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86화 (87/224)

#86화

“후우… 후우….”

온통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는 거성.

그곳의 대전에 자리 잡은 왕좌에 앉은 자는 한 여인이었다.

머리에 달린 뿔과 등 뒤의 박쥐 같은 날개만 아니었다면 능히 절세의 미녀로 칭송받았을 그녀였지만.

“후우우….”

여인의 눈은 살의와 분노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놈….”

격노한 그녀가 양손에 힘을 주었다.

끼기기긱

무쇠로 만들어진 왕좌의 팔걸이가 종이처럼 구겨졌지만, 그녀의 분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감히… 인간 따위가….”

인간.

오러 마스터도, 고위 마법사도 아닌 햇병아리 주제에.

“내 몸에….”

상처를 입히다니.

마경의 열한 군주 중 하나, 마왕 바르바토스의 시선이 자신의 배를 향했다.

본래는 상처 하나 없이 하얗고 매끈해야 할 피부였지만, 그곳엔 아주 얇은 실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마족이 가진 근원, 마기의 천적인 신성력이 할퀴고 지나간 자국.

남아있는 신성력의 양과 수준은 극히 미미했으니, 이 상처도 몇 달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리리라.

“어떻게… 어떻게 하지?”

마왕의 산산이 조각난 자존심은 다시 붙지 않을 테지만.

“감히….”

백옥같은 피부에 생긴 생채기를 보자 그녀의 분노가 다시금 솟아올랐다.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힐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아슈타르 놈.”

갈리우스가 받으러 낸 저주받을 병기, 페르소나의 관리자.

녀석의 목에서 쏟아져나오는 피가 아니고선, 이 분노를 식힐 방법이 없어 보였다.

“분명, 그때도 있었지.”

바르바토스는 마족들을 보내 공국을 시험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존재감이라곤 느껴지지도 않던 아슈타르 공작가의 금발 머리.

그곳에 녀석이 있다면.

“그래, 그럼 되잖아?”

무언가를 떠올린 그녀가 갑자기 만족한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번쩍 빛났다.

“놈을 잡을 수 없다면.”

가진 걸 모두 부숴주지.

“후후, 후후후, 후후후후.”

고개 숙인 그녀의 음침한 웃음이 보랏빛 성벽을 타고 퍼져나갔다.

***

“뭐야, 이게?”

어둠 아래 일직선으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본 이안은 혀를 내둘렀다.

“현실 공간이 아닌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이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존재하는 계단을 설명할 방법이 딱히 없었으니까.

그리고.

“녀석도 가버린 건가.”

손에 쥐고 있던 검은 고양이, 미미르는 어느새 사라져버렸으니까.

이안의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이 현실과 분리된 장소라는 명확한 증거였다.

“어디, 그럼.”

하지만 이안은 긴장하지 않고 아래로 무한히 뻗은 돌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계단의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포기하려면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뭐.”

돌아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또각또각

구두와 돌계단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만이 흰 계단과 검은 벽으로 이루어진 공간 사이를 메웠다.

“뭐야, 이거?”

30분.

품에 챙겨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위험은 개뿔이.”

신관의 말을 떠올린 그가 헛웃음을 날렸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무한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게 더 위험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을 채워나갈 때 즈음.

-인간이여.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안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우웅

무언가가 이안의 몸을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성광공의 영지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낀 익숙한 기운.

‘신인가.’

이안은 재빨리 오러를 퍼뜨려 신성력의 침범을 막아냈다.

‘잡신도 신은 신이란 말이지.’

이안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기적의 탑에서 내리는 시련은 만신전에 제 영역을 가진 신들의 것.

방심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내게 네 믿음을 바쳐라. 네가 감히 상상도 못한 힘을 네 손에 쥐여 줄 테니.

신이 이안을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파앗

빛 알갱이 하나가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손등에 닿은 먼지는.

스윽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몸에 스며들었다.

“이게 무슨….”

오러의 방어도 뚫고 들어온 정체불명의 물질.

그것을 받아들인 이안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마력이, 늘어났어?’

몸 안에서 벌어진 일에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갱이가 몸 안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그의 마력이 조금이지만 늘어났으니까.

-나를 따라라. 지금 받은 힘과는 비할 바 없는 강대한 힘을 넘겨주지.

이안의 놀란 얼굴을 본 것인지, 보이지 않는 신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안 사요.”

-뭐, 뭐라고? 어찌 그런….

이안은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이런 코딱지만 한 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코, 코딱지?

신이 흥분해 소리쳤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날 어쩔 수 있을 리 없어.’

기적의 탑을 방문하는 자들은 신들이 노릴만한 무언가를 가진 자들.

그 말인즉슨.

-비켜라, 노르보르그.

우우웅

이안을 찾아올 신들은 아직 많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으음.’

새로운 신의 등장과 동시에, 늘어난 신성의 압력이 이안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두 신의 목소리가 좁은 통로를 울려댔다.

-이런 귀한 영혼이 네 차례까지 올 줄 알았나?

-이, 이익….

다른 목소리가 면박을 주자, 노르보르그라 불린 신은 울음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새로 등장한 신이 코웃음을 쳤다.

-헹, 도전자여. 그런 잡신의 선물보다 더 좋은 걸 주지. 나를 따라라.

말과 동시에, 이안의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신기?’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 붉은 구슬.

신성력을 내뿜고 있긴 했지만, 그 힘은 보잘것없는 물건.

-이만하면 어떠냐? 이 고츠님께서 특별히 네게만 내리는 선물이니라.

구슬에 제법 자부심을 품고 있기라도 한 모양인지, 고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그, 장난하세요?”

이안이 넘어갈 리 없었다.

-뭐, 뭐라고?

“차라리 마력을 주던가, 이게 뭡니까? 쓰레기도 아니고.”

-쓰, 쓰레기….

이안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신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자, 다음.”

계단을 끊임없이 밟아 내려가면서, 이안은 다음 신을 찾아 헤맸다.

그들이 탑에서 도전자에게 주는 무언가는 어차피 아무런 강제성도 없는 선물일 뿐이다.

말하자면.

‘마트의 시식코너같은 거지.’

그리고, 이안은 그 시식코너를 전부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필멸자여, 나를 따라라.

씨익

새롭게 나타난 먹잇감의 목소리에, 늘어난 신성의 압력을 버티던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에반.

아슈타르 공작가의 망나니, 이안 아슈타르가 직접 임명한 이안의 호위기사이자 병기 급 페르소나의 주인.

우우웅

주군이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후원에서 수련을 거듭하던 그는.

“됐다.”

수련의 결과를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었다.

우웅

검을 집어삼킨 불꽃처럼 타오르는 순백의 오러.

익스퍼트 중급의 상징을 손에 쥔 에반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이 정도면….”

분명, 짐이 되지는 않으리라.

에반은 알자스의 지하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주군인 이안이 적을 막아서는 것만 바라봤던 지난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제, 내가 도와야 할 차례야.”

오러를 거둔 에반은 다짐했다.

누나와 그의 생명, 기사의 작위, 페르소나까지.

그에겐, 주군에게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끼익

수련을 마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에반은 저택을 나섰다.

“곧 공자님께서 돌아오신다고 했지.”

집사의 말을 상기한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의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에반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서 주군에게 자신의 성취를 보여주고 싶었다. 더는 짐이 되지 않을 거라 선언하고 싶었다.

“아직 오시지 않은 건가?”

신전 중앙의 광장에 도달한 에반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그의 눈이 바닥에 열린 계단 입구를 향했다.

그 순간.

구구구궁

광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끼리리리릭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중심에 놓인 계단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오시는 건가?”

바드리안의 공자를 모시던 신관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에반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진동이야말로, 시련을 마친 이안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

그는 흔들림 하나 없이 눈앞의 지하 계단을 응시했다.

그의 기대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파팟

계단 아래에서 사람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하늘로 수 미터 쏘아진 사람은 곧 딱딱한 돌바닥과 부딪쳤다.

그 사람이 누구일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고, 공자님!”

에반은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주군을 보고 놀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크헉, 무슨 에스컬레이터가 이렇게 거칠어?”

다행히 이안의 몸엔 별 이상이 없었다.

에반은 몸을 일으키며 기침을 토하는 주군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마무리가 좀 별로긴 했지만. 쪼잔한 놈들 같으니.”

에반의 인사를 들은 이안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댔다. 기사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성취가 있으셨군요.”

“뭘?”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짜증 섞인 말뿐.

“꽤 성취를 얻으신 것 아닙니까?”

“성취는 무슨.”

의아한 표정을 지은 에반을 향해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마력의 상승도 있었고, 몇몇 쓸만한 신기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걸 얻자고 그 고생을 했다니, 원.”

수많은 신들이 모여 만들어낸 신성을 이 악물고 견디며 얻어낸 것 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였으니까.

“아무래도, 윌리엄을 다시 만나봐야겠어. 말이 너무 다르잖아?”

뿌득

한 발자국만 늦었어도 압력에 의해 인간 쥐포가 될 뻔한 걸 생각하니, 그의 이가 절로 갈렸다.

그 전에 챙겨야 할 게 있었지만.

“뭐야.”

쑤시는 몸을 일으킨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곤 에반의 얼굴을 바라봤다.

“같이 안 왔어?”

“네?”

“고양이 말이야. 검은 고양이.”

탑 안으로 함께 들어간 미미르가 보이지 않자 이안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못 돌아온 거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이…안.]

“미미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이안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탑의 입구를 향했다.

그 순간.

파파팟

입구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쏘아져 나왔다.

이안이 그랬듯, 하늘로 솟구친 녀석은 곧 이안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미미르?”

[이런…망할…놈….]

애오옹

반죽음이 된 고양이가 쓰러진 채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안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뭐야, 이게.”

쓰러진 미미르의 옆.

“두 마리라고?”

미미르와 똑같이 생긴, 반투명한 고양이 하나가 쓰러져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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