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영웅제.
이안도 대강은 들어 알고 있었다.
‘일 년마다 한 번씩, 공국의 일곱 영웅을 기리는 공국 최대의 행사.’
하지만.
“대리인이 뭔데?”
“네?”
망나니 이안의 머릿속에 든 지식이라곤 그게 전부라는 게 문제였다.
대리인이 뭔지, 자신이 왜 가야 하는지.
이안은 영웅제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저, 정말 모르셔서….”
어린 호위기사가 주군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상대가 주군이 아니었다면 입에서 미쳤냐는 소리가 나왔을 게 분명한 표정.
하지만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뭐, 모를 수도 있지. 그래서 그게 뭔데?”
“후, 그러니까 말입니다.”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 주군을 보곤, 에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웅제가 어떤 행사인지는 아시죠?”
“축제 아냐?”
“그냥 축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마법의 신 갈리우스께 바치는 제사라고요.”
“그래?”
“공국, 그리고 일곱 공가가 생겨날 수 있었던 건 어찌 됐건 갈리우스님의 덕분이니까요.”
마법의 신 갈리우스가 일곱 영웅에게 내려준 대 마족병기, 페르소나.
그것이 아니었다면 연합공국은 커녕 대륙 전체가 마족의 것이 되었을 터.
갈리우스의 가장 큰 수혜자인 일곱 공작가가 그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안의 눈에도 제법 이치에 맞아 보였다.
“그럼, 대리인이란 건?”
“원래는 가주가 직접 가서 의식을 치러야겠지만, 사실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러니 대리인을 보내는 거죠. 보통은 가문의 자제 중 장래가 촉망받는 인물을 선정하고요.”
“그렇다는 건….”
대강 상황파악을 끝낸 이안이 표정을 굳혔다.
다시 말해, 신검공이 자신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말이 아닌가.
‘평판이 바뀌길 바라긴 했지만….’
에반이 말하는 뉘앙스로 볼 때, 아슈타르 공작가에서 영웅제에 참가하는 것은 이안 혼자뿐일 터.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다.
“공자님, 이건 보통 기회가 아닙니다. 드디어 공자님의 능력을 온 공국 사람들 앞에 드러낼….”
“그만, 일단 나가봐. 생각 좀 해봐야겠으니까.”
흥분한 에반을 밖으로 내보낸 다음,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안, 무슨 걱정을 하는 게냐? 어차피 네가 가진 능력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 텐데.]
옆에서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자머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까지는 진짜 이안이 살아오며 쌓아온 망나니로서의 업적 때문에 묻혀있었지만, 이미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이안이 아무리 노력한들, 자신의 힘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였다.
[차라리 이 기회에 네 힘을 온 대륙에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직 네가 이뤄낸 일들을 단순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꽤 있을 테니 말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방식의 문제지.”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영웅제에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당장 이안을 향해 칼을 갈고 있는 참룡공, 구스타프 공작가의 일족들이 가만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이 역시 공작의 새로운 시험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아니었다. 이안이 알고 있는 에드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그 뒷감당은 전적으로 네 손에 달려있단 사실을 잊지 마라.’
“설마, 이런 식으로 뒷감당을 시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상대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시험이 아니라 고도의 함정이라 말해도 손색없을 방식.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곧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안의 입가가 뒤틀렸다.
[그래, 어쩔 셈이냐?]
이안의 말을 듣고 미미르가 물었다.
“우선은….”
거부할 수는 없다.
공작이 낸 시험을 포기해서 공작과의 신뢰를 무너뜨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받아들여야지.”
그리고, 그걸 위해선 정보가 더 필요했다.
이안은 주머니에서 꺼낸 수정구슬을 만지작거렸다.
***
사실 이안이 무언가를 물어볼 만큼 친분이 쌓인, 그리고 질문에 대답해줄 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영웅제에 대리인으로 참석한다고?
“그래.”
-꽤나 성공했는데, 폐검? 아니, 이제 폐검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안의 말에 구슬 위로 떠 오른 파이톤의 홀로그램이 놀란 표정을 짓고는 씨익 웃었다.
-마침 잘됐네.
“뭐?”
잘됐다니.
갑작스런 반마족의 말을 들은 이안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파이톤의 홀로그램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 몸도 대리인으로 참석하게 됐단 말이지?
“그래?”
-마침 우리 공국에 갈 사람이 없었거든.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렇게 네가 오게 될 줄이야.
말을 마치며 음침한 미소를 짓는 것이 영 꺼림칙 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나도 마침 잘됐네.”
-그래?
“대리인이 할 일에 대해서 물어보려던 참이었거든.”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본단 말야? 너, 공국 사람이 맞긴 한 거냐?
“관심이 없으면 모를 수도 있지. 안 그래?”
-누가 폐검 아니랄까 봐.
파이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의 영혼은 아슈타르 가문의 것이 아니었지만, 눈앞의 상대가 그것을 알 리 없지 않은가.
-좋아, 설명해주지. 대리인이라는 건….
파이톤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안은 그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었다.
파이톤의 설명은 길고 장황했지만, 설명을 모두 들은 이안은 그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문의 대전사라는 것 아냐?”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정확히는 신에게 우리의 가능성과 능력을 확인하는 자리이지만.
“무슨 전쟁의 신도 아닌데 말이지.”
생각보다는 귀찮은 일이었다.
신이 내려주는 시련을 견뎌내고, 다른 여섯의 대리인들과의 경쟁 끝에 제사장이 되어 신을 독대할 권한을 얻는 것.
그게 영웅제의 전부였다.
-뭐, 어차피 갈리우스를 만나는 건 재수 없는 성광공 쪽으로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신경 끄라고. 그보단 다른 것들에 집중하는 게 낫지.
“다른 것?”
-신의 시련을 이겨내고 나면 무언갈 받을 수 있거든.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지만.
“흠.”
파이톤의 말에 이안은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혹시나 따뜻하게 하면 깨어날까 싶어 이불을 칭칭 감아둔 검은 알.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저 녀석을 깨울 수 있지 않을까.
이안에겐 믿지도 않는 신의 얼굴 따위를 보는 것보다야, 그쪽이 더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좋아, 그러면….”
대강 얻을 정보를 전부 획득한 이안은 통신을 종료하려 했다.
그때.
-아, 그리고.
“음?”
이안의 말을 끊은 파이톤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마력을 거두려던 것을 멈췄다.
-그녀도 참가할 거야.
“그녀?”
이안이 이 대륙에서 알고 있는 존재 중, 그녀라 지칭할만한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알리아 이그드라실, 그 미친년 말야.
“…준비를 좀 해야겠는데.”
개중 가장 최악의 인물이 파이톤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공작가들이 아무리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사이라지만, 마경도 아니고 영지에서 그리 허술하게 일을 벌일 리 없지 않은가.]
이안이 갑자기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미미르가 이상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봤다.
“글쎄, 너도 영혼을 뺏길 뻔했다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말이지.”
빠드득
입에서 이안의 말을 듣기 전까진.
[설마, 네 영혼으로 영궁을 만들려고 한 게냐? 영성의 홀에서?]
이안의 말을 듣자마자 미미르가 혀를 내둘렀다.
당시의 이안이 그만큼 힘없는 존재이긴 했지만, 마경도 아니고 다른 공가의 자제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런 만행을 벌이려 하다니.
[네 영혼이 보통 사람의 것은 아니긴 하다만, 어지간히도 탐이 나긴 했나 보군.]
“그래, 도대체 내 영혼에 뭐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파이톤, 알리아, 프레이야, 벨라크론.
도대체 그의 영혼에서 무엇을 봤길래 이안을 원하는 것일까.
당사자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미미르, 시련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건 갈리우스의 마음대로지. 매번 영웅제가 열릴 때마다 바뀌거든.]
“그럼, 공략법을 미리 세워놓을 순 없겠고.”
무엇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대비를 하겠는가.
그렇다면 이안이 준비해야 할 것은 하나뿐.
“훈련이나 해야지, 빌어먹을.”
자신의 것을 더욱 익숙하게 다루는 것.
방에서 나온 이안은 연무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아버지,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아슈타르 성의 집무실.
아슈타르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곳에서, 한 사내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녀석에게 페르소나를 내려주신 것도, 작위를 내려주신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명 망나니 같은 놈이라도 아슈타르의 자식이니까요. 하지만.”
요제프 아슈타르.
“영웅제라뇨. 녀석이 밖에서 어떤 멸칭으로 불리는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그에게, 이번 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위신이 달린 문제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만.”
공작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그의 말이 끊어졌다.
“이미 결정된 문제다.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더 할 말이 있느냐?”
말을 마친 신검공의 손가락이 책상의 모래시계를 향했다. 이미 반 이상 비워진 모래시계의 모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요제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주십시오.”
“음?”
“저에게도, 영웅제의 대리인으로 나설 기회를 주십시오.”
요제프는 절박했다.
지난번 마탑에서의 사건 이후, 마탑을 기반으로 한 그의 입지는 좁아질 대로 좁아진 상태.
이대로 간다면, 공작가의 후계자 자리는 물 건너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
영웅제에 가문의 대리인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은, 곧 가문의 유력한 후계자라는 말과 같다.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리인으로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능력을 증명해주는 자격증과 같았으니까.
“제가 그 망나니 녀석보다 못한 것이 없단 걸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어떻게?”
둘째 아들의 말에 에드너가 물었다.
이미 마음에서 반쯤 떠난 자식의 말 따위, 별반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신검의 후손이라면, 마땅히 검을 부딪쳐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의 다음 말을 들은 공작은 조금 흥미가 생겼다.
‘할 수 있어.’
요제프는 자신이 있었다.
그 역시 환수급의 페르소나를 다루는 상급 마법사.
요즘 들어 부쩍 강해졌다곤 하나, 십 수년간 마력을 돌리는 법조차 몰랐던 동생 따위에게 무력으로 질 리 없지 않은가.
“검도 휘두를 줄 모르는 녀석이 말은 잘하는구나.”
말과는 달리, 에드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도전은 아슈타르의 피를 이은 자들에게 생활과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단지.
“나는 이미 이안을 대리인으로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도전을 하고자 한다면, 그만한 가치의 것을 내걸어야 할 뿐.
“번복하고 싶다면, 네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걸어야 할 것이야.”
말을 마친 공작이 무심한 표정으로 둘째 아들을 바라봤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승낙의 의미라는 것을 깨달은 요제프가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고개 숙인 그는 보지 못했다.
‘분수도 모르는 녀석 같으니.’
공작의 싸늘한 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