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대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역병처럼, 끈적한 마기가 게이트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마, 마기다!”
“마기라고?”
영웅제를 보러 몰려온 군중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만신의 지상 대리자, 통합주교가 다스리는 땅.
신성한 힘으로 가득한 이곳에 마기가 침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뿐.
“마족의 침공이다!”
“마족이 어떻게 이 신성한 땅까지…”
마족.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침식시키는 존재들.
그 외의 어떤 존재가 마기로 만신전의 성역을 더럽힐 수 있단 말인가.
“경보를 울려!”
“젠장, 통합주교께선 어디 계신 거야!”
지난 800년간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을 마주한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냐.’
하지만 이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분명, 저 게이트를 연 것은 갈리우스야.’
마법의 신이 배신이라도 한 게 아닌 이상에야, 성역에 마족을 풀어놓을 리 없지 않은가.
[다른 자들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군.]
미미르의 말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공가의 대리인들을 살폈다.
‘역시.’
마기가 눈앞에서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동요를 보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겨우 마기 따위에 동요하기에는, 그들의 앞에 선 신성(神聖)이 너무나 또렷했으므로.
그리고 역시나.
‘멈췄다.’
마치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게이트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던 마기가 확장을 멈췄다.
광장의 중앙.
축구장 절반만큼의 넓이를 장악한 마기는 더이상 뻗어나가지 못하자 투명한 벽을 타고 고이기 시작했다.
곧, 신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의 선조가 그랬듯, 너희 역시 곧 간악하고 비열한 마족들의 목을 치러 갈 것이다.]
앞서 사무적인 어투로 시작한 것과는 달리, 마족을 언급한 갈리우스의 목소리는 살짝 격양되어있었다.
그의 한 마디 말이 신전 전체로 울려퍼진 순간.
“마족놈들….”
“놈들 때문에 우리 데이지가….”
혼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마족놈들은 다 죽여야해!”
“더러운 마족놈들!”
삽시간에, 습격으로 가족을, 친구를 잃은 자들의 울분이 터져나왔다.
무언가 이상했다.
‘신성의 힘인가.’
신성은 신의 의지이자 신을 구성하는 것 그 자체.
신성은 주변의 것들을 신성에 동화시킨다. 물질뿐만이 아니라 정신마저도.
장내의 분위기가 바뀐 것은, 분명 신의 분노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번 영웅제는 그 시작. 나에게 제물을 바치고자 한다면.]
우우웅
갈리우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각 대리인들의 앞에 놓인 게이트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트럭 한 두 대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
[마경으로 들어가 그에 걸맞는 제물을 가져오라.]
구구구궁
신언(神言)이 다시 지축을 흔들었고.
‘뭐?’
그 말을 들은 이안은 두 귀를 의심했다.
***
마경(魔境).
하늘도, 땅도, 강도.
모든 것이 보랏빛의 마기로 물들어버린 마(魔)의 대지.
마수와 마족이 뒤엉켜 죽고 죽이는 살육의 땅.
하지만.
“뭐야, 이거. 같은 대륙 맞아?”
생애 처음 마경에 들어선 이안의 감상은 심플했다.
게이트를 넘자마자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이 보라색으로 물들어있는 세상.
셀로판지로 만든 싸구려 3D안경이라도 낀 것 같은 색감이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인계와는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오랫동안 마기에 침식돼서, 이제는 마기와 동화되어버린 곳이니까.]
마족의 침공 이전, 이 대지의 본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미미르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페르소나라도 없었으면 1초도 못 버텼겠는데.”
말을 마친 이안이 몸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화아아
활성화를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동으로 유지되는 페르소나의 신성력이 이안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신성력의 농도가 특별히 높지는 않았지만, 대지와 공기로부터 들어오는 마기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마족을 사냥하기 위한 병기니, 마경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게 당연하지.]
“그래, 그리고 이제 그 기능을 시험해 볼 때지.”
말을 마친 이안은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모든 것이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론 일반적인 평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원에는 풀이 무성했고, 듬성듬성 자라난 나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그 모든 것이 마기를 듬뿍 머금고 변이한 마수란 게 문제지만.
끼에에엑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는 잡초들을 밟아가며, 이안은 근처의 야트막한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것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
그으으으-
당연히, 그 사과나무 역시 마족이었다.
투투투투툭
이안이 언덕 근처로 다가가자,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수십의 열매들이 저절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그저 보라색일 뿐인 사과.
하지만 열매들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호오?”
꾸득 꾸드득
뼈가 뒤틀리는 듯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사과들의 형체가 제 멋대로 쪼개지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쪼개진 자리엔 이빨이, 뒤틀린 자리엔 다리가.
“뭐야, 저게.”
생전 처음보는 역겨운 광경에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키이-
거미? 도마뱀?
한때 사과였던 것들은, 이제 뭐라 칭해야 할지도 모를 무언가가 되어 이안을 향해 울부짖었다.
[조심해라, 놈들에게 잘못 물리면 아무리 페르소나라도 마기를 막아줄 수 없어!]
미미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평범한 사과나무로 보이지만 놈은 일곱 마족 중 마목(魔木)에 속하는 하급의 마족.
수 많은 마수들이 죽어나가는 지옥의 땅에서 눈에 띄기 쉬운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만으로, 놈의 강함은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미미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으으-
사과나무가 괴성을 질렀다.
키이-
그것이 명령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타타타타타탓
사과였던 조그만 마수들이 네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보라색 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나하나는 대단치 않지만, 상대는 작고 빠른데다 수적으로도 우위.
“오라.”
가진 거라곤 페르소나뿐인 이안에게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미미르.”
이안은 걱정하는 대신 페르소나의 시동어를 외쳤다.
파아앗
병기의 봉인이 풀림과 동시에 마력의 푸른빛이 이안을 감쌌다. 지구의 방탄복과 헬멧이 그의 코트 위에 덧씌워졌다.
페르소나를 뒤집어쓴 이안은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바람은 순풍.”
손가락으로 바람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아앗
그 순간, 양 손이 푸르게 빛났다.
우우웅
그의 손에 기다란 무언가가 잡혔다.
등에 맨 금속탱크에 연결된 호스와, 자그마한 불꽃이 매달린 철봉.
키이이-
언덕 위에서 달려드는 사과마수들을 향해, 이안은 쇠파이프의 불꽃을 겨누었다.
[이안, 설마 그 불꽃으로 뭘 해보겠다는 건 아니겠지?]
고작해야 촛불에나 비할 수 있을까.
아무리 나무가 불에 약하다지만, 수많은 마수들을 태워버리기엔 너무나 작고 연약한 불꽃.
미미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무를 상대론.”
하지만.
“역시 이거만한 게 없거든.”
철컥
이안이 쇠파이프에 달린 방아쇠를 당긴 순간.
콰아아아아아
화염방사기의 입구에서 거대한 불꽃이 뿜어져 나갔다.
그 대상은, 당연히 이안을 향해 달려들던 사과들.
키에에에-
페르소나는 마력과 신력이 공존하는 대 마족병기.
신력을 듬뿍 머금은, 말 그대로 성화(聖火)를 뒤집어쓴 사과마수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화염방사기의 연료는 각종 기름을 적절한 비율로 섞은 혼합유.
바닥을 아무리 구른들, 기름에 붙은 불이 쉽사리 꺼질 리 없다.
화르르르륵
결국 성화를 견디지 못한 마수들은 잿더미로 변해버렸지만, 불은 꺼지기는커녕 주변의 잡초들을 태우며 거세게 옮겨붙기 시작했다.
순풍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화염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은.
그, 그으으으으-
언덕의 정상을 지배하고 있던 사과나무 마수.
투투투투툭
나무에 매달린 수 많은 열매들을 던지며 어떻게든 불길을 막아보려 했지만.
화르르륵
마기를 듬뿍담은 열매는 되려 성화의 맛있는 먹이가 될 뿐.
그으으으으-
다가올 최후를 직감한 사과나무의 앞에서.
“꺼져, 새끼야.”
[미친 놈.]
나무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린 이안을 미미르가 정신나간 놈 보듯 바라봤다.
***
마목이 쓰러지는 것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동을 할 수 없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왠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저항력을 지니도록 진화했기 때문이었지만.
[고통받는 시간만 길어졌을 뿐이지.]
까맣게 타버린 나무를 보며 미미르가 코웃음쳤다.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불꽃 앞에서, 마족과 마수들이 가진 저항력은 큰 의미가 없었으니까.
“흠.”
잿더미로 가득한 언덕 위에서, 보랏빛으로 물든 대지를 훑어본 이안이 턱을 괴었다.
‘앞으로 다섯 시간.’
마경에서 제물을 직접 구해 오라는, 말도 안되는 시련의 제한시간.
‘너무 짧아.’
남은 시간을 분배해 본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숫자만 맞춰간다면 모르겠지만….’
제물이 될 마수나 마족을 직접 찾아다녀야할 뿐더러, 제물로써 가치가 있을법한 마수나 마족들은 제각기 자신의 영역에 흩어져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 녀석이라도 챙겨가야하나? 얘도 나름 마족일텐데….’
파삭 파사삭
완전히 재만 남아 부스러져가는 나무를 보며 이안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이안.]
“왜?”
미미르가 조심스레 이안을 불렀다. 이안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사자머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11시방향, 3.2KM. 마족이다.]
마족.
마수의 위에서 마경을 지배하는, 보랏빛 대지의 최종포식자.
“뭐야, 제물이 제 발로 걸어들어 왔잖아?”
하지만 지금의 이안에겐 좋은 제물일 뿐이었다.
미미르의 말을 듣자마자 이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등급은?”
[하급이다.]
“좀 모자란데.”
미미르가 답하자 이안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분명, 제물의 수준에 따라서 보상을 내려주겠지.’
하급의 마족이 약한 상대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그렇다해서 보기 어렵거나 가치가 높은 존재도 아니었다.
중급 이상의 마족도 충분히 때려잡을 자신이 있는 이안에겐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하나가 아니다.]
미미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10시 방향 하급 셋, 9시 방향에 중급 하나….]
미미르가 적의 위치와 숫자를 하나씩 부를 때마다, 이안의 눈 앞에 적의 위치와 거리가 표시되었다.
순식간에 이안의 눈 앞을 가득 메운 붉은 삼각형과 숫자들.
갑자기 몰려드는 마족과 마수들을 본 이안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뭐야, 여기 불구경이라도 났… 아.”
어이가 없어 말을 꺼내던 이안은, 이유를 깨닫고는 재만 남은 나무를 바라봤다.
분명, 보랏빛 일색의 세상에서 백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눈에 띄는 존재였을 터.
[이안, 이 곳은 너무 개방되어있다. 후퇴하면서 거리를 벌리는 것을 추천한다.]
이안의 전투방식을 잘 알고있는 미미르가 조언했다.
아무리 강한 화력을 지닌들, 엄폐물 하나 없는 평원에서 포위당한다면 살아남기 힘들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여긴 고지대야.”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이안의 말뜻을 이해못한 미미르가 되물었다. 이안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만큼 내가 싸우기 좋은 자리가 없다는 말이지.”
우우웅
말을 마친 이안은 페르소나의 출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지금까지는 병기급의 힘만을 써왔다면.
철컹 철커덕
이제는 환수급의 힘을 사용할 차례.
철컥 드르륵
이안을 감싼 푸른빛이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에너지 상태였던 마력이 물질화되면서 수많은 기계부품과 복합장갑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장에 나타난 것은.
키이이잉-
굉음을 내지르는 지구 최강의 전차.
M1 에이브람스.
“그럼.”
사냥을 시작해볼까.
기이이잉
다가오는 마족들을 향해 주포를 겨눈 이안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