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전룡회는 용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은 드래고니아의 용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들이 용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 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대단하군. 어린 용들을 팔아치우던 것이 다름 아닌 전룡회일 줄이야.”
드래고니아에 온 지 고작 일주일.
하지만 전룡회가 이곳에 나타난 것만으로 이안은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외부의 적을 만들기 위함인가? 용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
어떤 집단이건 외부의 적 앞에선 단결하는 법이다.
이안은 전생에서 그런 사례를 수도 없이 봐왔다.
“나약해 빠진 동족들을 예전의 위치로 돌리기 위해선 외부의 자극이 필요했다. 마침 써먹기에 적절한 녀석들이 있었을 뿐이지.”
이안의 날카로운 질문에 전룡회의 수장, 말레이우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동족을 팔아치운 그의 낯빛에는 단 하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 네 녀석이 여기 나타나 줬고 말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좌우에 도열한 용들이 권총을 쥔 이안을 천천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말레이우스가 씨익 웃었다.
“네 녀석을 제물로 바치고 나면 우리 일족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외부의 필멸자들이 얼마나 악독한 놈들인지 깨닫게 되겠지.”
“설마, 날 잡아 가둘 생각은 아니겠지? 진심이야?”
그의 말을 들은 이안은 코웃음 쳤다.
불멸자인 용족이 강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만큼 길고도 긴 세월을 살아온 존재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상대는 엘더급 하나. 나머지는 떨거지들일 뿐이야.’
이미 이안은 엘더급의 용을 완전히 압도해 본 경험이 있었다.
상대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본래 현대의 화기들은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있지 않은가.
‘패배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이안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환수급의 페르소나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들 역시 알고 있을 터.
그런데 어째서.
[웃고 있군. 설마?]
용들의 표정을 본 미미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승리를 예감한 듯, 비열하게 웃고 있는 저들의 표정에는 일말의 긴장감도 없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미미르가 급히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이안. 저들의 언령에 당하게 된다면….]
‘언령?’
언령.
미미르의 입에서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오자 이안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물음표가 채 가시기도 전.
-봉인하라.
말레이우스의 입에서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그 목소리가 동굴 전체를 휘돌았다.
그 순간.
[이, 이안! 도망쳐야…]
‘미미르, 미미르?’
미미르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안은 재차 미미르를 불렀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오라, 미미르.”
이안은 곧장 페르소나를 깨우는 시동어를 외쳤다.
적이 어떤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는 이상, 빠르게 녀석들을 처리하고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페르소나가….’
침묵했다.
시동어를 재차 외쳐봤지만, 페르소나에 잠들어 있는 막대한 마력은 단 한 톨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안의 몸뚱이에 존재하는 마력과 오러도 마찬가지.
“크하하하! 아무리 네놈들의 힘이 강력하다지만, 자그마치 백 년 동안 만들어 온 언령을 깰 수는 없을 터!”
남은 것은 말레이우스의 통쾌한 웃음뿐.
“본래 이렇게 사용할 힘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잘 써먹어 주도록 하지.”
말을 마친 은발의 사내가 오른손을 내뻗자, 이안을 둘러싼 용들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 정도로 당한 건 오랜만인데.’
의기양양해진 말레이우스를 앞에 둔 이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
용족의 실질적인 수장, 벨라크론을 앞에 둔 말레이우스는 기분이 좋았다.
오랜 염원 중 하나를 해결할 열쇠를 조금 전 얻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하나로 결집한 일족이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일뿐이다.’
그 원대한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고작해야 필멸자 몇의 목숨.
이만큼 남는 장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말레이우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군그래.”
바로 앞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벨라크론이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말레이우스는 표정을 고치지 않았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드디어 어린 용들을 사냥하면서 드래고니아를 무너뜨리려던 쥐새끼들을 잡았으니까요.”
“호오, 그게 정말인가?”
말레이우스의 말을 듣고 벨라크론이 슬쩍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떴다.
불쑥 나타나 헤츨링의 목만 들고 사라지는 필멸자 무리.
구스타프 공작가는 용족을 이끄는 벨라크론에게도 큰 골칫거리였으니까.
그 역시 분명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으니, 말레이우스의 말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게 누구인가? 설마 같은 동족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저희 일족들은 조금 약해졌을 뿐,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할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웅
그 불명예스러운 일을 한 것이 바로 자신이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말레이우스가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곧, 그의 손 위에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 영상 안에 담긴 존재가 누군지 알아본 벨라크론이 말을 더듬었다.
“아니, 이 자는….”
“이 녀석입니다. 외부와 연결된 침투로에서 구스타프 놈들과 함께 발견됐습니다. 다른 놈들은 놓쳐버렸지만, 이 녀석은 확실하게 생포했죠.”
말레이우스는 벨라크론의 놀란 표정을 보며 즐겼다.
‘이만한 공을 세웠으니, 벨라크론도 쉽게 내 의견을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다른 일족들이 자신의 의견을 따르도록 만들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대륙을 오시하는 용족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일족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빠른 시일 내에 녀석과 다른 필멸자들을 처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필멸자 놈들에게 죽어 나간 해츨링들의 혼을 위로할 겸 말입니다.”
현재 드래고니아에 들어와 있는 필멸자는 셋.
개중 한 녀석은 벨라크론이 용혈을 깨우기 위해 데리고 있었고, 다른 녀석은 무언갈 눈치챘는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말레이우스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이 노인네만 설득하면 돼.’
필멸자들과의 화합을 주장하는 벨라크론도 이번만큼은 자신의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말레이우스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보게, 말레이우스.”
“네.”
“자네, 지금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느새 딱딱하게 굳은 벨라크론을 마주한 말레이우스의 마음속에, 서서히 불안감이 치솟았다.
곧, 벨라크론의 입이 열렸다.
“어서 그를 풀어주게. 그는 그럴 이유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럴 이유가 없다니요. 이미 모든 정황이 그가 범인이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노룡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난 말레이우스가 버럭 소리쳤다.
“아무리 필멸자들을 감싸주려 하신다지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족의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필멸자들에 비해 출생률이 낮고, 극도로 오랜 시간을 거쳐야 성체가 될 수 있는 용들은 유아기의 용인 해츨링을 극도로 아낀다.
감히 해츨링을 죽인 자들을 두둔한다면, 아무리 일족을 이끄는 벨라크론일지라도 큰 반발에 직면할 터.
하지만 벨라크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가 없대도.”
“그게 도대체 무슨 말….”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말레이우스가 반발했지만.
“이미 용족을 이끌기로 약속한 자가, 무엇이 아쉬워 자신의 권속들을 해치겠는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벨라크론의 말을 들은 순간, 말레이우스의 동공이 세로로 커졌다.
‘용족을 이끈다, 필멸자가?‘
불멸자인 용들이 마땅히 필멸자들을 이끌고 보호해야 한다 생각했던 말레이우스에게, 노룡의 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노룡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말 그대로네. 제작자와의 오래된 언약에 따라서, 나는 이안 아슈타르에게 용족을 이끌 권한을 내주었네. 당장은 아니겠지만, 조만간 모든 용족에게 이 사실을 공표해야겠지.”
벨라크론은 분노에 찬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나 역시 동족을 위하는 마음은 자네와 같네. 방법이 조금 다를 뿐이지.”
“동족을 팔아치우는 게 동족을 위하는 거라니,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분노한 말레이우스가 일갈했지만, 벨라크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번 말하지 않겠네. 지금 당장 그를 풀어주게. 그는 제작자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자야. 곧 있을 마족과의 전쟁에서 그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걸세. 우리 용족도 그렇게 될 것이고.”
선대 고룡들이 제작자와 한 언약.
벨라크론은 그 언약을 깰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용족을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역시, 그 말이 맞았군.”
말레이우스.
전룡회의 수장이자, 다섯 엘더 드래곤 중 하나.
그의 입에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이라니?”
“당신은 알 것 없소, 벨라크론.”
노룡이 당황했지만, 말레이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검붉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 죽게 될 테니까, 일족의 배반자여.”
어느새, 전신이 검붉게 물든 말레이우스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
지하도시 드래고니아의 하층부.
그곳 어딘가에 만들어진 감옥의 창살 안에서, 이안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좋지 않아.’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무력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페르소나는 그 기능을 잃어버렸고, 초인적인 힘을 부여하던 체내의 마력과 오러는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가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
‘포로수용소에 갇혀있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자신을 철통처럼 감시하고 있는 세 마리 용을 바라보며 이안은 조금이지만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포로수용소의 간수와 저들을 비교하자기엔, 모든 힘을 잃어버린 자신과의 격차가 너무나 크지 않은가.
‘조금만 더 기다리자. 분명 틈이 생긴다.’
하지만 이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준비만 되어있다면, 언젠가 기회는 올 터.
“후우.”
바닥에 앉은 채 눈을 감은 이안은 자신의 신체를 관조했다.
힘이라고는 실오라기만큼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봉인을 풀려 애썼다.
몸을 휘도는 마력과 페르소나에 담긴 신력. 그리고 그가 삼켜버린 그림자신의 권능.
어떻게든 그중 하나라도 깨울 수 있다면.
‘나갈 수 있어.’
방심하고 있는 어린 용들 따위는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스윽
그 기회는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지하 감옥을 밝히는 수많은 마법구들.
그리고, 그 마법구의 수만큼 생긴 많은 그림자들.
그중 하나가.
꿈틀
‘그래.’
아주 조금이지만,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