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영웅제는 순조로이 막을 내렸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에 의해 적법하게 선출된 제사장과 여섯의 대리인. 그리고 그들에게 내려진 막중한 임무까지.
여느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를 지닌 행사였고, 그 행사의 주인공이 된 제사장을 공국의 모두가 존경하고 부러워했다.
“빌어먹을….”
그 자리에 앉은 당사자를 제외하고.
만신전의 옥상에 배치된 아슈타르의 저택에 틀어박힌 이안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공자님, 이건 기회입니다.”
에반이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안이 뚱한 표정으로 호위기사를 바라봤다.
“뭐가?”
“지금까지 공자님께서 쌓아 올린 악평을 단숨에 뒤집어놓을 기회 말입니다.”
제사장의 자리는 일곱 공가의 후기지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제사장이라는 이름 석 자에는, 이안이 지난 20년간 쌓아온 악평쯤은 단숨에 무로 돌려버릴 만한 영예가 담겨있었으니까.
“항상 이런 상황을 원하셨지 않습니까? 망나니 소리에서 벗어나는 것 말입니다.”
말을 마친 에반이 그의 주군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안이 이죽댔다.
“그래, 덤으로 총알받이 역할도 받았지. 무슨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네? 총알받이요? 원 플러스 원?”
“아니다. 그냥 잊어버려.”
이계의 용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에반이 멍청한 표정을 짓자, 이안은 손을 내젓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필요한데.’
말이 좋아 원정대의 선봉이지, 실상 전쟁터의 선전용 간판 겸 총알받이가 아닌가.
마족 놈들이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머저리들이 아닌 이상에야, 놈들의 최우선표적은 무조건 이안이었다.
‘그 마왕을 포함해서 말이지.’
바르바토스.
직접 가운뎃손가락을 먹여준 마왕을 떠올리자 이안의 골이 좀 더 지끈지끈해져 왔다.
전쟁터에 나가서 마왕에게 오체분시 당하고 싶지 않다면,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저 녀석도 포함해서 말이지.’
이안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동그란 탁자 위에 엎어진 검은 털의 새끼 고양이.
애오오오오옹
페르소나의 보조인격이었던 미미르가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내 갈기가… 송곳니가….]
조심스레 앞발로 목 언저리를 쓰다듬어봤지만, 느껴지는 건 풍성한 갈기가 아닌 보들보들한 솜털뿐.
좋게 말해도 귀엽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 모습에.
“저 고양이, 다른 건 몰라도 귀엽긴 하네요. 역시 신께서 내려주신 거라 그런가?”
에반은 입가에 스리슬쩍 미소를 지었다.
[귀엽다고? 감히 레온하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은 내게, 귀여워? 이 자식!]
그 말을 들은 미미르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미야아아아!
전광석화처럼 뛰어오른 미미르가 에반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앞발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발톱이 기사의 얼굴을 난도질하기 위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콱
“요 녀석, 성질은 급해가지고.”
미미르의 두 앞발은 에반의 손을 피해지 못했다.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에 다다른 에반에게, 새끼 고양이의 공격은 장난 수준에도 못 미쳤다.
“저희 누님께 보여드리면 좋아하시겠는걸요? 성깔이 좀 있긴 합니다만.”
미미르를 탁자에 내려놓은 에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양이의 앞발을 잡고 일으켰다.
미야아아아아!
[놔라, 놔! 내 네놈의 몸뚱이를 당장 반 토막으로….]
강제로 직립보행을 하게 된 미미르가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지만.
“그래, 그래. 놀아달라 이 말이지? 엿차.”
미미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안뿐.
“허.”
저게 레온하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은 놈이라고?
소년의 손아귀에 잡혀 발버둥 치는 고양이를 보던 이안은 헛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저었다.
“정보.”
[이안 아슈타르]
[페르소나명: 미미르]
[등급: 환수]
[마력: 3,000]
[개방 필요마력: 2,000]
[증폭률: 2000%]
[특성]
[장비교체][장전][과부하][보조인격][파편화][그림자의 화신][통신]
“마력은 서비스인가?”
갈리우스를 만나기 이전보다 확연히 늘어난 마력을 본 이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고작 500갈리움의 마력이지만, 페르소나의 증폭을 거친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수치였으니까.
그리고, 그 밑에 적힌 특성.
“[그림자의 화신]….”
중얼거린 이안은 정보창을 닫고는.
애오오옹
[놔라! 이 불손한 녀석….]
에반의 노리개가 된 불쌍한 미미르를 바라봤다.
“…분명 저 녀석을 말하는 걸 텐데 말이야.”
쓸모는 전혀 없어 보였지만.
이안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림자 신의 힘이 돌아온 것은 기쁜 일이지만 저 고양이를 도대체 뭐에 써먹는단 말인가.
“야, 그만 놀고 그 고양이 좀 데려와 봐.”
“네, 잠시만요.”
애오오옹!
[고양이라니, 이안 너까지 이럴 셈이냐!]
미미르가 시끄럽게 울어댔지만, 에반에게서 그를 건네받은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양이의 몸뚱이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결론은 제법 빠르게 나왔다.
“…그냥 고양이잖아.”
애오오오옹!
[그냥 고양이라니! 나는 레온하르트의….]
이안의 말에 미미르가 성질을 냈지만, 마력도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고양이라는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너, 뭐 다른 거 없냐? 그림자의 화신이라며.”
“공자님, 이젠 고양이랑 대화를 나누시는 겁니까?”
미미르에게 말을 거는 이안을 에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
“공자님,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바깥에서 들려온, 이 저택을 지키는 집사의 목소리.
“그래.”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호리호리한 체격의 집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저택의 주인에게 건넸다.
봉투 뒷면의 인장을 확인한 이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바드리안?”
이안이 밟고 선 만신전의 주인이자 모든 신의 지상 대리자, 성광공이 다스리는 가문.
그들이 굳이 이안을 찾을 이유라면.
“영웅제 때문인가?”
괜히 제사장 따위를 해 가지곤.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은 직감을 느낀 이안이 중얼거리며 봉투의 봉인을 뜯었다.
하지만.
[윌리엄 바드리안]
서신에 적힌 익숙한 이름을 본 순간.
“얘가 날 왜 찾아?”
이안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
윌리엄 바드리안.
신과 가장 가까운 가문이라는 이명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증의 약쟁이.
딱히 가문에서 제재를 가하지는 않지만,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도 없는 성광공의 아픈 손가락.
그리고, 그를 두 번째 마주한 이안은.
‘달라.’
지난번과는 다른 상대를 조심스레 살폈다.
푹신한 소파에 간신히 둔한 몸을 구겨 넣은 채 반쯤 드러누워 있는 금발의 사내.
꼭 과거의 이안을 보는 것 같았지만.
‘눈빛이 살아 있군.’
약에 취해 흐리멍덩해진 지난번과는 다르게, 윌리엄의 눈이 이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왔네? 친구.”
“눈빛이 멀쩡하군. 오늘은 약을 안 했나 봐?”
윌리엄이 힘없이 손을 흔들자 이안이 빈정댔다. 약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도 어쩔 수 없지. 약에 취한 상태에선 제대로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으니까.”
“그런 말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안은 진심으로 놀랐다.
약쟁이가 하는 이야기라기엔 생각 외로 정상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놀랄 일은 그다음이었지만.
“역시, 넌 이안이 아니야.”
윌리엄이 검지로 이안을 가리킨 순간, 그의 심장이 철렁했다.
“…무슨 소리야?”
이안은 애써 태연한 척 연기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조금씩 허리춤에 찬 권총에 가까워져 갔다.
“내가 살면서 들어본 얘기 중 가장 멍청한 소리인데. 아직 약 기운이 덜 빠졌나 보지?”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위기를 넘기는 것.’
이안 아슈타르의 몸뚱이에 강민혁의 영혼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감춰야 했으니까.
하지만.
“어이, 친구. 미안하지만 난 지금 정상이라고. 귀찮은 잡신들이 자꾸 귀에다 대고 쫑알대는 것만 빼면 말이야.”
이안에겐 부족한 것이 하나 존재했다.
“네가 진짜 이안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만.”
윌리엄에 대한 정보.
분명 진짜 이안이 남겨준 정보들은 기억창고에 잘 저장되어있었지만.
‘저 약쟁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이야긴 없었는데.’
지난번 저 녀석이 발동한 페르소나도 그렇고, 이 기억창고의 정보는 중간중간 비어있는 곳이 많았으니까.
“뭐, 숨기고 싶은 마음은 나도 이해한다고, 친구.”
윌리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파에 기대 힘없이 웃었다.
이윽고.
“신검공의 아들 몸에 들어있는 혼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은, 다른 놈들한테 밝힐만한 게 아니잖아?”
그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온 순간.
철컥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권총을 빼든 이안이 윌리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쩌면, 이안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비밀.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해결해야 해.’
어쩌면, 눈앞의 사내를 처리해서라도.
오른손의 검지가 차가운 방아쇠에 닿았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권총은 놈을 향해 탄환을 쏟아낼 터.
“허.”
긴장한 이안의 모습을 보곤 윌리엄이 헛웃음을 날리며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걱정마, 친구. 이걸 듣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니까. 그러니까 그 페르소나 좀 내리지? 나도 그 마왕 꼴이 되긴 싫거든.”
“내가 네 친구가 아니란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하지만 이안은 총을 내리지 않았다. 긴장 가득한 그의 모습에 윌리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옛 친구의 부탁이야. 이 정도면 이해가 되나?”
“전혀.”
“이계인들은 다 이렇게 답답한 건가? 어지간하면 알아들을 것이지. 안 그래도 잡신들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말을 마친 윌리엄이 눈을 찌푸리며 머리에 손을 얹었지만, 이안은 권총을 까딱일 뿐이었다.
“묻는 말에나 답하는 게 좋을 거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면.”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이안의 몸을 옭아맸다.
모든 사실을 알아내기 전엔, 이 권총을 내리지 않으리라.
“예, 예. 알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쇼.”
이안의 딱딱한 경고를 들은 윌리엄이 장난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말을 이어나갔다.
“후우…,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빨리 말하지. 슬슬 견디기 힘드니까.”
윌리엄의 양손이 관자놀이를 쉴 새 없이 문질러댔다. 눈에 벌건 핏발이 선 채,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내 옛 친구는 끔찍한 미래를 봤고, 그 해결책이 친구인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 이 약 없이는 5분도 못 버티지만, 나름 재주는 갖고 있거든.”
“해결책?”
“그래…, 후우.”
잠시 숨을 돌리던 그가 천천히, 힘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바로 너.”
이안을 가리킨 그가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은 순간.
“구현의 방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존재 말이야.”
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