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아슈타르를 침공한 마왕군은 크게 둘로 구성되었다.
적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기 위해 데려온 마수들과 때를 기다리며 전력을 보존하고 있는 마경의 마족들.
마수들이 몸으로 적들의 힘을 빼놓은 다음, 힘이 빠진 적들을 마족들이 마무리하는 방식은, 마경의 주민들이 자주 구사하는 전략 중 하나였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강력한 전략.
적들은 상대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면서도 당해 줄 수밖에 없다.
쐐애액-
오랜 적, 아슈타르 역시 그랬어야 했지만.
“바르바토스. 앞을 봐라.”
단탈리안은 입술을 깨문 바르바토스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 저 너머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쐐애액-
저 멀리, 적진에서 기다란 기둥이 불을 뿜으며 날아들었다.
콰과광!
기둥이 폭발하는 순간, 한데 모여 달려가던 마수들을 집어삼켰다.
카오오….
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은 양반이었고, 대개는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쐐애액-
쐐애액-
적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사실.
콰과과광-
“이게 네 계획이었나? 마수들을 죄다 갖다버릴 생각이었다면, 정말이지 대단하군.”
화염과 비명에 휩싸인 전장을 바라보던 단탈리안은 입에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성을 냈다.
“갖다버렸다니, 어차피 이렇게 쓰려고 데려왔던 거 아냐? 이제 놈들의 전력을 확실히 알았으니까, 마족들을 몰아붙이기만 하면….”
“저 마법을 보고도 아직 그런 말이 나오는 거냐?”
하지만 단탈리안은 단숨에 바르바토스의 말을 끊어버렸다.
쐐애액- 쐐액-
하늘에서 끊임없이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마법.
그것이 다연장로켓 발사차량, 구룡에서 쏘아 올린 130밀리 로켓이란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콰과과광-
조만간 저 마법이 마수들을 몽땅 갈아버릴 거란 사실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이대로는 가망이 없어. 지금이라도 놈들의 본진을 바로 쳐야 해. 저기, 저주받을 가울드 놈까지 데려왔지 않느냐.”
정령왕의 계약자는 아무리 마왕이라도 껄끄러운 상대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한다면, 분명 저주받을 일곱 필멸자의 후예들이 그들을 사냥하러 달려들 터.
“네가 싫다면 나 혼자라도 가지. 이렇게 개죽음당할 생각은 없으니까.”
스스스
말을 마친 단탈리안은 마기를 뿜어 전신을 감쌌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가신들을 모아, 저 필멸자 놈들의 뒤통수를 칠 생각으로.
“아니, 이대로 가야 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자, 단탈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저게 안 보여?”
그녀에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마수들이 죽어 나가는 거라면 이미 실컷….”
“놈들이 도망치고 있다고.”
“뭐?”
그녀의 말에, 단탈리안은 다시 적진을 살폈다.
“…진짜군.”
끈질기게 버티던 필멸자의 군대도, 정령왕을 부리던 환세공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놈들이 만들어놓은 구덩이와 마수들의 시체뿐.
“도망갈 시간을 벌려던 것이었나….”
단탈리안은 금세 필멸자들의 수를 읽어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마수들과 곧 들이닥칠 마족들.
공격을 버티지 못한 필멸자들은, 마지막 힘을 쥐어짠 다음 저들의 성으로 후퇴했으리라.
“어때? 이래도 혼자 나갈 셈이야?”
온몸에 둘렀던 마기를 흩어낸 단탈리안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바르바토스가 생글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한 번만 더 속아주지.”
“진작 그럴 일이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친 필멸자 놈들을 쫓을 생각에, 두 마왕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쐐애애액-
하지만 그들의 웃음은 곧 멎었다.
조금 전 마수들을 도륙했던 정체불명의 마법.
수십 개의 금속기둥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설마, 우리를 저 마수들과 동급으로 보는 것인가. 실망이로군.”
적의 마법이 빠르게 날아들었지만, 불쾌해진 단탈리안은 코웃음을 치곤.
스으으
하늘에서 낙하하는 로켓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꾸득 꾸드득
순간,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짙은 마기가 나무 덩굴을 형태를 이루곤 그물처럼 엮이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마기로 이루어진 그물은 쏟아지는 로켓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이윽고.
“허술하도다, 허술해.”
꽈악
단탈리안이 주먹을 쥐자, 마기의 그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생각보단 별 위력이 없군. 마수들에게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인가?”
폭발이 일어나지 않자, 단탈리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물을 잡아당겼다.
이내 꽁무니에서 흰색 연기를 뿜어내는 금속기둥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흠, 단순히 금속기둥에 불꽃으로 추진력을 더했군. 고작 이 정도로….”
어떻게 그런 위력을 뿜어낸 것일까.
그가 낚아챈 것이 탄두가 들어 있지 않은 훈련탄이란 사실을 알 리 없던 단탈리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뭐야.”
마왕은, 금속기둥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순간.
“이, 이 자식이….”
기둥마다 박힌 글자를 읽어낸 단탈리안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왜, 그래? 단탈리안.”
“네가 직접 보는 게 빠를 것 같군. 감히 필멸자 주제에….”
“아니, 대체 뭔데….”
화를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떠는 단탈리안.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바르바토스의 시선이, 저절로 바닥의 금속기둥들을 향했다.
[야, 마왕.]
[우는 거야?]
그녀가 금속기둥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낸 순간.
“아슈타르 놈….”
콰드드득
금속기둥을 단숨에 부숴버린 그녀가 뿌득, 이를 갈았다.
***
“좋아, 놈들이 온다.”
아슈타르 성의 두꺼운 성벽 위.
쌍안경으로 적들의 이동을 확인하던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지금이라도 생각을 달리해보는 게 어떠냐.]
이안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는 미미르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이미 레온하르트 그 자체가 되어버린 그에게, 아슈타르를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안 그래?’
이안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손을 휘저어 쌍안경을 마력으로 되돌린 그가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늘어선 자들은, 아슈타르의 모든 힘.
“모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알고 있을 거고.”
이제, 계획을 시작할 때였다.
아슈타르가 자랑하는 은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사냥단, 그들을 지원할 마탑의 마법사들.
더해서 환세공과 윌리엄, 신성기사단과 신관들에 탈마공의 지원병력까지.
아슈타르가 부릴 수 있는 모든 전력 앞에서, 이안은 입을 열었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이미 작전내용에 대해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작전을 실행할 의지.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잃어야 하겠지.”
이안의 말을 들은 아슈타르의 전사들이 움찔했다. 누군가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갈았다.
아슈타르를 치러 온 두 마왕을 향해.
그리고, 이 계획을 세운 장본인인 이안을 향해.
“그러니.”
하지만.
“목숨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너희는 아슈타르의 마지막 기둥이니까.”
이안의 말을 들은 기사와 마법사, 병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희의 목숨이 계획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위험하면 뒤로 후퇴하고,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 도망쳐라. 그게 너희와 아슈타르를 위한 길이니까.”
더는 저들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저들이 후퇴하고 뒤로 밀려야만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전사들.
말을 마친 이안은 그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아, 다른 공가들은 제외입니다. 그쪽은 부탁드린 것만 빼곤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이안은 환세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탁 이래 봐야, 마족들 때려잡는 것뿐이지 않나. 그것만큼 잘하는 일도 없지.”
그의 말에 환세공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옆에 서 있던 파이톤이 코웃음 쳤다.
“참, 나. 그냥 대놓고 죽어달라는 거 아냐?”
“안 되나?”
“미안한데, 난 연구가 끝날 때까진 못 죽거든? 너도 마찬가지고.”
파이톤이 이안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저희 역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흐으….”
척
윌리엄과 신관들, 그리고 신성기사단까지.
모든 준비를 마친 자들은, 이안의 한 마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럼, 살아서 봅시다.”
이안의 말과 동시에.
최후의 계획이 막을 올렸다.
***
빠르게, 더 빠르게.
상대할 적을 잃어버린 마왕군은 아슈타르 성을 향해 진격했다.
스으으-
이미 이지를 잃어버린 마수들과 그 사이에서 마수들을 이끄는 마족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는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이제는 이곳이 마경인지, 인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오염.
“아슈타르….”
“사지를 찢어주마, 필멸자 놈.”
그들의 선봉에, 분노한 두 마왕과 마족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쐐액
가장 높은 곳까지 날 수 있는 마수, 블랙 와이번에 탑승한 두 마왕과 마족들은 용과 비견될만한 속도로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래, 쥐새끼같이 거기 숨어 있을 셈이란 말이지?”
그들의 목표는 아슈타르 성.
저 혐오스러운 요새를 부수고 그 안에 있을 신검의 핏줄을 도륙 내야만, 그녀의 복수심을 충족할 수 있으리라.
파아앗
순간, 그녀의 눈이 빛났다.
“가라.”
지배력을 깨워낸 그녀가 명령을 내리자, 마수들이 파도처럼 도시를 덮쳐나갔다.
콰득 콰지직
장애물을 만나면 부수고, 벽이 가로막으면 무너뜨렸다.
이지를 잃어버리고 본능만이 남은 마수들에게 남은 것은 무차별적인 파괴욕뿐.
이대로라면, 슈바이크와 아슈타르 성은 곧 지도에서 사라져버리리라.
단지.
“뭐야?”
그 무차별적인 파괴가, 그녀의 성에 차지 않았을 뿐.
“전부 도망갔군.”
도시를 한 번 훑어본 단탈리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성벽과 건물을 부숴도 보이는 것은 돌덩이와 흙먼지뿐, 핏자국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설마 자기 땅을 버린 거야? 저 검에 미친 놈들이?”
바르바토스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쳐들어온다고 도망갈 놈들이라면, 애초에 마경까지 쳐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나쁜 건 아니지.”
아슈타르는 칠 영웅이 세운 연합공국의 한 축을 차지한다.
연합공국은 인계를 지키는 방벽.
그 벽에 구멍 하나를 뚫어낸다면, 인계로의 침공도 이전보단 손쉬워지지 않겠는가.
“인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단탈리안은 입맛을 다셨다.
마경의 열한 군주 중, 지난 800년간 인계 침공에 성공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메피스토에게 자랑할 게 하나 생기겠군.”
“그럴지도?”
돌연, 그들의 마음속에 욕망이 일었다.
분명, 연합공국의 다른 여섯 공작을 뒤에 두고 인계를 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인계를 처음 밟는 마경의 군주란 위업은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우우웅
두 마왕의 몸속 깊은 곳에 뿌리박힌 마석이 부르르 진동했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순서는 확실히 하자고. 인계 침공은 아슈타르 놈을 찢어 죽이고 난 다음이야.”
둘의 의견이 일치한 순간.
쿵 쿵
마수들의 등 뒤에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마족들이 진군했다.
생김새도, 능력도 제각기 다른 마족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마수와는 비교할 바 없는 힘을 지닌 자들.
두 마왕이 힘을 합친다면,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아슈타르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저주받을 요새를 부수기 위해, 두 마왕과 마족들은 빠르게 접근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시 안으로 진입한 순간.
지이이잉
“응?”
무언가 솟아나는 것 같은, 등 뒤에서 들려온 불쾌한 소리.
바르바토스는 진격을 멈추곤 등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이게 뭐야?”
파아앗
벽이었다.
마력과 신성력이 가득 담긴 황금색의 결계가, 반쯤 부서진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함정인가?”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두 마왕이 채 상황을 깨닫기도 전.
우우웅
아슈타르가 가진 유일한 1급 비행전열함.
골든 라이온이 성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로 떠오르는 거대한 비행함의 갑판 위에 선 것은, 오직 이안 한 명뿐.
“공격.”
쌍안경을 쥔 이안이 나직이 명령을 내린 순간.
콰아아아-
아슈타르가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