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연합공국은 대륙을 지키는 장벽이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연합공국의 일곱 공작령은 마경과 인계 사이를 세로로 길게 나누고 있었으니까.
개중 아슈타르 공작령의 위치는 공국의 가장 남쪽.
공작령에서 영웅제가 열리는 바드리안 공작령까지 가기 위해선 환세공과 심안공의 영지를 거쳐야 했지만.
“우욱.”
마탑의 공간 이동 마법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이안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쯧, 왜 그래? 처음도 아니면서.”
마법진을 빠져나온 에반이 노랗게 뜬 얼굴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이 혀를 찼다.
“공자님도 썩 좋아 보이시진 않습니다만, 우욱.”
“닥쳐.”
하지만 멀미를 느끼는 건 이안 역시 마찬가지.
헛구역질하던 에반이 쏘아붙이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그가 호위기사를 슬쩍 노려봤다.
몇 번의 경험으로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불쾌함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바드리안 공작령에 도착한 게 맞긴 하군. 여기저기서 신성력이 느껴진다.]
주변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에 미미르가 눈을 감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난 아무것도 못 느끼겠는데.”
이안의 기감에 느껴지는 것은 마탑과 마법진을 가득 메운 마력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사자머리를 바라봤다.
[마탑 내부의 마력농도가 높아서 그럴 것이다. 이곳은 성광공(聖光公)의 영역이니, 마력이 신성에 변질되는 걸 막으려는 대책이겠지.]
순수한 마력은 마치 물처럼 주변의 힘을 닮아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마탑 내부의 마력농도를 일부러 높이지 않았다면, 주변에 가득 들어찬 신성력에 마력이 변질되어 공간이동 마법진이건 뭐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으리라.
“그럼, 밖으로 나가면 뭔가 다르단 소리네.”
도대체 신성력의 농도가 얼마나 짙기에, 일부러 마력농도를 높여야 할 정도란 말인가.
강한 호기심을 느낀 이안은 마탑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 지부장님.”
“여긴 어쩐일로….”
네 발의 총탄으로 얻은 혈사자 마탑 지부장의 자리.
그 내막을 알고 있던 마탑의 인원들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이런 반응에 익숙해진 이안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끼익
곧, 이안은 마탑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화아아악
따스한, 그러면서도 거대한 힘이 파도처럼 이안을 덮쳤다.
지금껏 여러 번 느껴보고, 사용해 본 익숙한 느낌.
하지만 지금까지 느껴왔던 신력과는 그 압력이 달랐다.
이건 마치.
‘신?’
신기에 봉인된 그림자신의 성역에 들어섰을 때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온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이 힘에 비하면 그림자신의 성역 따위는 동네 놀이터의 모래알만도 못한 수준이리라.
우웅
이안은 본능적으로 전신에 오러를 퍼뜨렸다.
오러가 전신에 가득 채워지고 나서야, 이안은 거대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난 아닌데?”
이안은 놀란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만한 밀도의 신성력이 도시 전체를 채우고 있다니, 그 양이 얼마나 될지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부르르
그때.
이안의 가슴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알?’
강한 신성력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 걸까.
옷 속에 넣어둔 알이 부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좋아하는 건가.’
그림자의 힘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인지, 알의 진동에서 묘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림자신의 씨앗을 담고 있는 알이니 신성력을 선호하는 것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신이 아니라 무슨 애완동물 같단 말이지.’
전생에 키우던 수색견을 떠올린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바드리안 공작령의 수도에는 성도, 성벽도, 마을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대리석과 강철로 신들의 모습을 조각해놓은 수천의 신상(神像).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조각품들 사이로 곧게 보이는 단 하나의 건물.
“빌딩?”
지구의 고층건물을 연상케 하는 직사각형 형태의 거대한 구조물.
그것을 보고 있자니 전생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빌딩? 그게 뭐지? 저건 만신전(萬神殿)이다. 바드리안의 본거지이자 교단의 중추지.]
“신전이라고? 저게?”
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거대한 건물을 바라봤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신전들과는 애당초 건축양식부터가 이천 년쯤 앞서 있지 않은가.
하지만 미미르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스텔라니까.]
스텔라.
바드리안 공작령의 중심도시이자 도시 자체가 거대한 신전으로 이루어진 도시.
그리고.
“저기서 영웅제가 열린다는 말이지.”
갈리우스를 위해 바치는 제전이 열리는 곳.
목적지를 확인한 이안은 다짐했다.
“적당히만 해야지.”
딱 중간만 가자.
눈에 띄어서 특별히 좋을 것은 없었으니까.
결심을 굳힌 이안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슈타르의 명예가 걸린…]
옆에서 미미르가 무어라 말했지만, 이안이 알 바는 아니었다.
***
이안은 에반과 함께 만신전에 들어섰다.
그가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
“뭐야, 이건.”
그는 이곳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성물 3종 세트가 단돈 금화 다섯 개!”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한 달에 금화 하나면 최고급 제물을 열 신께 바칠 기회를!”
거대한 건물의 로비 양쪽으로 깔린 좌판들.
좌판마다 깔려있는 제물과, 잡화를 팔아치우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장사치들.
“공자님, 제가 알던 신전하고는 좀 다른 것 같은데요?”
“동감이야. 이건 완전히.”
시장바닥이잖아.
말을 마친 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신전이라면 으레 갖추고 있어야 할 엄숙함이라거나 경건함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기도 대신 금화와 설전이 오가는 이곳을 누가 신전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옆에서 미미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신전의 1층은 상인의 신이 관장하는 공간이니까.]
상인의 신을 모시는 신전은 시장이라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
“다른 곳은?”
[각 층은 모두 각 신이 맡은 성역(聖域)이지. 너도 오면서 수많은 신상을 봤을 텐데?]
그 말에, 이안은 지나오면서 본 수많은 신상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신상들이 전부….”
[만신전에 들어서지도 못할 만큼 권세가 미약한 신들의 것이지.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은 성광공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 하니까.]
바드리안 공작, 성광공의 이명은 통합주교.
인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다면 모든 신의 지상 대리자인 통합주교를 가까이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무슨 개도 아니고, 영역표시야, 뭐야?”
물론 그 말을 들은 이안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지만.
그때.
“공자님.”
“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기요.”
에반이 손가락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안의 고개가 따라 움직였다.
시장 하나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을 가진 1층의 사방을 가로막은 석벽.
그리고, 그 벽을 세로로 가르는 한 줄기의 선.
그 선을 보는 순간.
“엘리베이터?”
내가 잘못 본 건가.
이안은 두 눈을 손으로 비빈 다음 오러를 눈에 집중했다.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기이잉
전생의 민혁이 수없이 보고, 타왔던 탈 것.
지구에서나 있을법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금박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채 활짝 열려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지?’
그곳에 바드리안 공작가의 문장이 박혀 있지 않았다면 분명 이곳이 지구가 아닌지부터 의심했을 터.
하지만.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엘리베이터 때문이 아니었다.
“뭐야, 저건?”
승강기에서 나온 일군의 사람들을 확인한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쿵 쿵
백색의 신관복을 입은 네 사내가 호화스럽게 치장된 가마를 어깨에 멘 채 양쪽으로 줄지어 걸어 나왔다. 가마의 무게에 신관들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땅이 진동했다.
가마 위에 거만하게 기대앉은 것은.
“돼지?”
이안의 또래일까 싶은 장발의 사내.
두 겹으로 늘어난 턱과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군살, 그리고 손에 든 술병이 사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게 했다.
순간.
파아앗
이안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게 친구라고?’
머릿속에서 진짜 이안이 말했던 친구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윌리엄.”
바드리안 공작가의 2공자.
그리고.
‘원주인의 유일한 친구인가.’
그와 함께, 친구와의 얼마 없는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봐야, 똑같은 망나니끼리 쌓을만한 추억이란 게 술이나 먹으면서 깽판 치는 것뿐이었지만.
“저리 안 꺼져 이 자식들아? 하여간 우리 가문의 피나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놈들이, 딸꾹.”
이미 꽤나 취한 상태였는지, 반쯤 풀린 눈으로 시장의 사람들을 훑어본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 윌리엄 공자다.”
“이, 이봐. 어서 가자고.”
“빨리, 빨리. 무슨 치도곤을 당하려고.”
마치 집주인을 발견한 생쥐처럼 제각기 사방으로 흩어져버릴 뿐.
누가 진짜 이안의 친구 아니랄까 봐, 뭐라 말하기도 힘든 폭거에 이안의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예전에 저랬나?”
“소문은 많이 들었었는데요. 십 년 전엔 시장에서 흙탕물을 맞으신 다음 횃불을 들고….”
“거기까지.”
“읍, 읍.”
에반의 입에서 진짜 이안의 악행들이 쏟아져 나오자 기겁한 이안이 입을 틀어막았다.
‘도대체 어느 게 진짜 모습인지….’
꿈에서 만난 진짜 이안을 떠올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도 가자. 여기선 볼일이 없으니까.”
이안은 손에 묻은 침을 스윽 닦고는 에반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이, 이안!”
저 멀리에서, 듣고 싶지 않은 부름이 들려왔다.
이안은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가마와 돼지를 바라봤다.
“봤으면 인사라도 해야지, 딸꾹! 그냥 갈 셈이었어?”
가마 위의 돼지가 나름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향해 술병을 들어 올렸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당연히, 영혼이 바뀐 이안이 저 망나니 공자에게 우정 따위를 느낄 리 만무했다.
이안이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댔지만, 술에 취한 상대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크, 우리 친구 변한 것 좀 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잖아, 딸꾹. 설마 잔소리꾼 어른처럼 검술이라도 배우는 거야?”
“뭐, 그렇지. 난 볼 일이 있어서, 나중에 또 보자고.”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이안이 발을 움직였다.
“근데, 여긴 갑자기 왜 온 거야? 오면 기분 잡친다면서 우리 영지는 쳐다도 안 보던 놈이.”
하지만 윌리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응?”
이안의 허리춤에 찬 권총의 기운을 느낀 윌리엄이 술병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페르소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의 허리춤에는 자격을 인정받은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갈리우스의 대 마족병기, 페르소나가 걸려있었으니까.
그리고, 공가의 자식이 페르소나를 가진 채 영지에 방문했단 것은.
“설마, 설마 영웅제 때문에 온 거야? 네가? 푸하하하하핫! 아슈타르도 맛이 갔구만!”
이안이 스텔라에 온 이유를 깨달은 윌리엄은 박장대소했다.
영웅이라니.
폐검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놓은 자신의 친구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아닌가.
“뭐, 그렇지.”
이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일견 모욕처럼 보였지만, 절친한 친구라면 할 수도 있는 말이 아닌가.
수상하다는 티를 낼 게 아니라면 여기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옆에 그 꼬맹이는 뭐냐? 검은 모르겠고, 얼굴은 제법 반반한데.”
이안에게도,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아, 설마 그런 용도야?”
말을 마친 돼지가 에반과 이안을 음흉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윽고,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든 윌리엄이 오른 검지와 원을 교차시키려는 순간.
“아가리 닥쳐.”
철컥
“대가리에 바람구멍을 내버리기 전에.”
이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