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에드너 폰 아슈타르.
아슈타르 공작령의 주인. 은혈의 사자. 오러의 정점.
수많은 칭호가 그의 이름 앞을 수식하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오직 하나.
-신검공,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검공.
신검의 주인이자 인계를 지키는 일곱 방패 중 하나.
“물어볼 필요가 있는가?”
폭권공, 브라움 게인워드의 말을 들은 에드너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받은 상처는 두 배로 돌려줘야 하는 법.”
검을 뽑아 든 에드너가 눈앞에 선 여섯의 환영을 향해 말했다.
자신과 함께 연합공국을 이루는 여섯의 공작들.
“사자의 코털을 건든 마족 놈들을 가만 놔둘 순 없지.”
신검의 눈에서 시퍼런 오러의 불꽃이 튀었다.
자신의 영지에 독을 풀어 넣으려던 놈들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애당초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네의 마음은 이해하네만,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두가 에드너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신관 차림의,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장년의 사내.
“성광공, 자네도 확실히 늙었군.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에드너는 만신의 대리자를 향해 코웃음 쳤다.
“신들이 불로불사는 책임져주지 못하는 모양이지? 약한 소리나 지껄일 줄이야.”
마족과 싸우는 것을 주저하다니.
평생을 마족과 검을 맞대며 살아온 그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신검공,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에겐 가진 힘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성광공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는 인계의 검이 아니라 방패라네. 방패가 사라지면 심장을 내준다는 사실을 그대는 정녕 모르는가?
말을 마친 성광공이 흰빛을 뿌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환영임에도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거룩한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자네도 정말 약해졌군, 엘.”
에드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나도, 자네도 너무 늙은 것 같은데.
“늙은 건 자네겠지. 재수 없긴 하지만 마족이라면 눈이 돌아가 버리던 자네가 어찌 이렇게 됐는지, 허.”
이제는 타성에 젖어버린 경쟁자이자 전우의 모습에 신검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답답하기는. 돌려 말하지 말라고, 엘로힘.
새롭게 끼어든 목소리. 에드너는 눈을 돌렸다.
-이미 신들은 결정을 내렸어. 우리가 더 이상 일을 키우지 않는 걸 바라고 있다고.
심안공, 메네스 이그드라실.
인계의 모든 숲과 활의 지배자.
500년을 넘게 살았음에도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에드너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번 영웅제를 보면, 갈리우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만.”
공작은 코웃음 쳤다.
마법의 신이 영웅제에서 성전을 선포한 사실은 이미 공국 전역에 알려져 있었으니까.
-아무리 마법의 신이 물질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다지만, 모든 신을 이길 수는 없어. 다른 신들은 지금 이 구도를 유지하고 싶어 해.
“메네스, 신들은 물질계에 한 발이라도 더 걸치려고 안달 나지 않았었나?”
신성은 결국 물질계의 필멸자들에 의해 유지된다.
물질계에 조금이라도 영향력이 커질수록 필멸자들이 바치는 신앙은 커질 터.
-지금의 상황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에드너의 의문에 메네스는 검지를 내저었다.
-인계에서 신앙을 계속 뽑아내기에, 강대한 적이 살아 있는 것만큼 좋은 건 없을 거 아냐?
“위선자 놈들. 언제는 인계의 보존이 최우선이라더니.”
요정의 말을 들은 에드너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자신들의 이득 때문이란 말이 아닌가.
“그래서, 결론이 뭐지?”
-전쟁을 포기해라, 에드.
에드너의 말에 답한 것은 또 다른 목소리였다.
인간의 성대로는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목소리.
“디아블로, 너까지 가담했을 줄은 몰랐는데. 이 전쟁이야말로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이 아니었나?”
판데모니엄의 주인, 탈마공 디아블로.
신검공의 냉소에 마족의 배반자가 뿔 달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우리에겐 아직 인계를 하나로 합칠 시간이 필요해.
“시간?”
하.
헛웃음을 터뜨린 에드너는 여섯의 공작을 살폈다.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아슈타르의 주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다들 마찬가지로군.”
-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방패의 의무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을 뿐이지.
손에 거대한 건틀릿을 찬 폭권공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에드너가 쓴웃음을 지었다.
“방패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족으로부터 인계를 지켜야 하는 것. 그것이 자신들의 의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검이다.”
에드너에겐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검은 베는 존재다. 막고만 있으면 날만 상하는 법이지.”
감히 자신들의 영지를 침범한 자에 대한 징벌.
그리고, 굴복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긍지.
스릉
에드너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로부터 축성받은 특급 마법기이자 신기.
신검 레온하르트의 새하얀 검신에서 섬뜩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너희가 인계를 지킬 동안, 나는 명예를 지키겠다.”
말을 마친 에드너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성광공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에드,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말게! 혼자 나선다고 될 일이….
파삭
“다들 나약해졌어. 마족을 그렇게 베고도 깨닫지 못하다니.”
인간의 약한 틈을 파고드는 것이 마족이거늘.
환영통신마법의 구동장치를 꺼버린 에드너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여섯 공작의 생각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뿐.
우웅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다른 통신마법구를 작동시켰다.
-네, 공작 전하.
은사자 기사단의 단장이자 아슈타르의 2검. 칼리번 만스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병사와 기사, 마법사, 항해사들에게 알리게.”
구슬 위에 떠 오른 거구의 사내를 향해, 공작의 입이 단호히 열렸다.
“곧 출정할 거라고.”
출정.
그 말에 담긴 무거움에, 거구의 사내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이미 준비는 끝난 상황입니다.”
“자네다워서 좋군.”
칼리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에드너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아, 그리고.”
출정하기 전,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이안을 불러오게. 최대한 빨리.”
한때는 가문의 수치였지만, 이제는 가문의 당당한 일원이 된 막내.
“당치 않게….”
이안의 얼굴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문득, 씁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
“도대체, 페르소나의 정체가 뭔데?”
윌리엄의 말을 들은 이안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력과 신성력으로 움직이는 대 마족병기.
이안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페르소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뭐길래 이계에서 온 영혼이 필요한 거냐고.”
그것만으론 진짜 이안과 윌리엄이 강민혁을 이 세계에 불러들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네 영혼이 필요했으니까. 이걸 설명까지 해야 하나?”
윌리엄은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관리자의 혼은 핏줄로 이어지는 게 아니니까. 이계인의 혼이 필요했던 녀석으로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겠지.”
“아니, 그러니까 그게…”
잠깐.
윌리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안의 머릿속에, 어떤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설마, 제작자가 지구인이라고?”
한글. 너무나 익숙한 페르소나의 제작시스템과 정보창.
증거는 이미 충분하고도 넘쳤다.
단지,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날 거란 사실을 경우의 수에 넣지 않았을 뿐.
“지구? 너희 이계의 이름인가 보지?”
윌리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
그제야, 이안은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가 지구에서 죽음을 맞이하고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이용하기 위해서였군.”
페르소나의 관리자를 대체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
“네 동의도 없이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윌리엄은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안의 몸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화를 내는 것은 이해하겠다만, 우리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다오. 아무도 우리를 믿지 않는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이안이 분노하고 있으리라 지레짐작한 그가 변명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니.”
그의 떨림은 분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운데.”
“…고맙다고?”
“두 번째 생명을 줬는데도 화를 내는 머저리가 있나?”
이안은 당황한 윌리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건,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이용당하는 건 똑같지만, 여기는 다르니까.”
지구와 달리, 아스텔리아에서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비록, 선택한 운명이 이용하려던 놈들의 목적에 반할지라도.
“거래를 하지.”
이안.
아니, 강민혁의 눈이 번쩍, 빛났다.
***
영웅제가 끝난 만신전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든 대리인과 공국민들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감과 동시에, 이곳에 남은 것은 신관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일부의 주민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단 별론데?”
이안만은, 아직 아슈타르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에겐 아직 받아내야 할 것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이안이 선 곳은 영웅제가 열렸던 최상층의 광장.
행사가 끝나 텅 비어버린 광장 중앙에는, 처음 보는 통로와 계단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이것이… 만신전의… 존재 이유 중… 하나.”
신관 넷이 들어 올리는 가마에 탄 거구의 사내, 윌리엄이 약에 취해 풀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기적의…탑.”
기적의 탑.
이안은 이미 제정신인 윌리엄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만신전의 신들이 가진 힘을 얻을 수 있는 탑.’
보물, 신기, 마력.
신들이 내리는 시련만 견뎌낸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곳.
“아니, 이 좋은 걸 왜 자기들끼리만 해 먹은 거야?”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공자.”
이안이 빈정거리자, 가마를 멘 신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평범한 사람은 신성을 맞닥뜨리는 순간 영혼이 신에 동화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말을 마친 신관이 슬쩍 가마 위를 바라봤다.
“흐으으….”
“흠. 그런 시련이란 말이지.”
약에 취해 헤롱거리는 윌리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이안은 쉽사리 시련의 종류를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신의 유혹.
“네가 원하는 건… 그곳에….”
힘겹게 손가락을 뻗어 입구를 가리킨 윌리엄이 더듬거렸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곧장 들어가면 되는 거지?”
“공자, 알고 있겠지만 조심하십시오. 자신만의 사도를 향한 신들의 욕망은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알았다고.”
신관의 주의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서슴없이 어두운 입구를 향해 몸을 디밀었다.
애오오옹
[그런데, 왜 나까지 같이 가야 하는 것이냐!]
“당연히 너도 강해져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목덜미가 잡힌 채 비명을 내지르는 검은 고양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