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비르헨 구스타프.
칠영웅 중 하나인 참룡공의 피를 이어받은 6급의 중급 마법사이자, 자격을 인정받아 영웅제에 참가한 구스타프 공작가의 대리인.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슈우우우
비행마법을 펼친 비르헨이 마경의 보랏빛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시선이 사방으로 움직였다.
‘이안, 그 녀석을 찾아야 한다.’
마경으로 향하는 일곱의 게이트는 각기 다른 출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출구의 위치는 완전히 무작위였으니,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경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일.
‘하지만 못 찾아낼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비르헨에겐, 남들과는 다른 능력이 있었으니까.
키이이잉
공중에 떠오른 바르헨의 눈동자가 파충류처럼 세로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과 몸에서 강철과도 같은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용혈(龍血).
용의 피를 깨워낸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한 조각.
“후우.”
머리를 가득 채운 고양감.
바르헨은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감았다.
용혈로 얻을 수 있는 권능은 대개 브레스나 비늘과 같은 대단치 않은 것들이었지만, 그가 가진 권능은 조금 달랐다.
키이잉
용안(龍眼).
용혈을 깨우친 자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가지고 있는 권능.
그리고, 바르헨이 모든 경쟁자를 제치고 구스타프의 대리인으로 나설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
피잉
바르헨의 눈이 일순 푸르게 빛났다. 동시에 그의 시야에 수많은 정보가 떠올랐다.
보라색으로 물든 대지 사이에 드문드문 박힌 푸른 점과 노란 점들.
“찾았다.”
개중, 푸른 점과 노란 점이 겹친 곳들을 발견한 그의 눈이 빛났다.
마수와 마족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발휘하는 존재는.
오직 대 마족병기 페르소나를 다루는 자격자뿐.
슈우우우
여섯의 목표를 확인한 바르헨의 몸뚱이가 빠르게 하늘을 갈랐다.
분명, 그가 찾는 자는 저들 중 하나이리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좋아.”
이번 영웅제의 목표를 찾아낸 바르헨은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산불이라도 일어났던 건지, 새까맣게 타오른 언덕 위에 선 금발의 사내.
바르헨은 가주의 말을 떠올렸다.
‘감히 가문을 능멸한 신검 놈들에게, 용의 분노를 보여주어라.’
‘아무리 아슈타르라지만, 도가 지나쳤어.’
감히 가문의 후계자 중 하나를 건드리다니.
마족이라는 공동의 적이 아니었다면, 당장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이제 가문이 받은 모욕을 돌려줘야 할 때였다.
‘저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슈타르 공작가의 장남과 차남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둘과는 가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으니까.
둘을 제외한다면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지만.
‘그 폐검이 영웅제에? 말도 안 되지.’
이안 아슈타르.
아슈타르 공작가의 막내이자 구제 불능의 쓰레기.
라이덴과 클라우, 그의 두 형제가 놈에게 당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바르헨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마력도 다루지 못하던 놈이, 고작 일 년 만에 오러 익스퍼트를 때려 눕혔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십 수년간 고행과 수련을 반복해 겨우 이 자리에 오른 자신은 천하의 둔재란 말인가.
‘그럴 리 없어.’
고개를 거세게 흔든 바르헨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에 스리슬쩍 힘을 주었다.
놈이 마족들을 상대하며 등을 보일 때.
그 틈을 노릴 셈이었다.
‘복수에 명예 따위는 필요 없지.’
그저 결과만이 필요할 뿐.
그는 상대에게 감지당하지 않을만한 거리에서 기회를 엿봤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마족이군, 하급인가?’
이안을 향해 다가오는 마족을 확인한 그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중급도 아니고, 고작 하급의 마족으로 페르소나를 사용하는 상대의 틈을 만들어내긴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뭐야, 왜 이렇게 많이 몰려와?’
무슨 파티라도 열린 것인지, 지평선 너머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마족들.
‘어쩌면….’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페르소나의 위력은 강력하지만, 그 지속시간은 한정되어있으니까.
저 많은 마족들을 지원 없이 홀로 상대하기 위해선 못해도 환수급의 페르소나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할 터.
‘끝이다.’
바르헨은 곧 있을 아슈타르의 최후를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끼릭 끼기긱
일은 그의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저, 저건 뭐야?”
아슈타르의 대리인을 감싼 무언가를 본 바르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이이이잉
온몸이 강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차를 연상케 하는 넓적한 괴물.
바르헨이 생각할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설마, 새로운 환수급?’
환수급의 페르소나를 가진 자들에 대한 정보는 대체로 알려져 있었다.
환수급 이상의 페르소나는 그 숫자도 적을뿐더러, 환수급의 페르소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세 번 이상 영성의 홀을 방문해야 했으니까.
새로운 환수급의 페르소나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놀라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이이이잉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콰앙
단 일격.
괴수의 머리에 달린 기다란 랜스가 마족을 향해 불을 뿜자.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하급 마족의 몸뚱이가 난도질이라도 당한 것마냥 갈기갈기 찢겨나갔으니까.
“저게, 환수급이라고?”
콰아아아아앙
괴수가 불을 뿜을 때마다 육편으로 변해버리는 마족들.
파르르르
학살이라 말하기에도 부족한 일방적인 전투를 지켜보던 바르헨의 비늘이 세차게 떨렸다.
***
[이안, 공중에 누군가가 떠 있다. 대리인 같군.]
“그래?”
철컥
미미르의 말을 들은 이안은 마지막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쾅
폭음과 함께 기다란 포탄이 적을 향해 초음속으로 쏘아져 나간다.
크아아아-
상대는 병기급 페르소나로도 쉽사리 대적하기 어려운 중급의 마족이었지만.
이안이 날려 보낸 것은 M908 장애물제거탄.
콰아아아아앙
콘크리트 토치카도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력한 포탄이 중급 마족의 몸뚱이를 믹서기처럼 찢어발겼다.
“진작 이렇게 처리했어야 했는데 말야.”
병기급 페르소나를 갓 얻었을 때가 떠오른 이안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어차피 신성력으로 마족 특유의 저항력을 반감시킬 수 있다면, 관통보다는 강력한 폭발력으로 타격을 주는 편이 더욱 쉬웠으니까.
“그나저나, 저 자식은 왜 여기 있는 거야?”
오늘의 업무를 끝마친 이안이 전차장용 카메라로 하늘에 떠 있는 인형을 확인했다.
“뭐야, 구스타프잖아.”
얼굴과 몸을 뒤덮고 있는 비늘과 세로로 길게 쪼개진 눈동자는 용혈을 깨워낸 자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
일곱의 대리인들 중 용혈의 힘을 가진 자는 구스타프의 일족뿐이었으니까.
“설마, 뒤통수라도 치려고 온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시련마저도 내팽개치고 그를 쫓아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상대의 속셈을 대충 눈치챈 이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직 맛을 덜 봤나 본데.”
아무래도.
한 번 더 혼을 내줄 필요가 있었다.
철컥
재빨리 전차 지붕으로 뛰어오른 이안이 거치된 대공기관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순간.
투타타타타타타타
수백의 기관총탄이 하늘을 수놓았다.
사람 따위는 벌집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12.7mm의 탄환들.
하지만.
[도망갔군.]
이안이 채 사격을 가하기도 전, 놈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이안은 입맛을 쩝쩝 다셨지만, 어차피 유효사거리 밖이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안의 목적은 상대가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할 일을 해야겠지.
이안은 자신이 쓰러트린 수십의 마족을 바라봤다.
대부분 하급이나 최하급에 불과한 수준이었지만, 마지막으로 처치한 녀석은 중급의 마족.
이 정도면 그럭저럭 갈리우스에게 체면치레는 할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저 고기 조각들은 어떻게 챙겨갈 셈이냐?]
처참하게 짓이겨진, 말 그대로 고기 조각이 되어버린 마족들의 시체를 보며 미미르가 혀를 찼다.
벙커도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탄환을 직격으로 맞았으니, 마기를 빼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어떻게든 모아가면 되지 않을까? 잘 다져놨으니 먹기도 쉬울 테고.”
[부디 갈리우스 앞에서 똑같이 말해주면 좋겠군.]
미미르가 헛소리를 내뱉는 이안을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그럼 못할 건 뭐야?”
키이이잉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여기저기가 그슬리고 얼어붙은 전차를 앞으로 몰았다.
고깃조각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적당히 주워 담으면 그럭저럭 제물로서의 가치는 하지 않을까.
“오, 이건 그래도 멀쩡한데?”
중급 마족이 있었던 곳에서 기다란 뿔을 발견한 이안이 휘파람을 불었다.
마족의 상징인 뿔은 그 자체로 마기를 포함한 에너지의 결정체였으니, 제물로서의 가치도 꽤 높으리라.
“흐흐흥.”
이안이 콧노래를 부르며 전리품을 챙기고 있을 때.
[이안!]
미미르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 그래? 어차피 여기까지 올 마족은….”
이안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미미르?”
사자의 표정을 본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공포.
800년간 마족을 베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신검 라이온하트의 복제 인격인 미미르는.
분명 겁에 질려있었으니까.
[지금까지와는 달라! 이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끼리리리리릭
심상찮은 분위기.
이안은 재빨리 전차를 반대 방향으로 몰았다. 60톤의 강철 기사가 말보다 빠른 속도로 대지를 짓밟았다.
하지만 이안이 채 자리를 벗어나기도 전.
[마왕이다.]
미미르가 선고했다.
그와 동시에.
쐐애애액
거대한 기운이 이안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제기랄.”
미미르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들은 순간, 이안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마왕.
신과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그 단어는 오직 마경의 모든 마족과 마수를 지배하는 열 한 명의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기이이이잉
전차의 주포가 적을 향해 움직였다. 미미르에 의해 자동으로 장전된 포탄이 쏘아져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상대는 마왕이다.’
필요한 것은, 어떤 적이건 꿰뚫어버릴 수 있는 창.
조준경에 진한 남색으로 번들거리는 기운이 가득 찬 순간.
철컥
이안은 방아쇠를 당겼다.
투캉
120MM 날개안정철갑탄.
쐐애애액
오로지 적을 관통하기 위해 태어난, 열화우라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화살이 굉음을 내며 공기를 찢어발겼다.
하지만.
끼기기긱
‘끼기기긱?’
이안의 귓가에, 생전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특히 생물체를 관통하는 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이건 차라리….
“흐응.”
콧소리와 함께, 남색의 기운이 인간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퇴폐적인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절세의 미녀.
머리에 뿔이, 등에 박쥐 날개가 달려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마음먹고 유혹한다면 넘어가지 않을 사내는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말도 안 돼.”
이안에게 그녀의 미모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안의 눈이, 그녀의 작달막한 손으로 향했다.
“포탄을.”
잡았어?
두 손으로 힘겹게 잡고 있는 거대한 금속 화살.
그것은 분명, 이안의 전차가 쏘아낸 포탄이었으니까.
맨손으로 전차 포탄을 잡아내는 여인이라니.
그 엽기적인 광경에 이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마왕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흐음.”
이안의 앞에 선 마왕은 머리를 갸웃하며 생각하더니.
“아, 알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이안이 탄 전차를 화살촉으로 가리켰다.
“너, 그거지?”
그와 동시에
“관리자.”
말을 마친 그녀가 생긋, 미소를 지은 순간.
‘위험해.’
콰앙
이안은 전차포의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