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연합 공국의 일곱 공작가는 마족으로부터 인계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왔다.
그것이, 하나뿐인 목숨일지라도.
죽음에 한쪽 발을 걸친 공국의 전사들에게, 죽음이란 너무나 가깝고도 익숙한 일.
“결국, 뱉은 말은 지켰군요.”
익숙함조차도 슬픔을 닦아낼 수는 없었다.
이안의 눈이 거대한 함선의 마스트에 박힌 장검으로 향했다.
칼날받이 부분에 포효하는 사자의 문양이 새겨진, 가문의 신물.
“신검은 부러지지 않는다더니.”
신검 레온하르트.
전사자들의 유품 가장 위에 자리한 녀석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검보다 날카롭고 튼튼하게 벼려진 녀석이었지만.
“너무 정직한 유언이야.”
그 주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꽂혀있는 검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에게 신검공은 피만 섞였을 뿐인 남이었지만.
동시에, 승리를 위해 함께 싸워온 전우이자 상관이었으니까.
“전장에서 죽는 것을 바라시던 분이다. 흔들릴 필요는 없어.”
옆에 선 이안의 장남, 오베르트가 이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죠.”
이곳은 마경.
망자를 애도하는 것은, 마족들을 몰아낸 뒤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공작 전하….”
“이렇게, 이렇게 가실 수는 없습니다!”
그에겐 이제는 다섯에서 넷으로 줄어버린, 아슈타르의 기둥들을 무사히 귀환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떠넘겨놓고 가시니 속이 좀 편하십니까?’
하늘을 보며 속으로 조금 툴툴대긴 했지만, 죽어가는 전우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안.”
하지만 책임을 짊어질 사람은 그 혼자가 아니었다.
“공작대행의 권한으로 네 지휘권을 넘겨받겠다. 이대로 마족 놈들에게 무릎 꿇을 순 없어.”
오베르트 아슈타르.
공작가에서 오러 마스터에 가장 가까운 존재임과 동시에, 홀로 살아남은 근위대의 장.
그리고, 공작가의 후계 서열 1순위.
그 말을 들은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쩌실 셈입니까?”
이안의 물음에, 오베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병력을 재편성한 다음, 부상을 치료 중일 마왕들을 토벌하러 돌아간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립니까, 형님.”
여기까지 와서 이런 개소리를 들어야 할 줄이야.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패잔병을 다시 그러모아 전선으로 보내는 일이야 전쟁터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저희가 무너지면 아슈타르는 멸망입니다.”
그것도 충원될 병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실패했을 때의 대비책도 없이 패잔병들을 모아 적을 치는 것은, 복권을 사두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안, 많이 무르구나.”
오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저들은 다시 힘을 회복할 터. 아버지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 이대로 돌아간다면 마왕과 마족들은 제힘을 되찾을 테니까.
다르게 생각한다면, 두 명의 마왕을 한 번에 잡을 유일무이한 기회.
“그래서, 절반도 안 되는 병력을 마왕 아가리에 쑤셔 넣어주잔 겁니까?”
이안에겐 그저 도박에 눈이 먼 것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나와 레온하르트, 그리고 병사들이 모두 목숨을 바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아, 그 가능성에 아슈타르의 운명을 거신다는 거군요. 형님의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두 형제 모두 아버지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분에는 동의했지만, 그 실행 방법은 정 반대.
한쪽은 복수를, 다른 한쪽은 후퇴를.
아무리 이야기를 한들, 둘의 생각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네 생각이 그렇다면 빠지거라. 나머지 병력은 내가 이끌 테니.”
오베르트는 이안을 향해 최후통첩을 날렸다.
“공작대행의 권한으로, 지금부터 네 지휘권을 가져가겠다.”
정식으로 공작의 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에드너가 없는 지금 공작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분명 오베르트.
공작대행을 맡은 그의 명령은 그만큼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공작대행이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거, 누가 달아준 겁니까? 아버지께서 달아주신 건 아닐 거고.”
코웃음 친 이안을 제외하고는.
“궤변은 그만두거라. 아버지께서 떠나신 지금, 내가 아닌 누가 아슈타르를 이끌 수 있다는 말이냐.”
자신의 말이 계속 부정당하자, 오베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공작가의 승계서열 가장 윗자리에 있는 그가 아니라면, 누가 공작대행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누가 형님을 공작대행으로 임명한 겁니까?”
“뭐라고?”
이안이 빈정대자, 오베르트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자꾸 궤변만 늘어놓을 셈이냐?”
얼굴이 붉어진 그가 이안을 노려봤다. 하지만.
“형님.”
이안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순간.
“승계서열이 가장 높은 내가 당연히….”
오베르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손가락 끝에 걸린 것은.
“신검 없는 신검공이라. 참 설득력 있는 말이지 않습니까, 형님?”
마스트에 반쯤 박혀있는 아슈타르 공작가의 상징, 신검 레온하르트.
“공작대행이 어쩌고 하는 말은, 일단 저 검을 쥔 다음에 하시죠.”
가문의 신물을 가리킨 이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오베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레온하르트.’
저 검을 쥐는 데 필요한 것은 권력이나 혈통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검에게 인정받는 것뿐.’
레온하르트의 주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곧 가주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
“좋다. 정 그렇게 말한다면야.”
오베르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마스트에 박힌 검을 향해 다가갔다.
‘너무 쉬운 일이지.’
그는 아슈타르의 성을 가진 자 중 누구보다 오러 마스터에 가까운 자.
신검에게 거부당한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오베르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놈들은 계속 힘을 회복하고 있을 터.’
그보다는, 이 불필요한 논쟁을 끝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스윽
그의 오른손이 망설임 없이 마스트에 꽂힌 레온하르트의 손잡이를 쥐었다.
순간.
파아앗
검을 쥔 그의 몸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페르소나의 능력은 에드너와 함께 사라졌지만, 신기가 가진 힘은 여전히 검에 남아 있을 터.
오베르트가 레온하르트를 손에 넣는다면, 그의 힘은 오러 마스터였던 아버지와 더욱 가까워지리라.
그와 동시에.
“설마….”
“새로운 신검공이란 말인가!”
검의 인정을 받는 자는 가주의 위에 오른다.
초대 신검공이 정해 놓은 가문의 규율대로라면, 레온하르트를 차지한 오베르트는 곧 새로운 신검공으로 등극하리라.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흑사자 사냥단의 단장, 파비안 포르테 자작만 빼고.
‘저 정도론 부족해.’
그는 알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주인을 정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쉬이이
마경과 갑판을 환하게 밝히던 빛은 점차 잦아들었다.
“…말도 안 돼.”
깨어난 오베르트는 비어 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댔다.
그가 쥐고 있었던 레온하르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마스트에 단단히 박혀있었고.
‘내가, 인정받지 못했다고?’
그는 레온하르트의 주인이 되지 못했으니까.
[종합, SS.]
분명, 레온하르트의 평가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높았건만.
[기존 후보 대체 불가능, 부적합.]
‘기존 후보라니, 대체 누가….’
신검공의 장자인 자신 외에, 그 누가 신검의 주인 후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형님, 레온하르트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만.”
이안이 검을 향해 다가선 것은 그때였다.
‘…잠깐.’
순간, 어떤 생각을 떠올린 오베르트의 눈이 이안을 향했다.
설마.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자신을 넘어서기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던 막내 동생은.
“…네가 후보냐?”
이미 신검공의 후보로 인정을 받았단 말인가.
오베르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뭔 소린지는 잘 모르겠고.”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막내의 눈초리뿐.
평소답지 않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베르트를 흘겨본 이안은.
“이제 제 차례 아닙니까?”
단숨에 레온하르트의 손잡이를 움켜쥐고는.
“좀 빠지시죠.”
이전에 레온하르트를 쥐었을 때처럼 마력을 가득 불어넣었다.
그 순간.
파아아앗
이안의 눈앞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
하얗다.
바닥도, 하늘도 하얀 페인트를 뿌린 것처럼 물들어 있는 세상.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장소였지만.
“역시, 또 여긴가?”
이미 한 번 방문해 본 적이 있는 이안은 놀라지 않았다.
이곳은 신검 레온하르트의 내부에 존재하는 성역.
그리고, 이 공간의 정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은.
“이봐, 레온하르트!”
검신을 아래로 한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아슈타르의 신검, 레온하르트.
반가운 친구를 맞이하듯 이안이 손을 흔들었지만, 레온하르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적합성 평가 중.]
그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주인 될 자의 자격을 판단할 뿐.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군.]
이안의 어깨에 올라탄 미미르가, 자신의 원본인 신검을 보곤 왠지 모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웅
곧, 신검에서 뿜어진 오색의 빛이 이안의 몸을 감싸 안았다.
[판단력 S, 감각 S, 근력 A, 민첩성 S, 전투숙련도 S, 마력 B, 특수능력 S…….]
얼마나 지났을까.
후보자의 능력 측정을 끝낸 레온하르트가, 이안의 데이터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강해지긴 했군.’
이안은 처참했던 과거의 평가를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검 따위에게 평가를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종합, S.]
종합 B+라는, 어처구니없었던 당시의 결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성장.
이안은 담담한 얼굴로 결과를 읊는 검을 바라봤다.
중요한 것은 저런 점수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인정을 받아야지.’
신검의 인정을 받아, 공작의 위에 오르는 것.
그것만이 맏형의 동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리라.
‘가능성은 충분해.’
이안은 자신의 능력을 굳게 믿었다.
[신체 및 마력 조건 충족. 해석 불가능한 영적 패턴 유지 중, 신성과 관계된 특수능력 보유.]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온하르트는 신검을 다루는 능력과 관계되는 모든 데이터를 파악하고 분석했다.
곧, 신검은 자신이 내린 판정을 무미건조하게 출력해 냈다.
[결과, 적합. 신검의 주인으로 등록을 시작함.]
“좋아.”
결과를 들은 이안은 조금 안도했다.
자신이 신검공의 위에 오른다면, 형의 미친 계획을 저지할 수 있을 터.
‘놈들이 쫓아오기 전에 대비해야 해.’
모든 것을 얻어낸 이안은 다음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축하한다, 이안. 드디어 레온하르트의 인정을 받았군.]
미미르가 씁쓸한 표정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축하한다면서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내가 널 버리기라도 할 거 같아?”
이안이 신검의 주인이 되거나 말거나, 그가 가진 가장 강한 힘은 검이 아니라 미미르에서 쏟아져나오는 지구의 병기들이 아닌가.
오랫동안 싸워온 애병이자 전우를 버릴 생각도 없었지만, 생각이 있다 하여도 버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
“무슨 일인데.”
하지만 고양이는 대답 대신 슬픈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안은 어깨 위의 미미르를 품에 안아 들었다.
하지만.
파아앗
허공에 떠오른 레온하르트가 빛을 발하는 그 순간.
[등록절차에 따라.]
이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주인에게 이식된 보조인격을 소거함.]
레온하르트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절차를 읊어댄 그 순간.
“뭐, 이 미친 새끼야?”
전우를 품에 안은 이안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