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전하, 기사단을 해체한다니요!”
이안의 선언을 들은 순간, 칼리번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슈타르는 신검의 땅이라는 것을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아슈타르는 본디 검에 모든 것을 건 가문.
그러니, 검에 미친 놈들만이 모여있는 기사단은 아슈타르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근위대를 해체한다라.”
물론, 불만을 가진 것은 기사단뿐만이 아니었다.
“근위대가 가주와 가문의 직속 호위기관인 것은 알고 있느냐?”
기사단이 아슈타르의 검이라면, 근위대는 아슈타르의 주먹.
가문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가주가 믿을 수 있는 마지막 전력이 바로 근위대이지 않은가.
“네가 하려는 것이, 가문의 팔을 잘라 먹는 행위라는 것쯤은 생각하고 입을 열거라.”
말을 마친 오베르트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아슈타르를 이끄는 가주의 힘은 본신의 능력과 신검의 권위, 근위대의 무력에서 나오는 것.
그의 눈에, 이안의 말은 아슈타르의 근본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로밖엔 보이지 않았으니까.
“형님.”
물론.
“그 팔, 이미 잘린 것 아닙니까?”
이안 역시 할 말은 많았다.
“뭣?”
“복구하는 데 30년이나 걸리는 근위대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형님께서 마스터의 벽을 뚫으신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이안이 빈정거리자 오베르트는 반박하려 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지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안의 말이 틀렸냐고 묻는다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서른의 근위대 중 남은 것은 그 혼자뿐이었고, 이를 두 글자로 줄이면 전멸(全滅).
그가 오러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홀로 다른 자격자들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말을 잠시 멈춘 이안은, 칼리번과 눈을 맞추곤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제 신검은 없어, 기사단장. 다른 게 있을 뿐이지.”
“저, 전하!”
중동의 부호가 벽에 장식해뒀을 법한, 황금색의 사자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글록 18C.
레온하르트의 잔해를 흡수한 미미르를 쥔 이안에게, 칼리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너라면 무언가 계획이 있겠지.”
오베르트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막냇동생이 맘에 들지 않는 놈인 건 사실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이안은 마왕 둘을 잡아내었지.’
수백 년간 아무도 성공시키지 못한 일을 해낸 동생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기대를 해봐도 되는 게 아닐까.
오베르트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부대를 만들 생각입니다.”
“새로운 부대?”
“그러니까, 기사단으로 구성된 근위대 같은 걸 말이죠.”
“그게 무슨….”
세 사람은 이안의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안의 설명은 계속됐다.
“이름은… 근위대를 잇는 부대니 적사자 신검대 정도가 좋겠군요. 저는 검을 다루지 않으니까, 저와 분리돼서 독립적으로 움직여줄 부대가 필요합니다.”
초장거리 공격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이안에게,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기사들은 큰 의미가 없었다.
미미르가 부리는 고양이들에게 호위를 받을 수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신검대의 장은 오베르트 형님께서 맡아주시면 될 것 같고….”
“잠깐.”
이안의 설명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오베르트는 말을 끊었다.
“그, 신검대라는 게 근위대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건.”
“예, 전원이 페르소나를 다루는 부대를 만들 겁니다.”
“뭐?”
오베르트는 어이가 없었다.
그야, 부대 전원에게 대 마족병기인 페르소나를 갖추게 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이안, 그게 내가 근위대를 재건하는 것과 무슨 차이지?”
아슈타르가 한 해 동안 구현의 방에서 얻을 수 있는 페르소나는 단 하나.
그 말인즉슨, 신검대인지 신검 나부랭인지를 만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 역시 수십 년이 걸린다는 것 아닌가.
“중요한 차이가 있죠.”
오베르트가 허를 찔렀음에도 이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페르소나를 구할 수 있으니까요.”
“내 평생 가장 어처구니없는 소리군.”
이안의 대답을 들은 오베르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페르소나를 구할 수 있다고? 설마, 다른 공작들에게 얻어오겠다는 소리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페르소나는 양도도, 교환도, 강탈도 할 수 없는 신의 병기다.
미미르가 신검 레온하르트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신검이 페르소나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다른 공작들에게 지원 따위를 받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려는 거라면….”
오베르트는 어리석은 동생에게 독설을 쏘아붙여 댔다.
하지만.
“프레이야.”
이안은 대답 대신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네, 관리자님. 부르셨나요?]
파아앗
허공에 빛을 뿌리며 나타난 것은, 페르소나의 제작시스템을 통제하는 제어정령.
“저, 정령이라고?”
“전하, 언제부터 정령술을….”
이미 정령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 파비안을 제외한 두 사람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하지만.
“프레이야, 제작시스템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페르소나의 일간 생산량은?”
[많은 숫자를 만들어내는 건 어렵습니다. 병기급이라면 아마도, 하루에 셋 정도는 가능할 것 같지만요.]
정령의 말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 만큼은 아니었다.
“페르소나를, 하루에 셋씩 만들어낼 수 있다고?”
프레이야가 내뱉은 말은, 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지금까지의 상식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자,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셋과 눈을 마주친 이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결국, 이안의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 기사단을 해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은사자 기사단은 아슈타르의 검. 해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사단이 해체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기사들조차도.
“신검대에 배속된 모든 오러 사용자에겐 새로운 페르소나가 지급될 것이다.”
라는 말을 듣고는 잠잠해질 정도였으니까.
“반발이 적으니 편하긴 하네.”
[공국에서 페르소나를 가진다는 건,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일이니까.]
애오옹
집무실에 누운 이안이 중얼거리자, 미미르가 카펫 위에서 뒹굴거리며 말했다.
[일 년에 한 명만 얻을 수 있는 영예의 상징을 나눠주겠다는데, 거부할 기사들이 있을 리 없지.]
명예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훈장과는 달리, 페르소나는 명예와 무력 모두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무력을 숭배하는 기사들의 화를 진정시키는데, 페르소나만 한 선물은 없으리라.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의도가 기대 이상으로 먹히는 일이 나쁠 일은 없지 않은가.
“후우, 이제 오후 작업을 시작해볼까.”
흡족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켠 이안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전하.”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아인 연방으로부터 사절이 찾아왔는데, 어찌할까요?”
“연방?”
아인 연방이라면 이안도 알고 있다.
제국의 북쪽에 존재하는, 요정과 난쟁이들을 제외한 모든 아인종, 그리고 인간들의 거대한 연합체.
교통의 요지인 알자스인 만큼, 연방의 끝자락과 맞닿아 있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 사절이라니, 무슨 생각이지?”
하필이면, 아슈타르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나서야 찾아오다니.
그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하지 않은가.
[마왕을 처치했으니, 축하 인사라도 보낼 모양이지.]
“그런 거라면, 구스타프 놈들보다는 인성이 괜찮은 편이겠다만.”
그 꿍꿍이를 모르니, 이안의 마음은 조금 찝찝했다.
“들여보내.”
어차피 선택은 정해져 있었지만.
이안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이익
문이 열리며 사절이 들어왔다.
사절의 모습을 본 순간.
“공룡?”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름 이안에게 인종이나 이종족에 대한 차별의식 따위는 없었지만.
쿵 쿵
갈색으로 번들거리는 비늘과 세로로 찢어진 눈, 손발에 도드라진 발톱과 기다랗고 통통한 꼬리.
‘랩터에 옷을 입혀놨군.’
지구에서 이미 멸종한 존재를 집무실에서 마주할 거라곤 상상치 못했던 이안은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공룡이라니? 설마, 리자드맨이 뭔지 모르는 것이냐?]
이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미미르가 종족의 이름을 정정해 주었다.
그것도 잠시.
“마왕살해자를 뵙습니다.”
랩터를 닮은 리자드맨이 이안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마왕살해자?”
“두 마왕을 이 대륙에서 소멸시킨 위업을 달성한 분께 어울리는 칭호지요.”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랩터의 호칭에,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직 외부에는 공표하지 않았는데?”
그가 두 마왕을 소멸시킨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들은 그 소식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연방의 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전하와 적대하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잔혹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리자드맨은 말실수라도 한 듯 놀라 손사래 쳤다.
하지만.
‘일부러 던져본 거군.’
독심술을 쓰지 않고도, 이안은 쉽사리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손사래를 치는 랩터의 눈빛은, 전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그의 예상대로, 랩터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흰 그저, 전하께 제안 하나를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제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자, 이안은 손에 깍지를 꼈다.
“그건, 연방의 공식적인 제안인가?”
“아닙니다.”
“그래, 연방도 썩 사정이 좋진 못한 모양이야?”
한 국가의 사절로 온 자가, 다른 나라의 지도자에게 사적인 제안을 한다.
그 말에 담긴 복잡한 일들이, 이안의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아마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실 겁니다.”
사절은 부정하지 않았지만, 제안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것이, 이안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 무슨 제안이지?”
이안은 일단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리자드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슈타르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마족에게 복수할 힘도 빌려드리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약속이 지켜진다는 전제하에, 말 그대로 무제한이라 해도 좋을 만큼 전폭적인 지원이지 않은가.
“그 대가는?”
당연히, 그 대가 역시 만만치 않을 터.
“별 것 아닙니다.”
이안의 물음에, 리자드맨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문장을 전하의 손에 새기시는 것, 그 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고작해야 문장 하나를 새기는 것으로, 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니.
“이 문장은 단순히 저희와의 연락을 위한 물건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마력계약서를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말을 마친 랩터의 표정에는, 한 치의 주저도 없었다.
하지만.
“거부한다면?”
리자드맨이 내민 문양을 본 순간, 이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저희에겐 어마어마한 손해나 마찬가지니까요.”
사절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마치, 너 말고도 이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은 많다는 듯이.
하지만.
“그렇다면, 나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지.”
이안에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철컥
상대가 이안에게 쥐여 주려던 그 문장에는.
“그 더러운 문양 들고 꺼져, 죽고 싶지 않으면.”
너무나 익숙한.
일곱 색깔의 날개를 가진 용이 새겨져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