 예를 갖춘 리자드맨은 뒷걸음질로 집무실을 나섰다.
[이안, 너무 성급한 게 아니냐? 저들이 어떤 목적을 가진 자들인지 정확히 확인하지도 않고….]
“뭐, 겨우 이 정도로 전쟁이라도 하겠어, 어쩌겠어?”
미미르가 충고했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미 사적인 제안을 한 이상, 약점을 쥔 건 나란 말이지.”
국가의 공식적인 사절로 온 자가 사적인 부탁을 하다니.
이안이 은근슬쩍 연방에 오늘 있었던 일을 흘리기라도 한다면, 저 사절과 사절이 속한 세력의 앞날은 꽤 피곤해질 게 뻔한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촉이 썩 좋지 않기도 하고. 급한 것도 없잖아?”
문장 하나를 대가로 모든 걸 주겠다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제안이지 않은가.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마왕을 처리하지 못했다면 또 모를까, 모든 위협을 제거한 이안의 입장에선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제안이다.
[…정말이지,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 맘대로 해라.]
애오옹
이안의 말을 들은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짓고는, 다시 부드러운 카펫 위를 뒹굴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다 됐군.’
미미르를 보며 실소를 머금은 이안은, 작은 열쇠를 꺼내 책상 서랍의 자물쇠를 풀었다.
끼이익
서랍을 연 이안이 안에서 꺼낸 것은, 한 권의 얇은 책.
이안은 손에 쥔 책의 표지를 훑었다.
[이계에서 온 강민혁을 위한 아스텔리아 안내서]
놀랍게도, 표지의 제목은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니었다.
지구의 수많은 국가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사용하는 한국어.
그렇기에, 이안은 이 책을 얻기 위해 용족의 제1장로인 벨라크론과 거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펄럭
이안이 펼친 페이지는, 텅 빈 백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지를 넘겼지만, 책 속엔 글자는커녕 먹물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벨라크론에게 따져야지, 원. 이건 그냥 사기잖아?”
책상 위에 책을 내동댕이친 이안은 기지개를 켜며 짜증을 냈다.
이 책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이안은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봉인을 풀어내는 비약과 마법부터, 마력과 오러를 책 안에 불어 넣어보기까지.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단 말이지.’
결국, 이안이 용족을 영지로 받아들이면서 건진 것은, 한글 제목이 달린 일기장 한 권뿐.
“여기다 직접 쓰란 소린가?”
에이, 설마.
잠시 생각한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만드는 가이드라니.
‘숨겨놓은 보물은 바로 너희의 모험이다!’
와 동급일 정도의 개소리다.
제작자가 어지간히 정신 나간 작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헛짓을 할 리 없지 않은가.
“…잠깐.”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뭘 써볼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이안에게는 고향과 관련된 유일한 보물이다.
진짜 일기장도 아닌 이상에야, 이 위에 무언가를 적을 생각을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뭔가 느낌이 오는데.’
이안의 손은 이미 잉크병에 꽂아둔 깃펜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각사각
잉크를 가득 머금은 깃펜의 촉이 하얀 종이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일곱 날개의 용
페이지를 물들인 검은 글자들.
이안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페이지에 적어놓은 문구를 잠시 응시했다.
하지만.
“아닌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이안은 머리를 긁적이곤, 책을 덮으려 했다.
스스슥
책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종이를 물들인 검은 잉크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페이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지!”
자신의 촉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야, 무슨 일이냐?]
이안의 말을 들은 미미르가 놀라 책상 위로 펄쩍 뛰어올랐지만, 이안의 눈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페이지를 물들인 잉크들은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며 내용을 채워나갔다.
곧.
[책의 비밀을 풀어내었군, 이안.]
“그러게.”
책을 빼곡히 채운 글자들을 보곤 고양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글 자체가 열쇠였을 줄이야, 이걸 왜 생각하지 못했지?’
애당초 한글은 이곳 언어가 아니었으니, 책의 봉인을 풀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선 지구의 문자만 한 것이 없었으리라.
“좋아, 그럼….”
봉인을 풀어낸 이안은 기쁜 마음으로 책의 첫 줄을 읽어나갔다.
[일곱 용]
예상치 못한 실수.
이안의 눈이 책 위에 떠 오른 텍스트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아슈타르의 주인은 곧 신검, 레온하르트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
하지만.
“이안 아슈타르.”
신검의 주인이 공식적으로 아슈타르 공작이 되기 위해선 한 가지 절차가 남아 있었다.
“연합왕국의 수호신인 갈리우스와 바드리안 공작령의 지배자인 나, 엘로임 폰 바드리안,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다른 영웅들의 이름으로.”
이안의 앞에 마주 서서 하얀 신성력의 빛을 뿌리는 것은, 만신전의 관리인이자 모든 신의 지상 대리자.
“그대를 새로운 영웅이자 아슈타르의 공작으로 인정한다.”
파앗
일곱 가문의 가주를 뽑는 절차에 따라 의식을 마친 엘로임은 이안에게 축복의 빛을 내리며 즉위식을 마쳤다.
동시에.
“공국의 사람들이여!”
이안의 형이자, 적사자 근위대장에서, 이제는 적사자 신검대의 장이 된 오베르트가 오러를 실어 외쳤다.
“알자스의 해방자이자 영웅제의 제사장이며, 두 마왕의 토벌자, 신검 레온하르트의 주인이신 이안 폰 아슈타르 공작 전하를 맞이하라!”
와아아아아-
오베르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 모인 공국민들로부터 어마어마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이안은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단상을 내려갔다.
“세 번은 못 하겠네, 진짜.”
함성 속에서 단상 아래로 내려온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적의 워 크라이라면 모를까, 수많은 사람 속에서 환호성을 받는 일은 아직도 영 내키지 않았다.
[장례식과 함께한 것 치곤 분위기가 나쁘지 않군. 슬퍼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어.]
단상 아래에서 이안을 기다리던 미미르는 귀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원래 슬픔은 금방 잊히거든.”
슬퍼할 자들은 토벌대가 귀환한 날에 모든 슬픔을 토해냈을 터.
거기에, 뒤이어 열린 이안의 성대한 즉위식은 남아있던 슬픔의 찌꺼기를 씻어내기에 충분했으리라.
“전하,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단상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기사, 도노반이 다가와 예를 표했다.
“새삼스럽게 축하는 무슨. 박수받으려고 올라간 거지, 뭘.”
“전하께서 여기까지 오실 거라곤,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소신은….”
아슈타르의 폐검, 망나니, 돼지라 불리던 이안이다.
가문에 계속 붙어 있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럽던 그가 아슈타르의 주인이 될 거란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감격에 겨운 노기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 우는 건 나중에 따로 하자고. 지금은 할 일이 많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노기사가 우는 걸 가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네, 전하. 소신이 주책을 부렸군요, 크흠.”
이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노반은 뒤로 돌아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 덕에, 이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럼, 오늘 일정은?”
“저녁엔 즉위식 기념 무도회가 있습니다. 무도회에서 전하를 알현하기로 예정된 인물들은….”
이제는 이안의 개인비서나 다름없어진 노기사는, 주군의 물음에 앞으로의 일정과 만나야 할 인물들을 줄줄이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
“알론소도 온다고?”
이안이 마르센 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연줄이자 전우.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에 이안은 반색했다.
하지만 이안은 알지 못했다.
“그래, 좀 일찍 오긴 했지만 말이지.”
“응?”
익숙한 목소리.
이안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오랜만이네, 이안. 아니, 아슈타르 공작이라 불러야 하나?”
알론소 폰 마르세니아가 씨익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반갑긴 한데, 무슨 일이지?”
이안은 악수를 하며 알론소를 자세히 살폈다.
‘도움을 청하러 온 건가?’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알론소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얘기하긴 곤란할 것 같은데, 차라도 한잔하는 게 어떤가?”
알론소는 이안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도노반을 바라봤다.
“경?”
“무도회가 시작되는 저녁까지는 일정이 없습니다, 전하.”
“그럼 가자고, 친구.”
“고맙네, 친구.”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론소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군.”
알론소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알론소가 한숨을 쉬었다.
“세력싸움에선 이미 진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제도에 너무 늦게 돌아간 탓이지.”
“용혈을 깨우면 될 거라며?”
“아바마마께서 정정하셨다면 모르겠지만…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지.”
말을 마친 알론소가 고개를 떨궜다.
황제가 갑자기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다음 황위는 분명 정통성을 가진 알론소의 것이 되었을 터.
그에게 아쉬움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리라.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하지만 이안은 위로해 주는 대신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알론소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용의 인장으로 봉인되어있는 조그마한 봉투.
“이건?”
봉투를 건네받은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초대장이지.”
“초대장?”
“그래, 정확히는….”
목이 타는지, 식어버린 찻물을 들이킨 알론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바마마의 초대장이다.”
순간.
“…뭐?”
이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