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철컥
이안이 총을 꺼내든 순간, 그와 윌리엄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안과 윌리엄의 관계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파삭
정적을 깬 것은 떨어진 술병이었다.
술병이 깨지면서 반쯤 남아있던 술이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뭐? 방금 뭐라 그랬냐?”
술이 깨기라도 한 것일까.
손에 든 술병을 놓친 윌리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귓구멍이 막혔나 보지?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들어찬 이안에게, 상대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같은 망나닌데, 뭔 상관이야.’
자신이 아슈타르의 폐검이었듯, 윌리엄 역시 바드리안 공작가에서 내놓은 자식이 아닌가.
원래부터 우정 따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이안에게 상대는 완벽한 타인.
망나니 이미지를 벗으려고 노력한 지가 언제부턴 데, 이제 와서 다시 망나니 친구 따위와 어울려야 할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공자! 무기를 거둬 주십시오.”
어깨에 가마를 멘 신관 중 하나가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리 공자께서 윌리엄 공자님의 친우라지만, 이곳은 만신전입니다. 성광공의 후예에 대한 예의를 갖추십시오!”
신관의 눈빛이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가마를 메고 있던 다른 세 신관 역시 마찬가지.
마치 지구의 사이비종교인들을 보는 것 같은, 광신(狂信)의 기운이 이안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싫은데?”
이안은 코웃음 쳤다.
“나 역시 신검공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란 걸 잊었나 보지? 꼬우면 저 새끼부터 예의를 갖추라 그래.”
저 돼지가 그들의 신일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신은 아니었으니까.
“이런 불경한…!”
이안의 말을 들은 신관들이 격분했다.
모든 신의 힘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다루는 성광공, 통합주교는 사실상 지상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들에게, 윌리엄이 모욕당하는 것은 신의 아들이 모욕당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으니까.
둘 사이의 대치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그만.”
가마에 기대있던 윌리엄이 손을 들었다.
‘응?’
녀석을 본 이안은 조금 놀랐다.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은 같았다. 약 기운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팔다리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언제 술에 취해있었냐는 듯, 알코올로 흐리멍덩해진 그의 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묘한 현기(玄機)가 서려 있었다.
분명, 그것은 고농도의 신성력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기세.
‘이 자식, 뭐지?’
눈에서 현기를 뿜어내는 개망나니라니.
마족이 신성력을 뿜어낸다는 급의 개소리가 아닌가.
이안의 촉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
“딸꾹.”
윌리엄의 입이 먼저 열렸다.
“…가자, 흥이 깨졌어.”
조금은 나른한,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다른 또렷한 목소리로.
“네, 공자님.”
윌리엄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노기를 거두고는 아무 말 없이 가마를 메고 되돌아갔다.
“뭐야, 저 자식?”
미미르를 홀스터에 꽂아놓은 이안이 가마를 태운 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곤 입맛을 다셨다.
남의 공작령에서 싸움을 벌이는 최악의 사태까지 염두에 두었던 이안에겐 조금 맥빠지는 결말.
[흠….]
옆에서 사라지는 가마를 지켜보던 미미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내 생각엔…아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궁금해진 이안이 물었지만, 미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사자의 눈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가마를 좇고 있었다.
‘뭐야.’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던 모습. 이안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걸 보니, 공자님이 무서운 줄은 잘 알고 있나 보네요.”
이안과 미미르의 대화를 알 리 없는 에반이 옆에서 살기어린 눈으로 엘리베이터를 노려봤다.
모욕을 당한 건 에반 역시 마찬가지.
이안이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직접 칼을 빼 들었으리라.
“그래?”
하지만, 윌리엄의 힘을 느낀 이안의 반응은 아까와 달리 시큰둥했다.
“우리도 따라가자.”
“네.”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은 벽에 설치된 수많은 엘리베이터 중 하나로 다가갔다.
건물의 형태는 지구의 평범한 고층빌딩이었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을 가진 만신전.
그 안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을 위해, 수백의 엘리베이터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이안은 승강기 내의 수많은 버튼을 훑어봤다.
‘미미르, 어디서 열리는지 알고 있댔지?’
[만신전에서라면, 매년 99층에서 진행되었지. 그 옆의 버튼들 중 오른쪽 가장 위에 있는 것을 눌러라.]
‘좋아.’
미미르의 말을 듣고, 이안은 망설임 없이 ‘99’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스윽
지구의 것과는 달리, 엘리베이터가 아무 소리도 없이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와아….”
순식간에 개미집처럼 작아지는 1층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에반은 평소답지 않게 바깥을 비추는 유리창에 붙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건 또 오랜만인데.”
이안 역시 그 광경을 보며 지구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즐겼다.
탑승한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을 즈음.
우웅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강철 문이 스르륵 열렸다.
“뭐야?”
바깥의 풍경은, 이안이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짹짹짹
펜트하우스(Penthouse), 아니 펜트빌리지라고 해야 할까.
끼룩끼룩
빌딩 옥상에 펼쳐진 전원마을의 모습을 본 이안은 두 눈을 끔뻑였다.
***
윌리엄 바드리안.
통합주교이자 만신의 지상 대행자인 성광공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형과 함께 지상에 단 둘뿐인 존재.
하지만.
“하으으….”
엘리베이터 안, 약과 술에 쪄든 채 가마 위에 누워있는 사내를 보며 신을 떠올릴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스스로는 걸음조차 제대로 떼기 어려울 만큼 망가진 몸뚱이와 정신을 가진, 바드리안의 폐인.
“후으….”
당장이라도 자신을 쓰러트릴 것 같은 술과 약 기운에 그의 정신이 꺼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미첼….”
윌리엄이 힘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었다.
“네, 공자님.”
그러자, 조금 전 이안을 향해 소리친 신관이 가마를 멘 채 고개를 숙였다.
“어땠어?”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마디.
“저 역시 공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미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마치 윌리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지…?”
“네.”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눈 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약 기운에 취한 그의 눈이 다시 스르륵 감겼다.
[나를 불러라, 나를!]
[너를 지상의 신으로 만들어주마!]
[네 아비보다 더 높은 권세, 더 강한 힘, 더 많은 재물을!]
‘망할 놈.’
약 기운 뒤로 아련하게 들리는 수백의 목소리와 함께.
***
만신전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마을은 의외로 평범했다,
원래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인 듯, 빵을 굽는 구수한 냄새가 이안의 코끝을 스쳤다.
분명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꽤나 많았지만.
‘죄다 신관복을 입고 있군.’
순백색이란 점을 제외하면 제각기 다른 문양과 형태의 신관복.
그들에게선 하나같이 세리아와 비슷한, 혹은 더욱 강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만신전의 수도마을이다. 신을 모시는 교단의 수도자들 중 선발된 자들만이 살 수 있는 곳이지.]
말을 마친 미미르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애당초 신성력에 기반을 둔 그에게 이곳의 기운은 너무나 포근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어으, 추워. 빌어먹을 신성력같으니.”
겨울이 지나고 봄바람이 불게 된 지도 꽤 오래건만.
저 멀리에서 옷을 겹겹이 껴입은 소년이 온몸을 덜덜 떨며 다가왔다.
이안에겐 너무나 익숙한 얼굴.
“파이톤?”
“그래, 참 빨리도 왔다. 으으. 기다리느라 혼났네.”
탈마공의 자식, 백염의 파이톤.
마치 몸살에 걸린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 때마다 그의 흰 머리카락이 쭈뼛 솟았다.
“뭐야, 그건. 감기라도 걸린 거야? 5급 마법사가?”
이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몸에 마력이나 오러, 신력을 받아들인 자들은 기본적으로 강한 체력과 저항력을 지닌다.
하물며, 페르소나를 다룰 수 있는 자격자의 수준에 도달한 자들은 어떻겠는가.
한겨울에 반팔로 돌아다녀도 좀 추울지언정 감기 걸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안의 말을 들은 파이톤이 툴툴댔다.
“5급 마법사가 감기는 무슨. 이게 다 빌어먹을 신성력 때문이지.”
“아.”
그제야 파이톤이 마족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의 피가 머금고 있는 마기는 신성력과 상극이었으니까.
“이제 알았지? 알았으면 빨리 들어가자. 나 지금 진짜 죽을 것 같거든?”
이안이 채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얼굴도 머리카락도 하얗게 질린 반마족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에반과 함께 뒤를 따라가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근데, 갑자기 나는 왜 기다린 거야? 분명 신관들이 안내해 줄 거라고 들었는데.”
안내해주겠다던 신관들은 어디로 가고, 웬 반마족 하나만 남아서 덜덜 떨고 있는 건지.
이안의 머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파이톤이 한마디를 던졌다.
“내 실험체가 작살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에취!”
“뭐?”
작살이 난다니.
통합주교와 만신들이 보호하는 이곳에서 이안을 위협할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훌쩍. 괜히 지금부터 시선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파이톤은 대답 대신 코를 훌쩍이며 발을 바삐 놀렸다.
‘뭐지?’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분명 그가 저러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
이안과 에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곧, 세 사람이 언덕을 넘자.
“호.”
눈앞을 메운 저택들을 본 이안이 감탄했다.
정확히 일곱 채.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한 저택이 드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영웅제를 위해 준비된 곳인지, 각 저택의 가장 위쪽에는 각각의 공작가를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자, 이제 너희 저택으로 들어가면 돼. 설마 너네 가문 문장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지? 들어가면 내일 영웅제가 시작될 때까지 그냥 처박혀있어. 에에엣취!”
“잠깐,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부터 해줘야 할 거 같은데.”
이안은 파이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끌고 와서는 저택에 처박혀있으라니.
큰 위험에 처한 VIP를 준비해 둔 안가(安家, Safe House)안에 들여놓고 보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자 파이톤은 창백해진 얼굴로 짜증을 내며 이안의 손을 끌었다.
“설명은 무슨,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그때.
“아, 젠장.”
어딘가를 바라본 파이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안의 시선이 따라 돌아갔다.
그리고.
“돼지!”
상대를 확인한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을 저렇게 부를 사람은, 이곳에서 몇 되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알리아 이그드라실.
심안공이 공을 들여 키워낸 차세대 신궁(神弓)이자.
이안의 영혼을 노리던 포식자.
“이제 돼지라고는 못 부르겠는데?”
은발의 요정 공녀가 이안을 향해 생긋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