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96화 (97/224)

#96화

우중충한 날이었다.

쏴아아아-

골든 라이온과 하이랜더가 아슈타르 성에 귀환할 즈음, 구름은 비가 되어 쏟아졌다.

“토벌대가 돌아왔다!”

뿌우우-

병사의 외침과 함께, 귀환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성을 울려댔다.

“토벌대가 벌써 돌아왔다고?”

“역시, 마왕 따위가 신검공을 어떻게 할 리가 없지 않았겠나!”

나팔소리를 듣자마자, 토벌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슈타르의 사람들은 빗줄기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왜 두 척뿐이야?”

“나머지는?”

돌아온 함대를 목격한 영지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 원정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열 척이 넘었던 함대는 어디로 가고, 돌아온 것은 고작 두 척.

그리고.

“기, 깃발이….”

성 꼭대기에 걸린, 황금 사자가 포효하는 문양이 새겨진 문장기.

녀석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보다 살짝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조기(弔旗).

의미는 너무나 분명했다.

“설마?”

“원정이, 실패했다고?”

토벌에 성공했다면 조기를 내걸 이유가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슈바이크 전체로 퍼져나갔다.

“성으로 갑시다! 기사님들과 마법사님들을 도와야죠!”

“어서 부상자들을 수습해야 해! 서둘러!”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지민들은 줄을 지어 성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끼이이이익

하지만 그들은 성안에 들어설 수 없었다.

토벌기간 동안 굳게 닫혀있던 아슈타르 성의 정문이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열린 순간.

“아아….”

“…말도 안 돼.”

“신검이시여….”

털썩

아슈타르의 영지민들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

“…부대, 전진.”

근위대장인 오베르트의 선창과 함께, 2열로 선 병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성문을 나섰다.

선두에 선 이들이 들고 있는 것은, 금색의 사자문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거대한 관(棺).

이토록 호화로운 관에 안치될 자는 아슈타르에서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아아, 아아아….”

“공작 전하….”

신검공, 에드너 폰 아슈타르.

가주의 관을 목도한 자들이 빗속에서 오열했다.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들고 있는 것은 죽은 병사들의 유품.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들의 슬픔은 멈추지 않았다.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버지.”

그 행렬에 이안은 없었다.

시꺼먼 하늘을 향해 심심한 사과를 전한 이안은 페르소나를 움직였다.

우우웅

푸른색의 마력 덩어리가 뒤틀리고 꺾이면서 병기의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이안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철컥

“아무래도,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서 말이죠.”

아슈타르를 지켜달라는 전대 신검공의 부탁.

비에 젖은 105mm 야포에 주먹만 한 공포탄을 집어넣은 그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폐쇄기를 닫은 이안은 방아끈을 쥐었다.

이런저런 안전책을 세워둘 생각이긴 했지만, 그가 진행하려는 계획은 여전히 도박에 가까웠으니까.

아슈타르의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막심했다.

그래도.

“대신.”

한 가지 만큼은, 약속할 수 있었다.

“저승길 동무는 만들어드리죠.”

반드시.

쿠웅-

방아끈을 당기자, 희뿌연 포연이 빗속에 녹아내렸다.

***

장례가 끝났다.

정식 장례식은 마족의 침공을 막아낸 이후, 즉위식과 함께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공작대행.”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방금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장례가 끝난 다음 날.

이안은 공작대행의 권한으로 아슈타르의 모든 가신을 불러모았다.

그중 한 사람.

“설마, 헛소리나 하려고 바쁜 사람들을 불러모았겠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점에선 동일하군요.”

아슈타르 남부의 해안을 영지로 삼은 자이츠 모레인 백작.

이안의 말을 듣자마자,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슈바이크와 아슈타르성의 모든 주민을 다른 영지로 소개한다니요. 공국이 세워진 이후 여지껏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있어서도 안 되고요.”

말을 마친 그의 얼굴은 곤란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슈바이크는 아슈타르 공작령의 중심도시이자, 거주하는 영지민만 수십 만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

고작 며칠 만에 그 많은 주민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물자와 인력이 동원되리라.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희 백작령에선 그 많은 주민들을 수용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하나였다.

“영지를 가진 다른 귀족들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을 마친 자이츠가 고개를 돌려 자리에 앉은 가신들을 둘러봤다.

“그건….”

“그렇긴 한데….”

가신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몇몇은 공감이라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물론, 백작과 이미 입을 맞춘 자들.

가신들의 반응을 확인한 백작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백작, 공작 대행께 말씀이 지나치시오.”

말을 마친 자이츠가 희미한 미소를 짓자, 파비안이 언성을 높였다.

“아직 즉위하시진 않았지만, 이미 신검의 주인 자격을 얻은 분이거늘. 그대는 신검을 능멸하려는 것이오?”

아슈타르에서 신검을 쥔 가주의 말은 곧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주군을 모욕하는 파비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도 아슈타르의 사람입니다, 사냥단장.”

파비안의 반응에 찔끔 놀란 백작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공작대행. 하지만 아슈타르를 위해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개 숙인 그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이 정도라면, 공자도 우리의 의사를 충분히 깨달았을 터.’

자이츠를 포함해, 토벌에 참여하지 않은 가신들 상당수는 이안을 아슈타르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검을 휘두르지 않는 자가, 어찌 신검공의 이름을 칭할 수 있단 말인가.’

이안이 검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

신검 레온하르트가 형태를 바꾸었다는 소문도 들려왔지만, 그 이야기를 믿는 것은 마왕 토벌에 참여한 자들뿐.

사실상 신검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 말은 곧.

‘신검 공가도 예전 같지 않단 이야기지.’

어쩌면, 공작가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첫 기회였다.

‘어찌할 겁니까, 이안 공자.’

그가 한 이야기의 속내가 어찌 되었건, 표면적으론 아슈타르를 위한 충언이다.

그를 해한다면 희대의 폭군이 될 것이고, 해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 가문이, 아슈타르를 움직일 수 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상상한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리고.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이안은 후자를 택했다.

‘됐어!’

“아슈타르가 이 땅에 자리 잡은 지 800년이 흘렀습니다.”

이안의 질문을 항복선언으로 간주한 백작은 재빨리 준비해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수많은 마족이 이 땅과 인계를 침공하기 위해 시도했지만, 놈들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요. 물론 갈리우스께서 내려주신 신병, 페르소나와 기사들의 강인함 덕분입니다만.”

흥미로워하는 눈빛을 띤 이안을 바라보며, 백작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 뒤엔 언제나 아슈타르 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슈타르 성.

비행전열함을 움직이는 마력엔진으로 유지되는, 그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마법기인 요새.

“800년 동안 한 번도 뚫리지 않은 무적의 요새 말입니다.”

백작은 녀석의 존재를 거론했다.

“아슈타르 성이 광역 결계를 펼친다면, 남은 병력만으로도 마족들을 쉽게 막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굳이 주민들을 대피시킬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것이, 아슈타르가 적은 병력으로 피해 없이 마족의 침공을 막아왔던 방법.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으니, 내 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말을 마친 백작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미미르에게 모두 들었던 이야기. 백작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근데 말이지, 내가 알기론.”

백작의 주장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마왕 둘이 동시에 공격해온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백작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들이 마주해야 할 적의 규모가, 전례가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것.

“그, 그건….”

“설마, 전에도 됐으니 이번에도 될 거라는 생각인 건 아니겠지?”

“아슈타르 성의 방어력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설사 마왕이 둘이 된다 한들….”

“그럼, 마왕 둘을 상대로 한 기록이 있다면 좀 보여주지 그래? 비밀 서고에도 그런 기록은 없던데 말야.”

이안은 쉴 새 없이 자이츠를 몰아쳤다.

모든 가능성을 이미 체크해 놓았던 만큼,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 그건….”

아슈타르의 피를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서고를 언급하자, 백작은 입을 열 근거를 잃어버렸다.

“그런 것이 아니면, 그냥 내게 반대하려는 것인가 보군. 마왕이 성문을 두드리려는 이 시점에 말이야.”

백작의 눈빛, 혈색, 손과 발의 움직임까지.

독심술을 익힌 이안에게 백작의 속내는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마족 놈들에게 성문이라도 열어줄 생각은 아니겠지?”

피식

농을 건 이안은 백작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백작?”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그, 그건….”

이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작 대행은 지금, 반역을 언급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불손한 마음을 품고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사실은 그러려던 게 맞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목이 잘릴 게 뻔하지 않은가.

백작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등 뒤의 가신들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들 역시 백작의 눈을 피하기에 바쁠 뿐.

“더 할 말이 남았나, 백작?”

“아닙니다,”

결국, 자이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안은 잠시 가신들의 면면을 하나씩 바라본 다음, 입을 열었다,

“지금, 아슈타르는 중대한 위기를 맞이했다.”

위기.

그 말을 들은 몇몇 가신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아슈타르를 이끄는 가주의 입에서 위기라는 단어가 나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안은 그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이니 용서하겠지만, 이후에도 분란을 조장한다면 마족으로 간주하겠다. 내가 마족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기사단장이나 사냥단장에게 확인해보고.”

그저, 신검의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뿐.

“더 할 말 없으면, 모두 움직여. 적들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으니까.”

“아슈타르의 뜻대로.”

회의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재빨리 홀을 빠져나가는 가신들의 등을 바라보며, 이안은 생각했다.

‘남은 건 이제 하나.’

부족한 힘을 끌어오는 것뿐.

[힘을 빌려준다면 말이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안의 계획을 알고 있는 미미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글쎄,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

아슈타르 공작령에 속한 이안이 지원을 가장 먼저 요청해야 할 곳은 뻔했다.

지이잉-

집무실에 자리한 통신마법기를 작동한 순간, 이안은 처음 보는 얼굴들을 마주했다.

-새로운 신검공인가. 설마 폐검이라 불리던 자네가 우리와 얼굴을 맞댈 줄이야.

신검공과 함께 연합공국을 움직이는 여섯의 공작들.

“뭐, 그렇습니다. 신검공인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를 대견하게 바라보는 통합주교, 성광공의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모두가 성광공처럼 우호적인 눈빛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 일은 전적으로 아슈타르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을 테고.

뢰베르 폰 구스타프.

참룡공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로 가문에 치욕을 안겨준 아슈타르를 죽일 듯 노려봤다.

하지만.

“비슷한 것이긴 합니다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안은 살기에 가까운 매서운 눈빛을 태연히 받아넘기곤.

“자, 여러분. 지금부터 기회를 드리죠.”

헛소리를 시작했다.

-기회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이안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시작하자, 심안공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휘어졌다.

기회를 구걸한다면 모를까, 마왕의 침공을 앞에 둘 아슈타르가 기회를 줄 형편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아니,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이안은 여섯 공작을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봤다.

“아슈타르를 도울 기회 말입니다.”

-뭐라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지?

순간, 여섯 공작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여섯의 공작 모두 침묵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 선착순 세 명입니다.”

손가락 세 개를 편 이안의 미친 소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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