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세리아의 힘을 빌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헌금을… 두 배로요?
언제나 부족한 운영비에 시달리고 있던 그녀에게, 이안의 제안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물과도 같았으니까.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지옥이라도 쫓아갈 테니까.
이안이 말을 꺼낸 지 고작 두 시간 만에.
“허억, 허억. 왜 이리, 먼 거야. 헉, 허억.”
알자스에서 아슈타르 성까지 뛰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대는 그녀를 보며 이안이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빨리 올 필요는 없었는데?”
“그럼, 다시 돌아가요? 내 공간이동비용은요?”
“아니, 그럴 필욘 없고.”
허리를 숙인 채 호흡을 고르던 세리아가 눈에 쌍심지를 켜자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뭔데요?”
“사냥을 갈 거야.”
세리아의 말에 이안은 장난스럽게 답했다.
“아…그래요? 사냥….”
순간,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괜히 여기까지 뛰어나왔잖아요.”
마수 사냥에서 성직자의 역할은 고작 부상자의 치료뿐.
부상을 치료하는 신법은 자신보다 낮은 수준의 신관들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지 않은가.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상대는 네 생각보다 강하니까.”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 이안은 검지손가락을 흔들었다.
“뭐길래 그래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그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동공이 불안 불안하게 떨려왔다.
그리고.
“마왕.”
이안은 그녀의 기대에 충실하게 보답했다.
“네?”
잘못 들은 거겠지?
세리아는 귀를 의심했지만.
“마왕이라고.”
아쉽게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름은 단탈리안. 공작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영지를 마련한 마왕이지. 사냥단에 따르면 휘하에 둔 공작급의 최상급 마족은 다섯에….”
“자, 잠깐만!”
세리아는 급히 손을 뻗어 이안의 브리핑을 멈췄다.
이안의 말 대로라면, 그녀의 임무는 마수 사냥 지원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결론에 도달한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지. 마경에서 벌이는.”
“아, 아아, 아아아아….”
“왜, 지옥이라도 따라올 수 있다며?”
이안이 세리아를 향해 이죽댔지만, 말을 잊은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왕? 전쟁? 아….”
차라리 신을 죽이러 간다고 했으면 신성모독이라 소리라도 질렀겠지만, 그녀에겐 더이상 소리 지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왕은 그만큼 강한 존재였으니까.
“…이거, 가능한 건 맞아요? 마왕 토벌전이라니, 제가 배우기론 200년 전 탈마공 디아블로와 싸운 게 마지막이라고 들었는데.”
그조차도 혈투 끝에 무승부로 끝나지 않았던가.
“나도 몰라.”
그녀의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난리통에서 살아 돌아올 확률을 올리기 위해 그녀를 데려온 게 아니던가.
“아니 그걸 말이라고!”
무책임한 말에 세리아가 성을 냈다. 이안이 피식 웃었다.
“뭐, 실패하더라도 죽진 않겠지. 골든라이온과 아버지를 포함한 공작령의 모든 전력이 움직일 거니까.”
“공작 전하께서 직접이요?”
이안의 입에서 신검공의 이야기가 나오자, 화를 내던 세리아가 순간 멈칫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신검공 에드너 폰 아슈타르.
영웅급의 페르소나를 가진 오러 마스터가 함께한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계산을 끝마치고 나자, 그녀의 얼굴에 점차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하는데요?”
조금 전보다는 평온해진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이안은 짧게 답했다.
“내일.”
“…뭐라고요?”
이안의 대답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렸다.
***
마법사는 마력을 움직여 자연법칙을 뒤트는 존재다.
모든 능력이 전투에 집중된 오러나 신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신법과는 달리, 마법은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무한한 응용이 가능한 기술.
그 마법들을 특정한 물건에 담아낸 마법기들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으니.
“후우….”
그 거위들을 공짜로 내줘야 하는 메네실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자, 빨리빨리 실어! 출정까지 하루도 안 남았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낸 마법기들이 담긴 상자가 흑사자 사냥단의 병사들 손에 들어갈 때마다, 메네실의 입에선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기분 풀라고, 탑주. 더 이상 귀찮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
옆에 선 이안이 등을 툭툭 두드려줬지만, 그렇다고 그의 기분이 나아질 리 없지 않은가.
“공자님, 약속은 지키시는 거겠죠?”
“물론이지.”
이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의 시선이 두루마리를 따라 흔들리는 것을 느낀 이안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곧.
“부단장님, 모든 물자 적재 완료했습니다!”
마법기의 운반을 책임진 장교가 달려와 보고했다.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이제 어서 약속을….”
언제쯤에나 받을 수 있을까 안절부절못하던 메네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약속은 지킨다니까? 사람을 이렇게 못 믿어서야. 자, 여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안은 손에 쥔 두루마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드, 드디어!”
그제야,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메네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가 이토록 거대한 손실을 감당한 것은 모두 이 한 장의 두루마리를 얻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럼, 먼저 가보지. 전장에서 보자고.”
“예, 예, 공자님. 조심해서 가십시오.”
메네실은 달려가는 마차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두루마리를 주자마자 재빨리 마차에 올라탄 이안이 마차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음?”
달리는 마차를 보던 메네실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다그닥다그닥
마법기를 가득 실은 마차의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으니까.
“잘못 충격이라도 받으면 마력이 손실될 텐데….”
기껏 얻은 마법기의 성능이 저하된다면 손해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뭐, 알아서 하시겠지.”
탑주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거래는 끝났고, 그의 손엔 두루마리가 쥐어져 있었으니까.
“자, 어디 확인해 볼까?”
그의 손이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주욱 펼쳐 들었다.
애오옹
[이안.]
“응?”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짐마차 지붕에 누운 이안의 고개가 어깨에 앉은 미미르로 향했다.
고양이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괜찮겠나?]
“뭐가?”
[이런 식으로 일을 마무리한다면 분명 뒤탈이 있을 것이다. 마법기를 다시 돌려주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미미르의 눈에, 이번 일은 사실상 사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그 말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전쟁은 내일부터니까.”
전쟁 중인 군의 보급품을 다시 돌려받는다?
“이제와서 물리기엔 너무 늦었어.”
탑주가 마법기를 되찾고 싶다면, 이안 이전에 분노한 신검공을 먼저 상대해야 하리라.
“탑주가 오러 마스터를 이길 리가 없잖아?”
말을 마친 이안이 씨익 웃었다.
[그런 건 없다.]
두루마리에 적힌 한 마디.
“이이이아아아안!”
찌이이익
두루마리를 찢어발긴 혈사자 마탑의 탑주, 메네실은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
마경의 환경은 마족과 마수를 제외한 필멸자들에게 가혹하다.
마경을 가득 채운 마기는 필멸자의 몸에 닿기만 해도 변이를 일으키는 극독.
지옥의 다른 말이라 해도 손색없을 이 땅에서 필멸자들이 무사히 다닐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
“하늘에서 보니 또 남다르네.”
외부의 모든 위험 요소를 방어할 수 있는 1급 비행 전열함.
골든라이온에 올라탄 이안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무슨 장난감 같잖아?”
공국 전체를 방어하는 장벽 너머로 펼쳐진, 보랏빛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든 땅과 나무들.
마기에 절어있는 것만 빼면 아이들 장난감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전혀 긴장하는 빛이 없으시군요. 마경 토벌전에 참여하시는 것은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의 옆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파비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군이 여러 싸움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마경에서의 싸움은 전혀 다르지.’
극악한 환경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마경에서의 토벌은 기본적으로 강습전이었다.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다음,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족들을 처치하면서 목표를 제거하는 것.
퇴로가 없다는 사실이 주는 정신적 부담은 생각보다 심각하니까.
“그게 뭐?”
하지만 이안에겐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긴장해 봤자 힘만 뺄 뿐이야. 일이 벌어지기 전엔 쉬어야지.”
적진에 홀로 침투하는 것은 전생의 강민혁에게 일상이나 다름없던 일.
든든한 지원군과 장비까지 등에 업고도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
“병사들에게도 쉬라고 해. 어차피 전투가 시작되면 쉬고 싶어도 못 쉴 거 아냐?”
말을 마친 이안이 의자에 기대 사지를 쭉 늘였다.
애옹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군.]
“역시 대단하십니다.”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모습에, 미미르와 파비안이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삐이이이-
[전방에 비행형 마족 출몰. 전 병력 요격 준비.]
경고음이 선실 전체를 울렸다. 선실에 모여있던 흑사자 사냥단의 단원들이 안내음을 듣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여, 이 자식들아! 제일 늦게 나가는 놈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살고 싶으면 빨리빨리 움직여!”
대공방어를 담당하는 것은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사냥단과 마탑의 종군마법사.
갑판으로 뛰어가는 병사들을 향해 장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단장인 파비안도 마찬가지.
‘잠깐, 공자님은?’
순간, 이안이 떠오른 그는 의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허.”
텅 빈 의자를 본 그의 입에선 헛웃음만 나왔다.
“오.”
갑판에 올라선 이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함선을 보호하는 푸른색 마력 결계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을 새까맣게 덮은 무리들.
애오옹
[석마족, 가고일의 장을 공작으로 둔 것이 단탈리안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날개 달린 석상들의 파도에 질린 고양이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이안은 아무 걱정도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우우우웅
공작령에 단 한대만이 존재하는 1급 비행전열함, 골든라이온.
기이잉
움직이는 데만 백 단위의 마법사가 필요한 괴물을 괜히 끌고 왔을 리 없지 않은가.
콰아아아
함선의 측면에 줄지어 달린 마력포.
그 끝에서, 응축된 마력의 광선들이 쏘아져 나갔다.
빠른 속도로 마족들에게 도달한 빛이 마족들의 근처에 도달한 순간.
콰아앙!
광선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제법인데?”
짝짝짝
처음으로 마력포의 위력을 확인한 이안은 손뼉을 쳤다.
이만한 위력이라면 어지간한 지구의 대공포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터.
하지만 미미르의 경고는 끝나지 않았다.
[이안,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니다. 적은 아직도 많이 남았어!]
거대한 마력의 폭발.
그 속에서 살아남아 달려드는 마족은 아직도 많았으니까.
“뭐,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냥단을 불러오는 거잖아?”
전열함에 탑재된 마력포는 그 위력만큼이나 긴 재장전시간을 자랑한다.
그 사이를 커버하는 것이 탑승병력의 임무.
“오라.”
이제, 그 임무를 다할 시간이었다.
“미미르.”
파아앗!
시동어와 동시에, 푸른 빛이 이안의 몸을 휘감고는 덩치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안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날개 달린 수많은 마족을 떨궈내기에 가장 적합한 병기.
기이이잉
갑판에 나타난 것은.
두 정의 기관포를 장착한 자주대공포, 비호.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뿔이 적을 향해 겨눠졌다.
하지만.
“어디.”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이안이 아니었다.
“실력 좀 보여줘 봐, 미미르.”
비호의 옆에 선 이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애오오오옹!
[망할 놈!]
비호에 탑승한 것은 미미르와 수많은 고양이.
철컥
강철 괴물의 뱃속에서 그들을 부리는 검은 고양이, 미미르가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순간.
부아아아아앙!
호랑이의 머리에 달린 두 뿔에서, 30밀리 탄이 폭우처럼 쏟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