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시간 낭비했군. 아슈타르의 새로운 가주가 저런 미친놈이었다니.
픽
이안이 말을 마치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은 참룡공의 홀로그램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보게, 신검공. 패기는 좋지만 패기만큼의 실력도 갖춰야 하지 않겠나?
다른 공작들의 표정 역시 썩 좋지는 않았다.
-아아, 저 강단 좀 봐. 꼿꼿한 것이 활시위로 만들어버리면 딱이겠는데 말야.
-어처구니가 없군….
성광공과 심안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폭권공은 무감정한 눈빛으로 이안을 쏘아봤다.
-그래, 어디 말이나 해보게나. 우리가 멸망할 아슈타르를 돕는 것이 어째서 기회인지.
이안의 미친 소리에 흥미를 느낀 사람은 오직 탈마공과 환세공 뿐.
마왕이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짓자, 이안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슬쩍 숙였다.
탈마공이 아니었다면 분위기를 이끌어가기 힘들었을 테니까.
“간단합니다.”
이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 아슈타르의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신마전쟁 이후 한 번도 힘을 합치지 않았던 마왕들이 함께 침공한다는 전대미문의 사태.
“아슈타르가 여러분께 받아야 할 지원 또한, 적은 숫자는 아니겠지요.”
두 마왕으로부터 아슈타르를 돕기위해 지원해야 할 병력도 병력이지만, 지원한 병력들이 무사히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한들, 영지의 전력을 깎아 먹는 것을 기회라 부를 순 없을 터.
“그러므로.”
하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아슈타르는, 여러분의 도움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슈타르에 빚을 지울 기회라는 의미가 아닌가.
말을 마친 이안이 다시금 여섯 공작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였다.
-흠….
다섯의 공작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성광공 엘로힘 폰 바드리안이었다.
-살면서 신검공에게 빚을 지워볼 일이 언제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 생기게 되겠군.
만신의 지상대리자라 불리는 노구의 사내는,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꼬맹이, 네가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심안공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설사 우리가 빚을 내준다 해서, 아슈타르가 그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빚은 아무나 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과 신용이 먼저 증명되어야지만 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녀의, 아니 다섯 공작의 눈에, 아슈타르는.
-언제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말야.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조차 불투명했으니까.
[이안, 이제 어떻게 할 테냐?]
그의 어깨 위에 올라와있던 고양이, 미미르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가 알기로.
[너라면 분명, 무언가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테지.]
그의 주인은 인정에 호소하는 성격이 아니지 않은가.
이안은 미미르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현재의 아슈타르에게, 마왕 둘을 막아낼 만한 힘은 없어보일테니까요.”
대신, 심안공의 질문을 듣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의심은 분명 합당했고, 이안 역시 이런 질문이 나올거라 예상하지 않았는가.
-그래, 주제파악은 할 줄 아는구나? 알리아에게 듣던 거랑은 조금 다른 거 같은데.
순간, 이안은 눈살을 찌푸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어쨌건, 자신의 물주가 되어줄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이안은 한 번 숨을 고르고는.
“지금부터 제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기대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섯의 공작을 향해.
펄럭!
“작전명, 쌍둥이 탑입니다.”
빼곡하게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펼쳐보였다.
***
-내일까지 확답을 주도록 하지. 흥미롭군.
말을 마친 성광공의 홀로그램이 꺼져버렸다.
남은 것은 한 명뿐.
-이보시오, 신검공.
마치 고대 중국에서나 입을법한, 소매 품이 넓은 청색의 도복을 입은 백발의 사내.
“무슨 일이신지?”
환세공, 웨인 폰 가울드의 부름에 자리를 뜨려던 이안은 고개를 들어 노인을 마주했다.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헤어지는 마당에 자신을 불러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안은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환세공을 바라봤지만.
-당신, 마음에 드는군!
다행히도, 실수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환세공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그 기개, 참으로 마음에 들었소. 내 곧 만족할만한 답을 주리다.
픽
말을 마치자마자, 노인의 홀로그램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야.”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져버리다니.
황당해진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긴 것 답지 않게 제멋대로군. 환세공가의 특질이긴 하다만.]
애오옹
소파에 누워있던 미미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생각해도 될 거야, 이안. 환세공가의 사람들은 내뱉은 말을 지키니까 말야. 만족할 만한 답을 준다 했으니 그 말을 지킬거다.]
“그래만 준다면 좋겠는데 말야.”
어쨌건 이안에겐 그들의 지원이 필요했으니까.
다른 공작가들이 아슈타르를 지원해 준다면, 계획의 성공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가리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겠지.”
연합공국의 지원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왕을 잡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늘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안의 시선이 집무실 밖으로 난 창을 향했다.
“어이, 이쪽이야!”
“짐은 적당히 챙기십시오! 행군 속도가 느려집니다!”
“차례대로! 천천히!”
아슈타르의 중심, 슈바이크를 떠나는 수 많은 사람들.
등에 짐을 진 사람들의 행렬이 마치 개미떼처럼 보였다.
[저들은 다시 돌아오기 힘들겠군.]
“뭐, 재건이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건, 이 세계엔 기계를 대체할 마법과 신법이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그것을 걱정하기 위해선.
“일단 마왕들을 처리해야 재건을 하건 뭘 하건 하겠지만.”
재건할 사람이 다 죽었는데 무슨 수로 재건을 하겠는가.
그렇기에, 이안의 계획은 무조건 성공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삐이이-
“왔군.”
통신마법기에서 기다리던 벨소리가 울려왔다.
이안은 곧장 마력을 움직여 마법기를 작동시켰다.
-공작 전하.
“아직 공작 아니라니까. 내가 분명히 말 했을 텐데?”
마법구슬 위로 떠오른 파비안의 환영이 예를 갖추자, 이안은 손을 내저었다.
-신검의 주인은 곧 아슈타르의 주인이지 않겠습니까. 순서의 차이일 뿐이죠.
하지만 파비안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진 이안은 화두를 돌렸다.
그가 원한 것은 말장난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됐고, 마왕들은?”
-곧 움직임을 보일 것 같습니다. 지난번 토벌 이후로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의 영지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게 좀 걸리긴 합니다만.
파비안은 자신이 알아낸 결과를 말하곤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혹, 전하께선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뭐,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지.”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가 페르소나로 구현해 낸 에이테킴스(ATACMS)에서 쏟아진 자탄들엔, 페르소나로부터 비롯된 마력과 신성력이 담겨 있었으니까.
“자탄이 천 구백 개니까, 놈들이 맞은 자탄 숫자가 대충 오백은 되지 않을까?”
자탄의 폭발에 휘말릴 때마다, 신성력은 가랑비에 옷 젖듯 마왕들의 몸에 조금씩 축적되었으리라.
[그만한 숫자였다면, 성 하나가 거의 정화되었겠군.]
자신이 쏘아낸 병기가 그렇게 강력한 위력을 지닐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미미르의 눈이 커졌다.
“…제 생각보다 무서운 무기였군요.”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마왕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라니.
새삼 이안의 힘을 깨달은 파비안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론 마왕을 끝장낼 수 없단 거, 알잖아?”
심지어, 저 병기를 구현해 내기 위해 이안은 페르소나와 모든 힘을 모두 짜내지 않았던가.
마왕의 발을 좀 묶어두는 대가라기엔 좀 지나쳤다.
그러기에, 이 계획을 준비한 것이 아닌가.
“병력들의 배치상태는?”
-기사단장, 마탑주, 제독과 협의하여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처음 보는 병력배치라서 아직 적응훈련중입니다만….
“대피준비는?”
-예정대로, 사흘 안에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탑의 힘을 빌려서 성내의 보물들과 문서들도 전부 알자스로 옮긴 상태고요.
“예정된 시간까지만 끝내라고 전해.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파앗
용무를 마친 이안이 손을 내젓자, 파비안의 홀로그램이 꺼져버렸다.
“지금까진 계획대로고.”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이안의 계획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리라.
이제 남은 건.
“내가 움직여야지.”
마왕을 지옥의 아가리까지 끌어내는 것뿐.
우웅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의 몸에서, 금색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
마족은 마수를 지배한다.
마족이 지배하는 땅인 마경에서, 이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마족도 수만의 마수를 부릴 능력은 없었다.
그만한 지배력을 가진 존재는 마경에 오직 열하나뿐.
“조금 모자란 것 같은데, 애들을 좀 더 모아와야 하는 것 아냐?”
오우거의 어깨 위에 마련된 가마에 드러누운 바르바토스가 옆 오우거의 가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인지, 그녀의 얼굴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렇다면 다른 마왕을 끌어오지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뿌드득
그녀의 말에 단탈리안은 코웃음을 치고는, 이를 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마음속에 찌꺼기나마 남아 있던 자비와 이해심은 사라진 지 오래.
“그, 빌어먹을 필멸자놈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감히, 자신의 성에 신성력을 가득 부어버린 빌어쳐먹을 놈.
그것이, 단탈리안이 인계침공을 계획한 이유였다.
그것이 비록 다른 마왕과의 협동이라 하더라도.
“이안, 이안 아슈타르.”
이안에게 악의를 품은 것은 바르바토스 역시 마찬가지.
이안의 이름을 씹어뱉은 그녀의 눈에선 싸늘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만한 숫자의 마수와 마족들이라면 분명히 놈을 잡아낼 수 있을거야.”
“그 날이 기대되는군. 놈의 팔다리를 뽑는건 내가 먼저다.”
“아니, 내가 먼저야.”
“그렇다면 난 놈의 영혼을 챙겨가지.”
아직 침공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두 마왕은 이미 이안을 손에 넣은 것마냥 티격대기 시작했다.
두 마왕 모두, 침공이 실패할거라는 생각은 털오라기 만큼도 없었다.
퍽
순간,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바르바토스는 세상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아니었다.
콰우-
기울어버린 것은, 그녀가 타고 있던 오우거.
심장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오우거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쓰러지는 오우거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이, 이 자식….”
바르바토스는 누가 오우거를 쓰러트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퍽 퍽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정확히 오우거들만 노리는 필멸자.
“아슈타르….”
이안 아슈타르가, 그 너머에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