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럼, 미미르로 하지.’
이름을 붙였다.
‘오라, 미미르.’
함께 싸워왔으며.
‘[인간의 마력으로 폭주하는 신의 힘을 제어할 생각을 하다니, 미친놈.]’
수많은 고비를 넘어왔다.
이안에게 미미르는 단순한 병기가 아닌, 평생을 함께할 전우.
그렇기에.
“다시 지껄여봐, 뭐라고?”
레온하르트의 선고를 들은 이안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철컥
허리춤에서 뽑아 든 권총을 겨눈 이안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보조인격에게 정이 든 게로군. 에드너에게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하지만, 그 슬픔 또한 신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견뎌야 할 일이다.]
우우웅
새로운 주인을 만날 때마다 겪어왔던 일이기 때문일까.
레온하르트는 기계적으로 답하고는 다시금 오색의 빛 덩어리들을 날렸다.
조금 전까지 이안의 능력을 측정하던 빛의 덩어리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품 안의 고양이를 향해 다가왔다.
[이안, 그동안 즐거웠다. 이제 갈 시간이로군.]
미미르는 담담하게 자신의 소거를 받아들였다.
이미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운명.
레온하르트에게 종속된 존재인 그에겐 거부할 힘도, 의지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랄하지 마.”
하지만 이안은 달랐다.
“오라, 미미르.”
파아앗
그가 페르소나의 시동어를 외친 순간, 푸른 빛과 함께 이계의 장비들이 이안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우웅
순식간에 완전무장 상태에 들어선 이안의 손에 두 정의 UMP45가 쥐어졌다.
드르르륵
미미르를 어깨 위에 올린 다음, 그는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퍼퍼퍼퍽
페르소나의 마력과 신성력에 의해 만들어진 수백의 45구경 탄환이 빛 덩어리를 꿰뚫었다.
총탄에 담긴 마력과 신성력을 받아들여 혼탁해진 빛무리들이 결합력을 잃고 흩어졌다.
우우웅
[소용없다. 그대는 신검공의 이름을 이을 자가 될 것인 저.]
레온하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빛무리들을 뽑아내었다. 미미르가 체념한 어투로 고개를 숙였다.
[이안, 쓸데없는 짓이다. 이곳은 레온하르트의 성역이야.]
성역.
신검을 만들어 낸 신의 힘을 이어받은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성역의 주인으로 남아있었다.
우웅 우우웅
성역 안에서, 성역의 주인은 사실상 신과 같은 존재.
이안은 수많은 빛무리를 쏘아 넘겼지만, 그 수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신검의 주인이여, 허상에 미혹되지 말게나. 모든 신검의 주인은 그대와 같은 과정을 겪어왔으니. 이를 담금질 삼아 그대의 정신은 더욱 강해질걸세.]
빛무리를 뿌리던 레온하르트가 단호히 말했다.
애당초 이 성역의 신과 다름없는 레온하르트가 패배할 가능성은 없었으므로.
[이안, 날 잊어라.]
그것은, 미미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분명 네게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네가 가진 페르소나를 검에 주입한다면 영웅급에 도달할지도 모르지.]
신검 레온하르트가 가진 신성의 힘은 그만큼 강력한 것.
이미 강력한 힘을 손에 쥔 이안이 신검을 쥐게 된다면, 아슈타르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리라.
하지만.
“개소리하지 마.”
우웅
다가오던 빛무리를 향해 총탄을 난사하던 이안은, 돌연 왼손에 쥔 기관단총을 마력으로 흩어버렸다.
흩어진 마력을 다시 그러모으며, 그는 어깨의 미미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딴 고철덩이를 휘두른다고? 내가?”
드르르륵
그가 다루는 것은 검도, 오러 블레이드도 아니다.
이안에게 필요한 것은 검 따위가 아니라, 너무나 익숙한 지구의 병기들과 이를 다룰 줄 아는 충실한 파트너.
파아앗
왼손에 모인 푸른 마력이 형태를 이루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손바닥을 간신히 가릴만한 크기의 작은 권총.
드륵 드르륵
오른손의 총으로 총탄을 흩뿌린 이안은.
“자.”
왼손에 들린 권총을 고양이의 앞발에 꼭 쥐여 주었다.
[이안?]
“네가 결정해.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철컥
미미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이안은 작은 권총의 노리쇠를 직접 젖혀주었다.
페르소나를 남에게 쥐여 줄 수는 없지만, 페르소나 그 자체인 미미르라면 방아쇠를 당기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을 터.
“아니면 벗어날 것인지.”
남은 것은, 미미르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뿐.
이안은 사격을 멈추곤 팔을 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빛무리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나는….]
권총을 쥔 검은 고양이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신검의 주인을 키워낸 다음, 역할을 마친 나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이 운명에 대해 의심조차 해오지 않았고, 이미 각오 또한 되어있었지만.
‘이게….’
보조인격의 마음에.
‘맞는 것인가?’
한 줄기의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웅
고민하는 사이, 미미르를 소거하기 위해 날아온 빛무리는 이미 지척에 다다랐다.
빛무리가 미미르를 삼키는 순간, 미미르의 존재는 레온하르트에 그대로 흡수당하리라.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곧.
철컥
미미르는 결정을 내렸다.
타타타탕!
꼬마 권총에 달린 네 개의 총열에서 쏘아져 나간 것은,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357매그넘.
퍼퍼퍽
사람 하나쯤은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는 탄환이 박힐 때마다 날아오던 빛무리가 스러졌다.
“그거면 됐어.”
어깨에서 느껴진 저릿한 반동에, 이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파아아앗
이안에게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순식간에 사람과 고양이를 집어삼켰다.
한껏 덩치를 불린 마력의 덩어리가 만들어낸 것은.
키이이잉-
강철의 기사, M1A2 에이브람스.
“미미르, 날탄 장전.”
[알았다.]
스윽
애오오옹!
이안의 명령에, 미미르의 몸에서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각자의 위치로 뛰쳐나갔다.
전차장석에 놓인 대공기관총을 잡은 이안이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 투타타타
‘그래.’
다가오는 빛무리를 박살 내면서 이안은 생각했다.
‘분명히 약해지고 있어.’
이안이 저 빛무리들을 부술 때마다.
아주 조금씩, 하얗게 칠해진 하늘과 대지가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림자 신의 신성이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신성은 자신의 영역을 필요로 하니까.]
“그럼, 승산은?”
[알 수 없다.]
이안의 물음에 미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대대로 신검의 주인을 만나 자신의 힘을 키워온 레온하르트.
그리고, 이안이 흡수한 이후 수많은 신기들의 힘을 모아온 그림자 신의 신성.
직접 맞붙어보지 않는 이상, 승패를 쉽게 가릴 수 없는 싸움.
“충분해.”
이안이 도박을 걸어보기엔.
키이이잉
전차의 포탑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강철 기사의 목표는, 이 성역을 지배하는 신검 레온하르트.
[주인이여, 어찌 보조인격 따위를 지키려 하는겐가?]
이렇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이안을 말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곳은 그의 성역이었건만.
이안이 쏘아내는 페르소나의 공격에 당할 때마다, 정체 모를 신의 힘이 그의 성역을 잠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의 아비와 마찬가지로, 그대 역시 신검의 이름을 이을 것인즉슨. 운명을 거부하지 말게나.]
예상외로 막강한 주인의 힘에, 여차하면 소멸당할 위기에 놓인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미안한데.”
하지만.
“난 너 같은 구식 무기는 안 써.”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발사.”
오른손을 아래로 내렸다.
콰아아앙-
열화우라늄 화살이 신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소리의 몇 배에 달하는 속도로 쏘아진 화살이 목표에 도달한 것은 그야말로 찰나.
오래지 않아, 승패는 명확히 갈렸다.
[…운명을 벗어난 자라니.]
쨍그랑!
두 조각으로 부러진 검이 회색으로 변한 지면 위를 뒹굴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레온하르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드너, 그대는 도대체 어떤 핏줄을 키운 것인가….]
“내가 큰 거지. 키운 게 아니라.”
자신의 전우를 죽이려던 적을 내려다보며, 이안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 너는 아슈타르의 검이 아니야. 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은… 대체.]
“신검보다 강한 무기. 더 설명이 필요해?”
[…아니, 그것이면 충분하네. 허허….]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던 신검은 이안의 말을 듣곤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보조인격이여.]
이안의 어깨 위에서, 4총열 데린저 권총을 앞발로 쥔 고양이를 향해 말을 걸었다.
[…….]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결과.
이안은 권총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미미르는 부러진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도 나의 모든 기억을 이어받았으니 알겠지.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 말을 들은 미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진 검은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렇기에, 검은 부러진다 한들 진정 부러진 것이 아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군. 그럼.]
사람이었다면 쓴웃음을 지었을까.
힘겹게 말을 내뱉은 신검은.
[부탁하네.]
마지막 한 마디를 끝으로 침묵했다.
[…….]
신검의 최후를 앞에 두고, 미미르는 무겁게 숨을 내뱉었다.
“미미르, 저게 무슨 말이지?”
뜬구름 잡는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안이 고양이를 향해 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이야기지.]
잠시 신검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한 미미르는 대답과 동시에 이안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스으으으으
자신이 가진 그림자 신의 파편을 깨워냈다.
***
크허허헝!
사자의 포효가 1급 비행전열함, 골든라이온의 갑판을 쩌렁쩌렁하게 울려댔다.
파아앗
그와 동시에 하늘로 솟구친 것은, 레온하르트의 신성에 의해 만들어진 빛의 기둥.
포효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빛의 기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모르는 사람은 이 갑판 위에 아무도 없었다.
“이안 공자님께서, 신검의 인정을 받으셨다고?”
“신검공의 위에 오르신단 말인가….”
그것은, 아슈타르의 새로운 주인이 결정되었다는 뜻.
“어떻게, 이안 공자님께서….”
“이걸, 정말로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이안 아슈타르.
폐검, 망나니, 구제 불능으로 이름 높았던 아슈타르의 수치가.
아슈타르를 상징하는 신검 레온하르트의 주인이 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신검공의 등장에, 갑판에 모인 자들은 슬픔조차 잊은 채 놀라워했다.
우우웅
레온하르트와 이안, 미미르를 감싼 빛의 기둥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새로운 가주의 탄생을 직접 목도하고자 모여들었다.
곧.
스르륵
빛의 기둥은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기둥이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마력을 탈진해 얼굴이 창백해진 이안과 어깨에 앉은 검은 고양이.
“시, 신검은?”
신검이 사라졌다.
아슈타르의 상징이자, 모든 검 위에 존재하는 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스트에 단단히 꽂혀있었던 신검 레온하르트는.
“없…어?”
언제 꽂혀있었냐는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신검 없는 신검공가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진 오베르트는 이안을 향해 역정을 냈다.
“설마, 신검을 다른 곳에 숨겨버린 것이냐?”
신검을 쥘 자격을 얻는 데는 실패했을 터.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신검을 부술 순 없으니, 모종의 방법으로 신검을 어딘가에 숨겨버린 것은 아닐까.
신검의 주인이 될 기회를 놓쳐버린 오베르트가 보기엔 합당한 의심이었다.
“후….”
이안은 대답 대신 조용히, 어깨에 앉은 고양이를 바라봤다.
“미미르?”
[…이건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군.]
“빌어먹을.”
눈살을 찌푸린 이안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갑판에 모인 모든 이들이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해명이 필요했다.
“신검 레온하르트의 인정을 받은 자, 나 이안 아슈타르가 선언한다.”
정확히는 신검을 부숴버린 자이지만, 저들이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이게.”
이안은 오른손에 쥔 물건을 힘겹게 하늘로 들어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 올라갔다.
“아슈타르의 새로운 신물이다.”
말을 마친 이안은 사위를 둘러봤다.
그가 손에 쥔 것은, 분명 레온하르트가 내어준 아슈타르의 신물.
하지만 이안은 알고 있었다.
‘믿을 리 없겠지.’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손에 쥔 신물은.
“…그래서, 신검은?”
누가 봐도 검의 형태를 띠지 않았으니까.
‘젠장.’
금색의 사자문양이 새겨진 글록 18C.
오베르트의 질문에, 이안은 새로운 아슈타르의 신물을 들어 올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