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안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다.
아슈타르의 현 공작 에드너가 공작위를 물려받기 전 떠났던 무사수행.
전 대륙의 내로라하는 기사들과 무사들을 하나씩 격파하면서 이름을 알리던 중, 산적으로부터 구해낸 평민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대로 결혼까지 성공.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장담컨대 공국 전체를 뒤져도 찾기 힘들 것이다.
고위귀족의 아들과 평민 소녀의 열애는 언제나 그렇듯 좋은 가십거리이니까.
하지만.
“미안하지만 사실이란다, 동생아.”
이안의 배다른 큰 형, 오베르트는 말 한마디로 세기의 로맨스를 단숨에 짓밟아버렸다.
“네가 평범한 녀석이었다면 죽건 말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아니, 그 전에 아버지께서 왜 너를 가계도에서 지워버리지 않으신 건지 궁금하지도 않았던 거냐?”
“그건….”
무어라 말하려던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작 혈육의 정 때문에, 철의 사자라 불리는 그의 아비가 망나니처럼 살던 아들을 내버려 두었을까?
‘아냐.’
그가 겪어본 아버지의 성격이 맞다면, 그럴 리가 없었다.
왜 이제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걸까.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네 혈통은 우리 가문에도 중요한 존재다. 고작해야 시기와 질투 따위 때문에 가문의 미래를 짓밟을 수는 없지.”
“무슨 혈통 말입니까?”
도대체 그 혈통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안은 머릿속 기억창고를 뒤져봤지만, 이안의 혈통이나 어머니와 관련된 정보는 잠겨있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모르는 거냐,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냐? 아무튼,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니 이만 가보지.”
오베르트는 그런 이안을 잠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등을 돌려 사라졌다.
이안과 에반. 남은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에반.”
“네, 공자님.”
침묵 속에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에반이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자, 이안이 손가락으로 성을 가리켰다.
“먼저 돌아가 있어. 난 좀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까.”
“네?”
갑작스러운 이안의 말에 에반은 당황했지만, 이미 이안의 신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확인해야 해.’
파파팟
이안은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확실하게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안은 성내의 이동수단으로 사용되는 비행접시 위에서 멈춰 섰다.
우우웅
이안이 접시에 마력을 주입하자, 비행접시는 엘리베이터처럼 아래로 끝없이 내려갔다. 이안의 주변이 점점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곧.
슈우우
비행접시가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이안은 눈앞에 나타난 사자머리 형태의 문을 바라봤다.
[비밀서고로군. 하기사, 여기만큼 정보를 찾기 좋은 곳도 없겠지.]
장소의 정체를 알아챈 미미르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슈타르 공작가가 지난 800년간 모아둔 모든 정보와 지식을 모아놓은 곳.
용족의 수정탑에 비하면 초라한 역사지만, 대륙의 국가들에 대한 정보만 놓고 본다면 방대한 양의 정보를 자랑하는 지식의 성지.
‘이곳이라면, 분명 정보가 있을 것이다.’
푹
사자의 아가리 앞에 선 이안은 사자의 왼쪽 송곳니에 새끼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따끔한 통증이 손가락을 통해 전해졌다.
곧.
구구구궁
송곳니에 묻은 피의 주인을 확인한 사자가 입을 크게 벌렸다.
이안이 벌어진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자 사자의 아가리는 곧 원래대로 다물어졌다.
사자의 목구멍 뒤로 난 비좁은 통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도착했군. 근 20년 만이야.]
미미르가 감상에 젖은 눈으로 비좁은 통로 끝에 나타난 공간을 바라봤다.
‘도서관이로군.’
환한 빛을 뿜어대는 마법 조명 아래 줄지어 늘어선 나무책장들을 보며 이안은 지구의 도서관을 떠올렸다.
지하라서 창문이 하나도 없단 것만 빼면 별반 차이도 없으리라.
이곳이 도서관과 명백히 다른 점은 하나.
[아슈타르]
‘이쪽이군.’
책의 주제 대신, 책과 문서가 담고 있는 정보의 대상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는 것.
가문의 이름이 적힌 책장들을 확인한 이안은 주저 없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칼츠, 슈벨만, 베른다이머, 스테판, 에드너….’
초대 가주와 그 직계혈족들, 이제는 계승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방계까지.
말 그대로 가문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정보가 이 거대한 책장에 모두 모여 있었다.
이안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핏줄과 연관된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상해.’
얼마나 지났을까.
책장에 꽂힌 자료 대부분을 살펴본 이안이 이마를 찌푸렸다.
오백 년 전 공작가가 처음 태동할 때, 심지어 그 당시의 방계 일족과 공작부인에 대한 정보까지도 모두 이 책장에 들어있었지만.
‘왜 없지?’
단 한 명.
이안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면….’
생각을 바꾼 이안은 책장의 맨 아래, 오른쪽 구석을 살폈다.
책장에 빼곡히 들어찬 아슈타르들을 지나친 끝에.
‘찾았다.’
원하는 것을 발견한 이안은 눈을 빛냈다.
[이안 아슈타르]
어머니에 대한 자료가 없다면, 아들의 것을 보면 되지 않겠는가.
어지간한 보고서보다도 얇은 두께기는 했지만, 분명 단서는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이안은 기대감을 안고 자료를 펼쳤다.
하지만.
[원하는 게 없는 모양이군.]
“그래.”
미미르의 말에 이안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의도적으로 누가 지워버린 게 분명해.”
그것 말고는, 부자연스럽게 끊겨있는 서술 사이에 뜬금없이 존재하는 공백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손가락보다 얇은 서책에 적혀있는 내용이라곤 이안이 지금까지 벌여온 망나니짓에 대한 것뿐.
“젠장,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지워버린 거야?”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이안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책장에 책을 쑤셔 넣었다.
그 순간.
‘알고 싶어?’
“뭐?”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목소리. 이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안, 무슨 일이냐? 여긴 우리 둘 밖에….]
목소리를 듣지 못한 미미르가 이안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순간.
파아아앗
이안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또….’
이안의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
[이안, 이안!]
정신을 잃은 이안의 몸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
정신을 차린 이안 앞에 선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용들은 어땠어? 보아하니 내가 말한 대로 잘해준 것 같긴 한데.”
“무슨 꿍꿍이인지나 말해. 당장이라도 대가리를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철컥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비웃기라도 하듯, 민혁은 해맑게 웃는 진짜 이안을 향해 권총을 들이밀었다.
“진정해, 친구.”
“친구?”
상대의 뻔뻔한 태도에 민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안과 민혁의 관계는 최대한 우호적으로 말해봐야 전 집주인과 현 집주인의 관계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소한 내 말대로 해서 손해 본 건 딱히 없잖아? 얻은 게 있다면 모를까.”
“난 잘 모르겠는데.”
“그 알, 아직 잘 가지고 있지 않아?”
알.
이안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듣자마자 민혁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대체 어디까지가 네 계획인 거지?”
마치 팔다리에 실이 묶인 마리오네트가 된 느낌.
민혁의 머릿속에 국가의 노예로 살아온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방아쇠울에 건 검지손가락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도 그렇게까지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지. 내가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본다니, 그게 무슨….”
무언가 중요한 말을 내뱉은 것 같은 이안을 향해 민혁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지금의 네겐.”
민혁의 말을 끊은 이안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네가 원하는 걸 알고 싶다면, 내 친구를 찾아봐”
“친구?”
갑자기 친구라니.
민혁이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진짜 이안을 바라봤다.
그야.
“너, 친구 없잖아?”
그의 기억창고 어디에도, 이안의 친구에 관한 기억은 없었으니까.
“…곧 만나게 될 거야. 그렇게 짜여있으니까.”
“너….”
순간, 이안의 표정이 붉어진 것을 민혁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볼 땐 권한을 찾아서 만나자고.”
“뭐?”
“1급 관리자의 권한 말이야. 그 정돈 얻어줘야 앞으로 생존하기 편할 거야.”
“그게 무슨….”
1급 관리자 권한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영웅급 페르소나를 손에 쥐어야지만 얻을 수 있을, 2급의 권한을 가진 민혁의 것보다 더욱 강력한 권한.
하지만 그걸 얻기엔 민혁의 경지가 한참 모자랐으니까.
민혁이 채 되물어보기도 전.
“안녕.”
딱
이안이 손가락을 한 번 튕김과 동시에, 민혁의 의식이 끊어졌다.
***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등에 닿는다.
‘침대?’
순간, 이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신을 차린 그의 시선이 좌우로 움직였다.
‘내 방인가.’
태평양처럼 넓은 침대를 확인한 이안이 머리를 흔들었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공자님!”
이안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에반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손사래를 쳤다.
“작게 말해, 머리 터질 거 같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냥 술 먹고 뻗은 느낌인데. 얼마나 지났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안이 물었다.
하지만 에반의 대답은 이안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이틀 동안 누워계셨습니다.”
“미친, 이틀이라고?”
에반의 말에 이안이 놀라 오른쪽에 둥둥 떠 있던 사자머리를 바라봤다.
[저 말이 맞다. 네가 쓰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가의 기사들이 널 데려왔지.]
“골치 아픈데.”
미미르의 말을 들은 이안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이틀이라는 시간을 침대에서 날린 것도 날린 것이지만, 이 사건으로 성의 인물들에게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더욱 커져 버렸다.
조용히 꾸중만 듣고 난 다음 영지로 돌아가려던 이안에게는,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반의 반응은 달랐다.
“공자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또 뭔데?”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흥분과 걱정이 뒤섞인 에반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이안의 마음속에 일말의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자님께서 이번 영웅제의 대리인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영웅제?”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