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알리아 이그드라실.
이안과 그녀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민혁이 처음 이안의 몸에 빙의되었을 때.
그녀가 영성의 홀에서 발렌과 싸우던 이안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영웅제가 아니라 무덤에 가 있었겠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이안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알리아가 이안의 영혼을 노리려 하지만 않았더라도, 둘은 꽤 괜찮은 관계가 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가정은 가정일 뿐이지.’
지나간 일을 가정하는 것보다는, 다가온 현실을 상대하는 게 맞지 않는가.
“무슨 일이지? 우리 사이에 볼 일은 더 없을 것 같은데.”
부르르르
이안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의 분노를 느낀 품속의 알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헤헷, 역시 저번에 내가 봤던 게 틀리지 않았다니까? 정말 잘 컸다, 잘 컸어.”
요정족 특유의 아름다운 용모와 기묘한 분위기가 어우러진 미소.
상대가 남성, 아니 수컷이라면 이를 보고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안은 그 미소에 빠지지 않았다.
‘나를 살피고 있어.’
그녀의 입과 달리, 그녀의 눈은 웃지 않았으니까.
스으윽
그녀의 눈, 코, 귀.
심지어 몸속을 흐르는 마력까지.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자신을 뱀처럼 훑어내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불쾌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감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우웅
이안은 오러를 일으켰다.
피부를 타고 뿜어져 나온 푸른색 오러가 낯선 마력을 몸 바깥으로 밀어냈다.
“무슨 짓이지? 그만두지 않으면 날 모욕하는 것으로 알겠다.”
이안이 요정을 향해 으르렁댔다.
당연하지만, 마력을 이용해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은 적 혹은 하급자에게나 할 수 있는 일.
같은 칠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끼리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흠.”
하지만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과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
이안은 조심스레 거리를 벌렸다. 설마 이곳에서 자신을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상대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허리춤의 미미르를 쥔 이안의 오른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대치는 길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컸는데, 돼지?”
알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장난스레 입을 가렸다. 그녀의 입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럼 또 봐.”
말을 마친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섰다.
“…뭐야? 왜 그냥… 에엣취!”
옆에서 덜덜 떨고 있던 반마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안과 미미르는 알 수 있었다.
[겁먹었군.]
‘그래.’
그녀가 이안의 강함과 격을 읽어냈듯, 이안 역시 독심술로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떨리는 눈동자, 불안한 호흡, 몸을 돌리기도 전 이미 몸 바깥으로 움직인 발끝.
그녀는 분명, 이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네 성장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지.]
미미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력이라고는 한 톨도 없던 일반인이 일 년도 되지 않아 환수급 페르소나를 얻고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오르다니, 세상 사람들이 들었다면 분명 미쳤다고 했을 거다.]
원래부터 마력을 다뤘던 거라면 모를까, 초대 칠영웅들 조차도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했을 터.
[너라면, 정말로 정점까지 도달할지도 모르겠어.]
지금까지의 행적을 되짚어본 그가 기대 어린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정점이고 나발이고.’
이안에겐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었지만.
‘당장 날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지.’
이안 역시 또래 중에선 강자에 속했지만, 물질계 전체를 놓고 보자면 기껏해야 중상위.
대지를 가르고 바다를 얼리는 진짜 강자들에 비하면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았으니까.
그들이 목숨을 노린다면, 이안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때가 되기 전에….’
이 녀석을 키워야 한다.
부르르
품속에서 떨고 있는 검은 알을 만지작거리던 이안은, 멀어져가는 알리아의 등을 잠시 노려봤다.
***
일 년에 한 번 개최되는 영웅제는 일곱 공가의 연합인 연합공국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다.
일곱 영웅에게 페르소나를 내려준 마법의 신, 갈리우스에게 바치는 제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와아아아아아-
일곱 영지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즐기는 유일한 행사이자 축제였으니까.
“어제랑은 완전히 다른 곳이잖아?”
마차 밖의 분위기를 살핀 이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아아-
각지에서 몰려든 공국의 사람들이 수도자들의 마을을 꽉 메우고 있었다.
이게 과연 어제의 그 마을이 맞기는 한 걸까 싶을 정도.
그 절정은 마차가 마을 중앙의 신전 안으로 진입한 뒤였다.
“대리자들이다!”
“중간계의 수호자!”
“하늘의 모든 신들이여, 저들을 굽어살피소서….”
공국의 일곱 공가는 본디 마족의 공세로부터 인계를 지키는 방패.
그들이 마족과 싸우며 흘려온 피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받아야 할 존경이었다.
물론, 그런 의미의 환호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구스타프의 차례다!”
“무슨 소리, 이번 제사장은 우리 게인워드 공작령의 차지라고!”
“허허, 모르시는 말씀. 신께 바치는 제사를 모시는 장은 마땅히 신성한 핏줄을 가진 성광공의 후예가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인마?”
영웅제는 공국 전체의 축제이기도 했지만, 일곱 공가가 대리인을 통해 벌이는 일종의 대리전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고함소리를 들은 미미르가 피식 웃었다.
[공가끼리 대놓고 칼을 들이대지야 않지만, 사실상 대리인 중 가장 강한 자들만이 오를 수 있는 것이 제사장의 직위지.]
“그럼, 우리는 말 그대로 공가를 대신해 싸우는 거군.”
[그렇지. 영민들의 자부심 중 하나가 자신이 속한 공가에서 나온 제사장의 수니까.]
이안은 미미르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말대로라면, 영웅제에 나선 대리인은 제사를 모시는 사제보다 올림픽에 나온 국가대표 선수에 더 가까웠으니까.
문득,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뒷감당을 하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신검의 대리인으로 나가, 참룡의 대리인을 발아래 무릎 꿇려라.
자신을 대리인으로 내보낸 속셈이 너무 뻔하지 않은가.
이안이 작게 쓴웃음을 지을 때 즈음.
끼이익
이안과 파이톤을 태운 마차가 자리에 멈춰섰다.
***
영웅제의 메인디시가 제사장의 임명식이라면, 개회식은 영웅제의 흥을 돋우는 에피타이저쯤 되리라.
끼이익
수많은 공국민들의 사이로 지나가던 일곱 대의 금빛 마차가 거대한 신전 한 복판의 광장에 멈춰섰다.
“역시, 이번엔 이그드라실 쪽에서 이를 갈고 나왔겠지?”
“작년엔 좀 아쉬웠지. 아무리 신력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성장한다지만, 다니엘 공자께서 그렇게 빨리 성장했을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영웅제는 마법의 신을 기리기 위한 제전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신보다는 누가 제사장이 될 것이냐에 더 쏠려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 싸움구경과 불구경이라던가.
공가의 대리인들이 제사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는 것만으로도 구경거리는 충분했다.
“이번에도 반마족들이랑 요정들은 안 보이는군.”
“한쪽은 너무 꼬장꼬장하고, 다른 한쪽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게나.”
물론, 이그드라실의 요정이나 판데모니엄의 마족들을 제외한 인간들의 얘기일 뿐이었지만.
이윽고.
스으으윽
한 대씩, 마차의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하더니 대리인들이 하나씩 바깥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
폭권의 게인하드, 참룡의 구스타프, 환세의 가울드.
일곱 공가를 대표하는 자들이 하나씩 마차 밖으로 나올 때마다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요정과 반마족인 알리아와 파이톤의 차례에 와선 환호성이 조금 작아졌지만, 관중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큰 티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윌리엄 공자가?”
“신의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저 몸으로?”
윌리엄 바드리안.
자기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거구의 사내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스으윽
사자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의 문이 열렸다.
신검공, 아슈타르 공작가의 차례.
마차에서 한 사내가 바닥으로 내려온 순간.
“…어?”
달아오르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저거, 누구야?”
“아슈타르에 저런 사람이 있었다고?”
탄탄한 몸을 가진 금발의 사내.
그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아슈타르의 대리인이라며 왔으니 당황할 수밖에.
심지어.
“검이 없다고? 신검공의 후손이?”
검 대신 허리에 찬 것은 단검보다도 짧아 보이는 무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기로는 볼 수 없는 형태였다.
“검조차 쓰지 못하는 자를 대리인으로 세우다니, 아슈타르도 이젠 예전만 못하군.”
“그럼, 마법을 쓰는 건가? 아니 신검공의 후손이 왜 검을 쓰지 않고….”
신검공의 후손은 검을 부린다.
공국이 생겨난 이래, 팔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하나의 전통.
설사 검이 아닌 마법이나 신법을 익힌 자라 하더라도, 신검의 후손은 항상 허리에 검을 패용해왔다.
신검의 대리인이 허리에 검을 차지 않았다는 것은.
“설마, 아슈타르의 핏줄이 아니라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랬다면 애당초 대리인의 자격이 없지 않은가. 신께서 노하실 게 뻔한데 그럴 리가….”
칠영웅의 대리인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피를 이은 자뿐이다.
신의 분노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게 아닌 다음에야,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다른 대리인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도, 뭔가 이상하단 사실을 깨달은 군중들은 웅성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모두 모였군. 영웅의 후예들이여.]
구구궁
마법의 신 갈리우스.
그의 거대한 목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미친.’
이안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법의 신 갈리우스가 한 일은 고작 말 한마디를 내뱉은 것뿐.
하지만.
구구구궁
말 한마디에 지축을 뒤흔드는 것을 어찌 고작이라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시끄럽게 떠들던 관중들은 어느새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눈이 광장의 중앙을 향했다.
‘저기인가.’
아무런 형체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안은 그곳에서 거대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부터, 시련을 시작하겠다.]
800년간 똑같은 일을 반복해왔기 때문일까.
말을 내뱉을 때마다 땅이 진동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신의 어조 자체는 굉장히 사무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우우웅
아무런 기척도 없이.
허공에 일곱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푸른빛을 내뿜으며 회전하던 마법진은 곧 일곱의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이안은 파이톤의 설명을 떠올렸다.
‘분명, 아공간으로 간다 했었지.’
저 게이트를 타고 아공간으로 들어가서, 주어진 시련을 극복하고 영웅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갈리우스가 내려주는 시련의 의의.
하지만.
‘이건…?’
파이톤의 설명과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스으으으
게이트로부터 흘러나오는 보랏빛의 기운.
이안은 이 기운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세계에 온 뒤로 몇 번이고 상대해왔으니까.
단지.
‘아니, 마기가 왜 여기서 나와?’
그 기운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나타났을 뿐.
사아아아
주변을 서서히 잠식해가는 보랏빛 마기를 보며, 이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