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스텔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신은 빛의 신 마르콘이지만, 만신전 판테온에서만큼은 달랐다.
800년 전, 이 땅에 만신전을 세우고 연합공국의 칠 영웅을 지키는 데 가장 공헌한 것은 누가 뭐래도 마법의 신 갈리우스였으니까.
그리고.
우우우웅
갈리우스와 칠 영웅을 기리기 위한 제사, 영웅제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리인들이….”
“돌아온다!”
보라색으로 물든 일곱의 게이트.
마경과 이어진 마법의 문이 하늘빛을 뿜기 시작했다. 의식의 끝을 기다리던 관중들의 시선이 광장의 중앙으로 모였다.
이윽고.
파아아앗
환한 빛과 함께 일곱 개의 형체가 게이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공국의 일곱 가주를 대신해 마경에 다녀온 일곱 영웅들.
그와 동시에 게이트로부터 흘러나온 마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파란색으로 돌아간 게이트는 허공에서 접혀 사라졌다.
와아아아아-
영웅들이 귀환하기만을 기다리던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게인워드! 게인워드!”
“구스타프의 창 앞에서 그깟 주먹 따위!”
“신을 앞에 두고 인간의 잔재주를 논하다니, 이런 미련한 녀석들!”
순수한 환호보다는, 자신이 속한 공가에 대한 찬사와 다른 공가에 대한 비난에 가까웠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가 쓰러졌어!”
“무슨 일이야?”
광장에 나타난 일곱의 대리인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순간, 환호는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가 만들어낸 아공간에서 시련을 치렀던 이전이라면 시험의 탈락자쯤으로 치부했겠지만.
“서, 설마.”
이들이 다녀온 곳은 마족과 마수가 우글거리는 마경.
“당한 거야? 마족 놈들에게?”
“말도 안 돼….”
일곱의 대리인들이 상대한 것은 가짜로 만들어진 허수아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그들의 주적이었으니까.
쓰러진 자를 제외한 여섯 명의 대리인 역시 마찬가지.
대리인들의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이, 마경에서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가만, 저건 아슈타르의 대리인이잖아?”
“아슈타르라고?”
쓰러진 자의 얼굴을 알아본 관중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래, 분명 아슈타르에서 온 작자였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어서 걱정했는데 역시나….”
“신검의 이름도 옛말인가 보군. 이젠 녹슨 검일 뿐인 건가.”
수군거림은 곧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애당초 연합공국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 일곱 공가 간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일곱의 대리인들 역시 마찬가지.
“헹, 저 꼬락서니 좀 봐. 아슈타르도 이제 한물갔잖아?”
참룡공의 대리인, 바르헨이 쓰러진 이안을 보고 코웃음 쳤다.
마족을 허수아비처럼 날려버리는 강철 괴물의 위용에 놀라 도망치긴 했지만.
‘이렇게 되면 손도 안 쓰고 코 푼 셈이지. 꼴 좋다.’
이 자리가 만신전, 판테온만 아니었다면 마족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하고 싶은 심정.
가문의 복수를 해냈다는 생각에 바르헨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면.
“그럴 리가 없는데….”
“이안….”
요정과 반마족은 믿을 수 없는 눈치였지만.
“내가 본 돼지는 저렇게 약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알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어제 느낀 것이 맞다면, 저 신검의 아들은 중급 마족쯤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이상함을 느낀 것은 파이톤 역시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이안에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도 안 돼.”
이안은 충분히 강하다.
그것이 비록 제한적이고 일시적이긴 하지만, 오러 마스터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마왕이라도 만나지 않고서야….”
그 강함을 직간접적으로 느낀 파이톤은 이안이 누군가에게 당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마왕 같은 소리. 그냥 나약했을 뿐이다.”
“뭐 인마?”
누군가가 콧방귀를 뀌자 파이톤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그가 말을 꺼낸 사내를 향해 쌍심지를 켰지만.
“잠깐, 이 자식….”
그 말을 꺼낸 장본인, 게인워드 공작가의 대리자 브루스는.
“설마, 이안이야? 아슈타르의 그 망나니?”
간신히 이안의 얼굴을 알아보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동생 놈 따위한테도 박살 난 녀석을 대리인으로 내보내다니, 아슈타르도 어지간히 인물이 없긴 한가 보지?”
브루스는 쓰러진 아슈타르의 대리인을 실컷 비웃었다.
그가 이안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은 세간의 소문과 배다른 동생 발렌의 이야기들뿐.
약에 취해서 뻗기 직전인 성광공의 망나니야 신성력을 다루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쓸모없는 망나니는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
그의 비웃음은 곧 그쳤다.
지이이잉
빛의 기둥.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푸른색의 빛이 이안과 파이톤을 감싸 안았다.
“이, 이건….”
당황한 표정으로 이안을 안고 있던 파이톤을 부드럽게 기둥 밖으로 밀어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어째서?”
“말도 안 돼….”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은 저 빛의 기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제사장이라고?”
“마족에게 쓰러진 녀석을?”
그 누구도 마법의 신, 갈리우스의 선택을 믿을 수 없었다.
영웅제의 제사장은 신의 시련을 가장 잘 견뎌낸 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자리.
“어떻게, 시련도 견뎌내지 못한 나약한 놈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기 바쁘던 브루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게인워드의 가훈인 평정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
그때.
“마왕….”
옆에서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던 윌리엄이 중얼거렸다.
“뭐?”
순간, 그 말을 들은 브루스의 눈빛이 변했다.
마왕.
마경을 다스리는 군주의 이름이 왜, 약쟁이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윌리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와 이안은… 마왕을, 만났으니까.”
그가 약에 취해 꼬이는 혀로 이야기를 끝마친 순간.
브루스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
갈리우스.
수많은 신 중 유일하게 마력을 자신의 권능으로 삼는 신이자,
‘마력을 다루는 학문, 마법을 창안한 마법사의 신.’
그로 인해, 중간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신.
그의 진체가 이안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노인?’
제 생각과는 다른 신의 모습에 이안은 의아함을 느꼈다.
백색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자기 키만한 나무 스태프를 쥔 백발의 노인.
신전에서 말 한마디로 수만을 압도하던 모습을 상상하기엔, 신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으니까.
[왔는가.]
하지만.
[신검의 자손이여.]
노인이 입을 연 순간.
고오오오
‘크윽!’
영혼마저 뭉개버릴 압력이 이안의 전신을 짓눌렀다. 그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선혈이 배어 나왔다.
부르르르
강한 신성의 압박에 깨어난 알이 이안의 가슴팍에서 떨어댔다.
[이안, 정신 차려라! 조금만 버티면….]
미미르가 옆에서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정신을 잃어가는 이안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영혼이 쓸려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똑바로 선 채로 신을 노려보는 것뿐.
얼마나 지났을까.
휘이이잉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모를 바람이 이안을 휩쓸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 가해지던 어마어마한 압력이 씻겨나가듯 사라졌다.
“허억, 허억.”
[기본적인 자격은 충족했군.]
숨을 헐떡이던 이안의 앞에서, 기세를 거둔 노인이 무감정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겉보기와는 다른 오만한 눈빛이 이안을 쓸어내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느냐.]
“당신의 성역,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이곳까지 왔는지도 알고 있겠군.]
“영웅제의 제사장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이겠죠. 다 아는 얘길 굳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계속 말을 돌리자 슬쩍 짜증이 솟구친 이안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하지만 갈리우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과연, 바르바토스에게 한 방 먹일만하군.]
눈앞의 필멸자는 고작해야 익스퍼트 중급에 간신히 이른 자.
하지만 동시에, 중간계의 최강자나 다름없는 마왕에게 타격을 입힌 존재였으니까.
[그럼,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제사장이여.]
“제사장이라니, 그게 무슨….”
신의 선언을 들은 이안은 당황했다.
본래 그의 목적은 적당히 중간만 가는 것이었으니까.
“고작 중급 마족의 뿔 따위가 제사장의 요건인 겁니까?”
이안이 품에 들어있던 검은 뿔을 들어 보이며 반문했다.
‘괜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의 생각에, 제사장이란 지위는 그럴싸한 이름 말고는 아무런 이득도 없어 보였으니까.
이안은 제사장의 자리를 사양하기 위해 수를 썼다.
하지만.
[무슨 소리냐. 그 고약한 계집에게 치욕을 안긴 것만큼 만족스러운 제물은 근 300년 만에 처음이거늘.]
마법의 신 갈리우스의 날카로운 눈빛을 느낀 순간.
“뭘 해 줄 수 있습니까?”
이안은 계획을 빠르게 포기했다. 갈리우스가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본디 제사장의 자리는 마족을 상대할 선봉에게 주어지는 자리. 평소라면 제물에 걸맞은 것을 내려주었겠지만, 지금은 전시상황이니라.]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쥐여 주마. 마력, 신기. 아니면….]
말을 멈춘 마법의 신이 이안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신성의 파편이라던가.]
그와 동시에.
부르르 부르르르
신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검은 알이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진동했다.
물론.
“뭐, 나쁘진 않네요.”
그것은 이안이 가장 얻고 싶었던 것.
“그렇게 진행하시죠.”
품에서 검은 알을 꺼낸 이안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
영웅제의 꽃이 시련이라면, 그 열매는 시련에 의해 선발되는 제사장이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와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합공국의 인물들에겐 큰 영광이었지만, 그보다는.
‘제사장은 신에게 직접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파이톤이 자신을 밀어낸 푸른빛의 기둥을 바라봤다.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몰랐지만, 확실한 것은.
‘이안은 더욱 강해지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고작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로도 마왕과 대적할 수 있었던 이안이다.
‘어쩌면, 마왕급의 전투력을 가질지도.’
그리고, 그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연구대상이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파이톤의 입가는 언제부터인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때.
지이잉
기둥이, 사라졌다.
푸른색의 기둥이 걷히고 남은 것은.
“이안!”
언제 쓰러져있었냐는 듯, 두 발로 선 이안과.
미야아옹
그의 어깨에 앉은, 기둥이 내려오기 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검은색의 고양이뿐.
‘고양이를 받았다고?’
파이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는 물질계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신.
그런 강력한 존재를 직접 만나 받은 것이 마력도, 신기도 아닌.
“고작 검은 고양이 따위를 받았다고? 이런 병….”
연구대상이자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선택에, 파이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안 아슈타르.]
이안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번 영웅제의 제사장에게, 마족 원정의 선봉을 맡긴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의 전언이 만신전 전체에 울려 퍼진 순간.
“뭐?”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오오오오옹!
[내가, 내가 고양이라니! 레온하르트를 이어받은 내가, 어찌….]
이안의 어깨에서 울부짖는, 검은 고양이가 된 미미르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